People 제 15호 (2011년 07월)





[나의 꿈 나의 인생] 송승환 “꿈을 향해 달리면 행복이 잡힐 겁니다”

송승환 배우·공연 제작자 CEO·교수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의 힘찬 비상, 그 수려한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수도 없이 고꾸라지고, 상처를 입는 과정을 이겨내야 비로소 창대한 날갯짓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자이자 공연 제작자인 송승환 PMC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와 TV에서 보이는 화려한 모습 뒤에는 수십 번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가난이, 성인이 된 후에는 공연 실패로 인한 빚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연기’ ‘공연 기획’의 길은 지금까지의 행복이고 앞으로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문득 한없이 귀엽던 아역 탤런트 ‘송승환’이 한국 최고의 배우로, 또 대표 공연 제작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순간들을 퍼즐처럼 한 조각씩 짜 맞추고 싶어졌다. 한 조각 한 조각 모아 간신히 완성하자 ‘용기’와 ‘열정’이라는 단어가 퍼즐 위에 오롯이 떠올랐다.

송승환 대표와의 만남은 봄이 조금씩 꼬리를 감추던 5월 말 서울 삼성동 PMC 프로덕션에서 이뤄졌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잠시 대기하고 있었던 회의실 벽면에는 그가 출연하고 기획했던 작품 포스터가 수십 점 걸려 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다.

“지금 출연하고 계신 드라마(MBC ‘내 마음이 들리니’)가 몇 번째 작품인가요?” 너털웃음을 던지며 그가 답했다. “글쎄요, 어렸을 때부터 배우 생활을 한지라 정확한 숫자는 저도 모르겠네요.”

송 대표가 연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5년 아홉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이 동화구연대회에서 수상한 그를 눈여겨본 PD에게 발탁돼 아역 성우로 활동하다 이듬해 KBS드라마 ‘똘똘이의 모험’과 ‘얄개전’에 출연한 것. 이 작품들을 시작으로 휘문고 시절에는 요즘 젊은이들도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드라마 ‘여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평범한 유년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오전 오후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방과 후에는 방송국에서 드라마 촬영을 했어요. 요즘 학업과 연예 활동을 병행하는 아이돌이 많은데 아마 그 원조는 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학 진학 때까지 연기가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몸져눕게 되면서 그가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스레 돈을 벌 수 있는 상대 진학을 꿈꿨다. 1차로 지망했던 서강대 경제학과는 낙방, 2차에 지원했던 한국외대 아랍어과는 합격했다.

“그때 한창 중동 붐이 불던 시기였어요. 아랍어를 익히고 부전공으로 무역학을 전공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연기와 공연 이외에 다른 길을 생각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1. 아역배우 시절 2. 청춘스타로 인기를 구가했던 시절


두 번의 터닝 포인트

대학에서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가 열중한 것은 학교 연극부 활동. 뒤늦게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연극과 학업 사이의 갈등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일어났고 결국 ‘대학 중퇴’라는 쉽지 않은 결심을 했다. 그의 인생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주변의 반대가 많았죠. 하지만 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바로 ‘연기’였습니다.”

사람은 50세가 돼서야 비로소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지천명)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갓 스무 살에 자신의 길을 알았다.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무대 위에 있을 때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인들과 함께 신촌에서 ‘76극단’을 만들었고, 연극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까지 가리지 않고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인기도 많았다. 80년대 초반, 청춘스타 인기 조사에서 남자 1위는 그의 독차지였다. ‘젊음의 행진’과 같은 당시 인기 쇼 프로그램뿐 아니라 ‘장학퀴즈’ 진행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한창 ‘스타 소리’를 들으며 인기를 구가했지만 그는 또 한 번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 ‘미국 유학’이 그것이다.

“1983년에 해외 촬영 때문에 외국을 처음 갔어요. 뉴욕이었는데, 그곳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은 굉장히 닫혀 있는 사회라 해외 문화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뉴욕에서 봤던 영화, 공연 모두가 제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젊을 때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앞으로 더 큰 재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3. 미국 유학때 한인방송에서 DJ를 맡기도 했다. 4. KAIST에서 강연


‘뉴욕에서 몇 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그간의 연예 활동을 모두 접었다. 거의 맨손으로 뉴욕에 건너가 벼룩시장에서 시계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렸다. 주말에는 연극과 영화를 보거나 아내와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두 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모두 지금 저를 있게 한 자양분이기 때문입니다.”

좌절은 도전을 불러온다

두 번의 전환점을 이야기하던 그가 불쑥 꺼낸 단어는 ‘용기’였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둔 것도, 탄탄대로였던 연예계 생활을 그만둔 것도 모두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죠.”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서 용기를 내지 못해 남들이 가는 길로, 혹은 남들이 선택해준 길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따르다 보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괴리감은 평생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도 한다. 용기를 내기 전까지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돈을 좇아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곤 합니다. ‘어느 것이 행복할까?’라고요.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것과 조금 넉넉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당연히 후자가 행복하지 않겠어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돈이 가져다주는 ‘소유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유가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돈보다 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좇아야 한다. 그는 돈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길 원했고, 두 번의 용기를 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실패의 웅덩이는 도처에 웅크리고 있다. 뉴욕에서 돌아온 후 수동적 위치인 배우에서 능동적 위치인 공연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13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그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 ‘난타’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가 싸워야 했던 것은 흥행 실패와 그로 인한 빚이었다.

“실패라는 것은 위기 상황에 처했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죠. 제게 ‘빚’이라는 위기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도전 의식으로 나타났어요. 좌절만 하고 있으면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무언가에 실패했을 때 저는 ‘다음에 무엇을 해서 이것을 만회하지?’를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사고 속에서 도전 의식을 뽑아내는 것이죠.”

수많은 실패와 도전 끝에 그에게 최고 결실을 준 작품은 단연 난타다. 난타의 경쾌한 소리는 41개국 268개 도시에서 울려 퍼졌으며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매료됐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으로 꼽는 것도 바로 난타 첫 해외 공연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을 때다.

뮤지컬 ‘난타’의 아이디어는 송 대표의 머리에서 나왔다.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비언어극’이라는 아이디어로 연결됐고,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바람은 ‘사물놀이’의 신명나는 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그의 유별난 상상력과 아이디어는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창의적인 인재’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창의적인 사고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그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생각의 창고가 넉넉해야 합니다. 그냥 멍하니 있다고 해서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입니다. 책을 많이 보면 머릿속에 정보가 쌓이고, 그 정보들이 하나둘 융합되면서 비로소 하나의 아이디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 그의 방 책장에는 10권짜리 아동문학전집이 있었다. 10번 넘게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더니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책들은 ‘피노키오’ ‘오즈의 마법사’ ‘호두까기 인형’ 등 많은 어린이 뮤지컬을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경험을 많이 하는 것도 창의적인 사고를 기르는 데 좋은 방법입니다. 책을 읽는 것이 지식을 쌓는 것이라면 경험은 지혜를 얻는 과정이죠. 70~80년대 닫힌 사회 분위기 속에 있던 제가 뉴욕에서 3년 머무는 동안 느꼈던 문화적 충격은 그대로 제 사고의 원천이 됐습니다. 그때 봤던 공연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아직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열정을 키워라

그는 배우, 공연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인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이 그것을 대변한다.

“아티스트뿐 아니라 프로듀서 역할도 많이 중요해졌어요. 아티스트를 데리고 어떻게 문화를 만들고 비즈니스 모델을 꾸리는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이 분야에서 쌓은 경험을 후배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배우·공연 제작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교육자 역할은 ‘사명감’으로 하는 것이죠.”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많은 것을 느낄 터. 요즘 20대 젊은이들에 대해 물어봤다.

“훌륭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구김살을 찾아볼 수 없어요. 하지만 종종 끈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너무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 집요함, 열정도 조금 약한 듯합니다. 이 부분이 보완되면 좋을 것 같아요.”

또한 문화 향유 방법으로 TV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길 권했다.

“노상 자장면만 먹으면 자장면이 제일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국집에는 자장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많죠.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TV만 보는 것은 자장면만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다른 것도 많이 경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라이브 공연을 즐기다 보면 TV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극대치를 느낄 수 있어요. 무대 위 배우와의 교감을 통해 감동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공연’ ‘배우’ ‘무대’라는 단어를 말할 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말하니 “그 단어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중 ‘무대’는 그에게 어떤 공간인지 궁금했다.

“제가 카타르시스(쾌감)를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무당이 굿판을 열어야 하는 것처럼 배우는 무대에 서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대 위에 있어야 몸에 에너지가 돌고 힘이 솟거든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같다. “행복하십니까”라고 묻자 다른 인터뷰와는 달리 조금 긴 답변이 돌아왔다. 물론 밝게 웃으며.

“예, 행복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늘 있지만 기본적으로 행복해요. 월요일 아침 회사에 오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주말에 생각했던 일들을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하고 있다는 것,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현재 공연 중인 ‘송승환의 뮤지컬’

난타 NANTA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 초연 이후 14년간 공연하며 한국 대표 뮤지컬로 자리매김한 작품.
 
세 명의 요리사가 즐겁게 요리를 준비하는 사이, 깜짝 등장한 지배인이 예정에 없던 결혼식 파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 긴장감 넘치는 에피소드를 관객과의 호흡 속에서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2011 젊음의 행진

80~90년대 감성을 좋아하는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 만화 ‘영심이’를 기본으로 한 작품으로 서른을 넘은 영심이와 왕경태가 말만 들어도 미소 짓게 되는 과거의 추억을 쏟아놓는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등 그 시절 히트곡을 들을 수 있다.


뮤직 인 마이 하트

2005년 초연 당시 문화계 히트 상품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1000회 이상 공연하며 총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다녀갔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 하고 있지 않은 사람 모두 즐길 수 있는 ‘연애 실용 백서’ 뮤지컬. 올겨울 옆구리를 따스하게 하려면 미리 챙겨 보도록.


송승환 배우·공연 제작자/CEO·교수

1957년 서울 출생
1965년 KBS 아역배우 데뷔
1975년 휘문고 졸업
1976년 한국외대 아랍어과 중퇴(1996년 명예 졸업)
1976년 ‘76극단’ 창설
1983년 미국 유학
1989년 극단 ‘환 퍼포먼스’ 창설
1997년~현재 PMC 프로덕션 공동 대표이사
2010년~현재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수상
1968년 동아연극상 특별상(학마을 사람들)
1982년 백상연기대상 남자연기상(에쿠스)
1994년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영원한 제국)
1998년 동아연극상 작품상(남자충동)
1998년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한경마케팅대상 프론티어상(난타)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 프로듀서상
200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저서
세계를 난타한 남자 문화CEO 송승환(북키앙, 2003)


글 양충모 기자 gaddjun@hankyung.com·@herejun(Twitter)│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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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1-07-1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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