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980호 (2014년 09월 08일)

[오래된 가게의 비밀] 3대째 양복점 운영하는 종로양복점 이경주 대표

“100년 기업이 곧 최고의 브랜드죠”


종로양복점은 종로가 아닌 중구 저동의 한 빌딩 6층에 자리하고 있다. ‘신스(since) 1916’이라는 작은 간판을 따라 문을 여니 23㎡(7평) 남짓한 공간에 이경주(65) 대표가 다림질을 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양복쟁이’라며 겸손하게 인사했다.

“찾기 힘드셨죠. 아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오다 보니 변변한 간판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종로양복점은 1916년 이후 총 세 번의 자리 변화를 겪었다. 이 대표의 할아버지 이두용(1882~1942) 씨는 종로1가 보신각 옆자리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양복은 비싼 의복에 속해 입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학생복을 제작하며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옆집에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와 경쟁이 붙어 당시 조선인 학교 재학생들이 이 대표의 가게로 몰려들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나서 종로양복점을 홍보해 줬다. 애국심으로 양복점은 번성해 갔다. 공장 직원이 100명이 넘고 함흥과 개성에도 지점을 냈다.


한국인들의 애국심으로 사업 번창
2대 이해주(1916~1996) 씨는 창업주 이 씨의 넷째 아들이었다. 54년간 양복점을 운영하며 한국 양복의 역사와 함께했다. 노환으로 사망하기 한 달 전까지 가게를 지킬 정도로 양복 사랑이 대단했다. 1970~1980년대 초 양복 소비가 크게 늘면서 가게도 승승장구했다. 처음 자리에서 종로1가 2층짜리 건물로 옮겨 왔다.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았죠. 당시 종로양복점 하면 서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종로가 정치 1번지여서 이시영 전 부통령, 김두환 씨 등 정치인들도 많이 오고 그랬어요.”

3대째 가게를 이어받은 이 대표는 1968년부터 양복 재단을 배우기 시작했다. 건축학도였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20대 중반 양복의 길에 들어섰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로를 바꿨다.

“1980년부터 아버지에게 열쇠를 받아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을 배우면서 용돈을 받아 살다가 사장이 되니 좋았죠.”

처음 몇 년간 호황을 누렸다. 한 달에 30~40벌은 기본이었고, 특히 명절이 되면 일감을 쌓아 놓고 열흘씩 밤새워 일했다. 이 대표는 “일 좀 그만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던 기억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꿈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한때의 호시절을 누린 후 점차 양복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후반 기성복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양복점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수십 군데에 달했던 양복점은 하나 둘 사라지고 대로변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내 밑에서 일을 배우고 나간 사람이 가게 문을 닫는 걸 보면 그렇게 후회가 됐어요. 괜히 양복을 가르쳤다는 미안함이 있었죠.”

종로양복점은 광화문 신문로 대로변 2층으로 자리를 옮기긴 했지만 명맥을 이어 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아버지 때부터 찾아 온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발길을 해줬기 때문이다. 재단사를 해고하고 이 대표 스스로 경영자이면서 재단사로 손님을 맞았다. 치수 재기부터 패턴 뜨기, 옷감 자르기, 가봉에 이르기까지 이 대표홀로 양복을 지었다.


다시 태어나도 양복 지을 것
2010년 광화문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와야 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대로변을 떠나 빌딩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 대표는 “건물은 쇠락해도 가치는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수제 양복의 가치와 3대째 이어 오는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한 위치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전통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벌에 150만 원 정도 하는 옷을 비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3대 가게가 이런 구멍가게냐”고 속 긁는 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이 대표의 자부심에 흠집을 낼 수 없었다. 100년 가업의 위력은 위기 때 더욱 빛이 났다.

“내가 장사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면 몰라도 이건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근근이 임대료만 낼 때도 있었죠. 특히 지난해가 어려웠어요. 한 달에 한 벌 지을까 말까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돈 문제를 떠나 이건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막상 문 닫을 순간이 되니 소중함을 알겠더라고요.”



이 대표는 가게 한쪽에 걸려 있는 흑백사진을 가리켰다. 창업주 할아버지와 혹독하게 양복 기술을 가르쳐 준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나중에 뵙게 되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문 닫고 오면 ‘다시 열어라 이놈아’ 이런 얘기를 들을까봐 걱정이 됐어요. 지금도 가끔 사진을 보면서 독백을 해요. ‘세상이 이런 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다행히 해가 바뀌면서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이 대표는 전했다. “기술밖에 모르는 양복쟁이라 특별한 장사 수완은 없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아버지 때부터 이어 온 ‘정성무식(精誠無息:정성은 끝이 없다)’을 사람들이 알아봐 준거죠.”

100년 가업은 곧 브랜드가 돼 입소문을 타고 멀리서도 손님이 찾고 있다. 부산과 제주는 물론 바다 건너에서도 일감이 왔다. 이 대표는 양복 한 벌을 가져와 보여줬다. “일본에서 만든 양복인데, 이것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소포를 보내 왔어요.” 이 대표의 손 기술을 믿고 멀리서 보내 온 양복이었다.

일감이 적기 때문에 한 벌 한 벌 공이 더 들어간다. “기성복은 주인이 따로 없잖아요. 여러 사람이 주인이잖아요. 우리가 만드는 옷은 한 사람만이 주인이 돼요. 다른 사람한테 입히면 안 맞아요.”

종로양복점은 정통 스타일을 고집한다. 40, 50대가 주 고객이지만 20, 30대 젊은 단골손님도 적지 않다. “손님과 함께 옷감을 고르고 체형에 따라 색상을 추천해 주기도 하는데, 거의 저한테 다 맡기죠. 젊은이들도 대부분이 믿고 일임해요.

최근 남아 있는 양복점들이 저가 경쟁에 나서고 있지만 이 대표는 이에 대해선 단호한 입장이다. “그 사람들은 장사꾼이지 양복쟁이가 아니다”고 말한다.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가져다 파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 온 정통 스타일이 있잖아요. 물론 유행에 따라 스타일은 현대식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옷을 만드는 과정이나 정성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죠.”

이 대표에게는 두 자녀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양복을 계승한 자녀는 없는 상태다. 이 대표에게 향후 목표를 물어봤다.

“100년 200년 이어 갔으면 하는 것은 바람이고 목표는 제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끝까지 전통을 지켰다고 떳떳하게 얘기하며 선친을 뵙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도, 대를 이을 자녀도 없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전 이 기술을 배울 겁니다. 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이탈리아 수제 양복처럼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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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4-09-0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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