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76호 (2011년 09월)

[동양미학 산책] 표지뿐인 ‘이재첩’에서 찾은 한글 편지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재의 글은 없어지고 표지만 남은 <이재첩>. 그 안에 붙여진 한글 편지들과 송익로의 <당기> 등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조각으로 갈라져 남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길 정도다. 문화재는 우리의 관심이 집중될 때 보존되고 찾아질 수 있다.

긴 비도 그친 듯해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멀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45년 만에 귀향한 조선조 왕실의 의궤를 보기 위해서였다. 1866년 프랑스군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강화도를 점령하고,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 등 340여 권을 강탈한 후 관아와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수천 권의 책과 자료들을 재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배웠다. 이렇게 강제로 이 땅을 떠나게 됐던 의궤 등 297권의 책이 그나마 5년간 빌려오는 형식으로 귀향했다.

특별전시실은 어린 학생들로 가득했다. 어린 학생들이 의궤가 제자리를 잃고 떠나게 됐던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이해할까. 고종 3년 의궤 등이 강탈당했고, 이로부터 110년이 지난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프랑스 국립도서관 별관 창고에 방치돼 있음이 알려졌다.
 
이후 30여 년의 긴 협상을 거쳐 고향 방문의 형식으로 귀환케 된 것이다. 프랑스에 이어 일본이 가져간 의궤도 귀향이 거론되고 있는 등 해외로 흘러나간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강탈당한 문화재의 귀향도 이리 어려운데 하물며 우리 손으로 내어 준 수많은 문화재들을 되찾아 오기란 불가능하며, 상대방의 처분만 바라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우리 문화재 한 쪽이라도 챙기고 아끼는 정신을 어린 학생들에게 길러주어만 할 것이다. 문화재는 우리의 관심이 집중될 때 보존되고 찾아질 수 있으며, 한 곳에 모아두기보다 제자리를 찾아갈 때 비로소 그 가치도 빛날 것이다.

이재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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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이재첩>

1980년대 초 인사동을 지나다 한 고서점에서 <이재첩>(彛齋帖)이란 서첩이 있기에 들추어 보았더니 내용은 없고 달랑 겉장뿐이었다. 이재 권돈인(權敦仁·1783∼1859)은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 遷禮)를 주청하다 순흥으로 유배당했고, 1859년 유배지가 연산으로 옮겨진 뒤 76세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권돈인은 추사 김정희와 인연도 깊고, 우리 서화사에서 언제나 입에 오르는 인물이기에 서첩을 만지작거리다 기념으로 사 두었다.

아무것도 없는 겉표지만을 보다가 표지 안쪽의 덧붙인 종이에 글씨가 보여 이를 떼어내기 위해 물에 담갔더니 얇은 종이들이 하나하나 떨어지며 한글 편지 세 편과 송익로(宋益老)가 고종 15년(1878) 말에 쓴 <당기>(堂記) 등이 나왔다.

보물을 찾은 듯 들떠 밤을 새웠지만 더 떼어내다가는 종이가 해질 것 같아 멈추고 말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료 검색이 쉽지 않았던 때라 봉투 속에 그냥 넣어두었다.

송익로가 쓴 <당기>는 그의 아버지 금곡 송래희(宋來熙·1791∼1867)가 지은 <종용당중수기>(從容堂重修記)와 맥을 같이 하며, 아버지의 문인 박승문(朴勝文)의 이름도 보인다.

송래희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7세손이다. 20세에 중주 이직보(李直輔)를 뵈었고, 25세에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山林)’을 자처하며 서원을 중심으로 유학의 중흥에 힘썼다. 이 때문에 조정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조정은 ‘산림’들을 끌어안고자 높은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대원군이 집정한 고종 1년 1월 고종은 74세 된 송래희에게 의복과 음식을 내리고 지방관을 보내 문안케 한 뒤에, 공조판서에 임명했던 것도 조정의 속셈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송래희의 <금곡선생문집>(錦谷先生文集)에는 권돈인과 친교를 쌓거나 왕래한 자료가 없다. 그렇다고 송래희가 서화를 즐겼다는 자료도 없어 권돈인과 송래희의 관계를 밝히기는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다만 셋째 아들 약로의 장인 조병헌의 숙부 조인영(趙寅永)을 거쳐 왔을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한글 편지 1은 교동에 사는 큰어머니가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는 며느리에게 안부를 묻는 글이다. ‘아바님 겨 셔 너모 서로 시니 □늠 말 엇지 다 긔록 리 판셔 별탈 업스나’로 보아 큰집 형제들 가운데 판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글 편지 2는 신미년 8월 24일 사촌이 안부를 묻는 편지다. 교동 문안은 하는지 묻고, 어머님 평안하시길 바란다는 것으로 보아 받는 이가 작은집의 딸임을 짐작케 한다. 신미년은 순조 11년(1811) 또는 고종 8년 가운데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한글 편지 3은 오랜만에 편지를 받고 반갑다는 답장이다. 답장을 보낸 사람은 평생 병을 달고 산다는 내용으로 나이가 많음을 짐작케 하지만 앞의 편지들과의 관련성은 찾아지지 않는다. 글씨는 오래된 붓의 투박한 맛이 돋보이는 가운데서도 한글의 구조적 흐름을 잃지 않았다.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글 편지 1·2·3


<이재첩>에서 찾은 한글 편지와 송익로의 <당기>

<당기>는 한글 편지 세 편과 함께 나왔고, 회자되는 인물들은 송래희의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일 것이다. 송래희는 슬하에 각로(恪老), 익로(益老), 약로(約老) 등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각로는 종만(鍾萬), 종응(鍾應), 종규(鍾奎)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고, 아버지보다 8개월 앞서 54세에 죽었다. 약로는 당시의 권력자 조만영(趙萬永)의 아들 조병헌(趙秉憲)의 사위로 딸 하나를 두고 철종 4년(1853) 2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 형의 아들 종규를 후사로 입양했다. 익로는 당시의 권력자인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사위로 아이가 없어 형의 아들 종응을 후사로 입양했다.

두 아들을 앞세운 송래희가 임종한 지 9년 되던 고종 13년 둘째 아들 송익로가 아버지의 문인들과 유고를 정리해 초록으로 만들어 상자에 넣어 두었고,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송종규가 1907년 <금곡선생문집>으로 간행했다.

송종규는 고종 25년에 진사, 고종 29년에 문과에 급제해 우부승지까지 올랐으나 고종 32년 을미사변 때 관직을 버리고 대구로 돌아왔다. 고종 42년 을사늑약이 있은 뒤 술로 날을 보내다 순종 4년(1910) 8월 29일 한일병합으로 조선총독부의 설치를 앞둔 7월에 죽어 순국의사 29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이재의 글은 없어지고 표지만 남은 <이재첩>, 그 안에 붙여진 한글 편지들과 송익로의 <당기> 등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조각으로 갈라졌기에 받은 사람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남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길 정도다. 송래희가 보낸 편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사돈인 김홍근 형제들이고, 또 문집의 편찬에 직접 관여하고 간행한 송종규의 외조부 조병헌의 가족들이라는 점만 확인될 뿐이다.

한글 글씨는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수됐는지 사승(師承)관계를 밝힌 자료가 아직 없다. 더 많은 자료들을 찾고 분석하는 어렵고 긴 과정에서 밝혀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문득 이호우의 시조 ‘바람 벌’이 머릿속에 되뇌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어 여기에 남긴다.

욕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로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김세호
_ 김세호 선생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국립타이완대에서 예술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일본 교토대 동양사연구실에서 연수했다. 귀국 후 예술의전당과 원광대 등의 강단에 섰다. 10여 년 전부터 한글의 변천사와 서예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글 해정 김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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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1-09-1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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