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446호 (2004년 06월 21일)

고성장 시대가 낳은 ‘원죄의 씨앗’

국민연금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국민연금의 불합리성을 비판한 글을 올리면서 촉발된 ‘반(反)국민연금운동’은 국민연금 폐지론으로까지 번진 상태다.

이른바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이번 국민연금 파문은 5년 전 연금대란 이후 연금 사상 최대의 시험대로 여겨지고 있다. 2004년 4월 말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는 약 120만명. 2008년께는 그 수가 300만명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연금 관계자들은 향후 2~3년이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한 사회안전망으로 안정, 정착할 수 있을지를 가름하는 중대 기로로 보고 있다.

“현재 보험료를 내는데 연금을 받는 사람이 적어 국민연금의 ‘존재’를 체감하기 어렵다. 이러다 보니 가입자들은 낸 돈을 과연 돌려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다. 연금 수급자가 많아져 주변에서 그 혜택을 확인하게 되면 제도에 대한 불신이나 저항감이 상당부분 해소돼 연금이 안정궤도에 오를 것으로 본다. 그때까지가 고비다.” (이상용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심의관)

원죄의 씨앗ㆍ예고된 기형아

오늘날 국민연금 파문의 뿌리에는 태생적 기형성이 버티고 있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던 고성장 시대가 낳은 산물이다. ‘저유가ㆍ저금리ㆍ저원화 가치’라는 전례 없는 호조건 속에 정부는 각종 선심성 정책을 쏟아냈다. 국민연금도 업적에 치중한 정치권에 의해 충분한 준비 없이 무리하게 도입됐다. ‘강제저축’을 손쉽게 ‘강제’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적게 낸 후 많이 돌려받는 ‘저부담ㆍ고급여’ 구조였다.

당시 책정된 소득대체율(소득 대비 연금액ㆍ40년간 가입한 평균소득자 기준)은 생애 평균소득의 70%. 이를 맞추려면 보험료율이 소득의 22%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게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안종범 교수의 지적이다. 하지만 당시 보험료율은 3%에 불과했다. 낸 돈보다 많게는 10배 이상을 받게 되는 ‘파격상품’이었다. 정부가 보증하고 노후가 확실히 보장된다는 장밋빛 홍보에 국민들은 기꺼이 가입에 동의했다.

‘제도 순응과 국민연금제도의 조기 정착을 위해’라는 이유였지만 이는 당장의 수월함을 위해 후대에게 막대한 짐을 지우는 형국이었다. 조금 거둬서 몇 배를 되돌려주려면 재정이 거덜날 것이 뻔한데도 아무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후 상황은 달라졌다. 차기 정부가 들어서자 ‘재정 고갈’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제도 도입 초기에 제시된 ‘장밋빛 환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식보다 국민연금을 믿으라더니 낸 돈을 떼이는 것은 아니냐”는 원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직장가입자는 봉인가

99년 4월 도시지역으로 연금을 확대하며 재정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재정을 통합하면서 ‘재정건전화’가 발등의 불로 대두됐다.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이 턱없이 낮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연금제도를 확대 적용한 탓이다. ‘전국민 국민연금시대’라는 미명이었다.

자영업자들은 국민연금을 ‘세금’으로 여기면서 소득을 낮춰 신고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역가입자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었다. 지난 3월 말 현재 지역가입자 중 보험료를 내야 하는 사람은 549만명선. 이중 국세청에 과세자료가 잡히는 사람은 28.6%인 157만명선이다. 이 가운데 과세소득이 연금공단에 본인이 신고한 소득보다 높아 자료로 활용되는 경우는 35만명 안팎에 불과하다.

과세소득이 있는 경우도 2년 전 자료를 근거로 보험료를 매긴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2003년을 기준으로 할 때 자영업자는 2003년의 소득활동 중 연간 두 차례 부가가치세를 납부하고 2004년 5월에 국세청에 종합소득세를 신고, 소득이 확정된다. 이 자료는 2004년 10월 공단으로 넘어가고 공단은 두 달간의 소득조정을 거쳐 2005년 3월께 보험료 부과자료로 사용한다.

“소득 발생시점부터 보험료 부과시점까지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의 시차가 생기고 이러다 보니 최근의 영업상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불만을 살 수밖에 없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반면 소득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직장인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연금에 대한 불신은 더 커졌다.

“연금은 소득재분배 차원에서 보험

료를 적게 낸 사람이 수익 면에서 이익을 얻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 이에 따라 직장인들이 소득이 있으면서도 연금을 적게 낸 자영업자의 몫을 떠안게 되며, 향후 연금 수령액도 줄어드는 불이익을 안게 된다.” (김정태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

걷는 것은 압박하면서 될 수 있으면 적게 준다?

국민연금이 최근 인터넷상에서 집중 포화를 맞은 또 다른 이유는 까다로운 수급권 때문이다. 유족연금과 노령연금은 두 가지 연금을 동시에 받지 못하게 한 ‘병급조정’에 대해 가입자들은 “꼬박꼬박 걷어갈 때는 언제고 낸 돈을 돌려주지 않느냐”고 반발한다.

이에 대해 복지부측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기본 혜택을 주는 공적 연금의 특성상 한 사람에게 중복 지급되는 것은 사회보험의 원칙에서 어긋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은 유족연금 일부를 보전해 준다는 점에서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고 정서적으로도 상당한 반감을 사고 있다. 이를 의식해 복지부측은 “유족연금 보전 등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모아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 보험료 추가 인상을 요하는 문제인 만큼 또 다른 불씨를 안고 있는 셈이다.

강제징수 또한 뜨거운 쟁점이다. 가입자들은 ‘60세 이후 복지’를 위해 ‘당장의 복지’를 차압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린다. 당장 먹고살기가 어려운 형편에 세금도 아닌 국민연금이 재산까지 압류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측은 “당장 일시금을 돌려준다고 해서 신용불량 상태가 해소되겠느냐”고 반문한다. “‘군입대와 같은 의무’인 국민연금이 강제저축이라는 본령에서 물러선다면 향후 국민연금이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점점 넓어지고 이는 국가경제를 위협할 중대 문제가 될 것”(복지부 연금재정과 배 병준 과장)이라는 논지다.

사실 IMF 경제위기 당시 시행했던 반환일시금제도로 연금 대열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구명’을 요청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시급한 사람들에게 ‘장래의 불행’은 차라리 사치로 여겨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국민연금은 필요하다

선대 정부의 ‘선심’은 후대의 어깨를 벌써부터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고통스럽더라도 연금개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게 대다수 사회복지전문가들의 견해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우리나라 실정에서 국민연금은 가장 기초적인 사회안전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사보험보다 우수한 노후보장책이다. 따라서 개선할 점은 개선하되 국민연금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속한 노령화가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해 빈민사회연대 오근호 정책팀장은 “국민연금은 저소득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보장제도이며 국민연금이 흔들릴 경우 연금 탈락자들이 노년에 대거 극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미비점은 개선하되 그 근간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참에 국민연금 외에 다양한 노후보장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연명 교수는 “국민연금, 기초생활보장제도, 경로연금 등을 총망라한 다층적 노후보장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만으로 노후를 보장하겠다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연금의 본령은 노후보장이 아닌 노후에 최저 생활을 받쳐주는 지지대다. “국민연금으로는 쌀을 사고, 개인보험으로 반찬을 사며, 개인저축으로 놀러다닌다”는 한 보험전문가의 설명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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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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