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스마트 콘트랙트와 블록체인의 만남, ‘물류’를 ‘금융 플랫폼’으로 바꿀 것
알 수 없는 와인 이력, 블록체인이 찾는다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와인은 온도에 민감하다. 애호가들에 따르면 그래서 좋은 와인은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급 와인을 즐기려면 비싼 물류비를 지불하고 보관에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소비되는 수입 와인들의 대부분이 적도를 지나온다. 산지에서는 맛있는 고급 와인이었다고 하더라고 보름에서 두 달 동안 적도를 통과하다 보면 맛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 냉장보관이 가능한 컨테이너를 이용하거나 하절기를 피해 선박 하단에 적재하는 등의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유통업자가 유통에 신경 써도 소비자가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애호가들은 싼 와인을 찾는 소비자들 때문에 물류에서 편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를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냉장 컨테이너를 이용해 수입했다’고 라벨에 써 있지만 유통 중 냉장 컨테이너를 지속적으로 가동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스마트 콘트랙트

결국 수입 와인의 맛과 가격에도 신뢰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소비자가 라벨의 QR코드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운반 중 컨테이너 내부의 온도와 관련된 특별한 사건들을 알 수 있다. 블록체인은 화물주나 해운 회사, 생산자 중 누구도 독단적으로 데이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소비자는 와인이 적도를 지나면서 끓어오르지 않았다는 기록을 믿을 수 있다.

더구나 블록체인에서 스마트 콘트랙트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와인이 다른 가격에 거래될 수 있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네트워크상에서 거래 당사자들의 장부 상태를 자동으로 전환해 준다. 만약 운송 중 컨테이너 내부의 온도가 일정 수치를 넘어선다면 수출업자의 장부에서 수입업자의 장부로 돈이 이전되는 식이다. 스마트 콘트랙트 때문에 물류와 블록체인의 만남은 라벨에 대한 신뢰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류 자체를 거대한 금융 플랫폼으로 바꿀 것이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연속적인 과정을 상태와 사건으로 분해하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정지 사진들을 모아 동적인 장면을 표현하는 영화 필름과 유사하다. 먼저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는 과정을 몇 개의 정지 화면으로 나눌 수 있다. 밭에서 익어가는 포도, 딴 포도, 으깬 포도, 발효 포도, 거름 와인, 오크통 와인, 병입 와인으로 상태를 나눈다. 상태를 가르는 기준을 이벤트라고 하는데 각각 심기·따기·으깨기·발효·거르기·2차발효·병입이다. 이벤트의 성공 유무나 수준에 따라 거래 당사자들의 장부를 자동으로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계약하는 것이 스마트 콘트랙트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병입된 와인의 개수가 일정량이 넘을 때 대금의 일부가 수출업자의 계좌로 이전된다고 계약한다. 이 계약에서 중요한 사건은 병입이다. 따라서 상태는 병입 전의 와인과 병입 와인 둘로 충분하다. 계약에 따라 상태들을 더 세분화할 수 있고 통합할 수도 있다. 만약 와인의 평가 등급이 스마트 콘트랙트가 문제 삼는 계약의 조건이라면 와인 평가라는 이벤트를 만들어 오크통 와인 상태를 둘로 나누면 된다.



◆원자성을 가져야 하는 스마트 콘트랙트

밭에서 익어가는 포도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그 안에서도 포도는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발효 중인 포도를 하나의 상태로 고정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에서 규정한 상태란 자연 상태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계약 당사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맥락과 일치하면 그만이다. 다만 상태를 나누는 사건은 반드시 원자성(atomicity)을 가져야 한다. 으깨는 중이거나 병입 중인 사건은 없어야 한다. 상태를 나누는 사건은 사건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여야 네트워크가 자동으로 계약을 이행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고 스마트 콘트랙트가 금융과 만나면 생산과 유통과정을 소비자들이 주도할 수 있게 된다. 특정한 생산자로부터 와인을 수입하는 프로젝트를 전문 지식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소비자들이 모여 추진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합리적인 소비와 합리적인 투자의 경계가 없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공급 사슬망을 따라 가다 보면 제품의 부가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가치사슬이라고도 하는데 일련의 과정을 통과할 때마다 불확실성에 따른 위험이 낮아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이벤트들을 센서가 자동으로 입력할 수 있다. 사전에 합의한 스마트 콘트랙트에 의해 제품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곧바로 제품의 가격이나 금융비용에 반영될 것이다. 와인 운반 중 발생하는 사건, 특히 컨테이너 내부의 온도가 어떤 기준을 넘어설 때마다 입력된다면 블록체인의 투명성 때문에 시장 참여자들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므로 와인 프로젝트에 투자해 얻은 선불 토큰의 가격이 합리적으로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록체인과 스마트 콘트랙트는 불합리한 손실이나 의외의 횡재를 줄이는 대신 애호가들이 와인의 맛에만 집중하게 도와주는 솔루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돋보기] ‘토큰’은 공급 사슬망 금융의 꽃

‘블록체인은 혁신 기술이지만 암호화폐는 일시적인 거품’이라는 정부의 희망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스마트 콘트랙트가 금융시장과 융합되기 위해서는 암호화폐가 필요하다. 물론 금융이 발달한 선진국 시민들만 스마트 콘트랙트에 참여한다면 암호화폐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법과 금융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가 더 많다. 그런 사회의 시민들도 생산과 소비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이들과의 거래에서 블록체인과 스마트 콘트랙트를 적용한다고 해도 결제 단계에서는 기존의 금융망에 의존한다면 결과적으로 신뢰는 제한된다.

내전 중인 국가의 생산자도 자신이 만든 제품을 선적하는 순간 센서가 감지해 수출 대금의 잔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스마트 콘트랙트다. 은행을 통하지 않고 블록체인에서 가치를 이전하는 수단이 필요한 이유는 권력을 잡은 집단이 은행의 지불을 금지하면 생산자는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급 사슬망 금융의 꽃은 선불 토큰이다. 와인이나 소의 소유권, 즉 등기 정보가 블록체인에 올라와 토큰이 돼 와인의 공정 과정을 따라 이동한다.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사건들이 토큰에 기록되는데 이 토큰을 미리 구입하거나 거래할 수 있다. 블록체인상에서 제품의 현 위치가 파악되기 때문에 블록체인에서 토큰은 실제 와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이 토큰은 언제나 유동화할 수 있는 시장에서 교환되며 때로는 다른 상품의 토큰과 맞교환된다. 이때 사용되는 토큰은 제품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이다. 이런 개별성을 기존 화폐로는 구현할 수 없다.

만원짜리는 구겨지건 새것이건 모두 만원이다. 특정한 제품의 정보를 담고 있는 권리물이 화폐처럼 유통되지만 화폐와 달리 가격이 개별적이다. 암호화폐, 아니 화폐에 대한 상식에서 벗어나야만 블록체인이 불러올 금융과 물류의 융합을 준비할 수 있는 이유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7호(2018.11.05 ~ 2018.11.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