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보험사·정부 개입 없애…‘떼일 염려 없는 계’와 닮은꼴
보험 상품의 뿌리부터 확 바꿀 스마트 콘트랙트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사실상 완료되자 ‘유전자 차별’이라는 공포가 확산됐다. 유전자 때문에 취업이나 보험 가입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미국을 시작해 각국 정부들은 유전자 정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속속 제정했다.

그런데 차별은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점수에 따라 합격이 좌우되는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별이나 종교에 따라 군복무가 달라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끝없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력에 따른 차이는 차별이 아니지만 타고난 속성이나 환경에 의한 차이는 차별로 간주한다.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거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전자 결정론자들은 노력마저도 타고난 품성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ADHD)를 가진 학생들을 수능 점수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노력과 천성을 구별해 차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시도는 지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김연아 선수를 평가할 때 외모나 환경 요인을 제외하고 ‘노력’이라는 단 하나만의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공허할 뿐이다.

유전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면 신분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보험회사로 하여금 유전자에 따라 보험료를 다르게 산정하는 것을 막는 규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하게 동의하는 이유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 법안이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법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유전자 코드를 읽어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논쟁이 본격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레몬 시장은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야 없어져

보험은 기본적으로 레몬 시장(중고 자동차 시장에 비유해 시고 맛없는 레몬처럼 질 낮은 저급품이 주로 유통되는 시장)이다. 정보 비대칭 때문에 좋은 상품은 사라지고 좋지 않은 상품만 시장에 남아 궁극적으로 시장 자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유방암 원인 유전자인 브라카(BRCA) 1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여성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0%가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이를 확인하고 유방을 절제했다. 자신이 남보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아는 여성들은 유방암에 대비해 특정한 보험에 가입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가입자들이 많은 보험일수록 돌연변이가 없는 것을 아는 여성들은 가입을 회피할 것이다. 보험회사는 인구통계보다 가입자들의 발병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보험료를 높이고 보험금을 낮추려고 한다. 이는 그나마 있던 발병 확률이 낮은 가입자들의 해약을 자극한다. 끝까지 남은 이들 사이에서의 발병률은 극단적으로 높기 때문에 보험회사는 보험금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게 된다.

경제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질병보험으로 통합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을 통합할수록 레몬 시장의 위험은 커진다. 보험회사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가입자들 간의 게임이라는 게 보험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활용해 남보다 우월한 지위에 서고자 하고 그 결과 우연적인 횡재나 손실이 없어지는 것이 시장의 원리다. 칸막이는 이 기능이 작동하는 것을 막아 오히려 시장을 왜곡한다.

지식의 발전을 거꾸로 돌려 무지의 평등을 만들지 않는 한 가입자들이 자신의 정보를 스스로 오픈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도록 하는 것이 레몬 시장을 막는 방법이다. 시대적 지식의 범위 안에서 발병 확률이 비슷한 사람들 간의 보험만이 본래의 기능을 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물론 정부는 대중의 비난 때문에 이런 규제를 지속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는 정부가 규제하는 보험회사를 패싱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의 활용을 막는 규제의 시효가 그리 오래 남지 않아 보인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특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없는 이들만으로 이뤄진 스마트 콘트랙트 보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스마트 콘트랙트 제안자가 디자인한 보험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띄운다. 가입할 수 있는 특정한 조건을 갖춘 이들이 정해진 액수를 송금하면 바로 가입 신청이 된다. 일정한 기금이 정해진 시간 안에 모이면 스마트 콘트랙트 보험이 론칭된다. 만약 기금의 부족으로 개시되지 못하면 자동으로 환불되므로 송금한 돈을 날릴 위험은 없다. 개인 정보가 네트워크에 올라 있으므로 보험 가입 자격을 갖췄는지를 네트워크상에서 자동으로 판별할 수 있다.
계약이 론칭되면 보험 충당금은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게 시스템상에 묶인다. 다중키 주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기금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지 않는다.

보험회사가 망할 위험이 없어 기금이 연기처럼 사라질 걱정이 없다. 가입자가 의료기관에서 암 진단을 받으면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 충당금이 모여 있는 공동 계좌에서 수령자의 계좌로 약정된 금액이 인출된다. 이 보험 계약이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작동하는 한 설계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어떤 정부가 이 보험이 허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지시키기 위해 디자이너를 감옥에 가둔다고 해도 계약은 지속된다.

금융회사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마트 콘트랙트는 계와 닮았다. 하지만 떼일 염려가 없다는 점이 계와 다르다. 국경을 초월하는 블록체인의 속성 때문에 글로벌 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부들의 상상력이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돋보기] 이미 시장에 나와 버린 ‘요인 암살 파생상품’

스마트 콘트랙트의 기본형은 바이너리 옵션이다. 어떤 사건의 발생 유무에 따라 돈을 얻거나 잃는 금융 계약이다. 쉽게 말해 ‘홀짝’과 같은 내기 도박이지만 태풍의 발생이나 발전소 사고에 의해 생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이들에게는 위험을 분산하는 좋은 파생상품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쿠데타의 발생, 요인의 암살을 놓고 바이너리 옵션을 출시하는 행위는 윤리적 비난에 직면한다. 파생 금융상품에 관대하다고 알려진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도 이런 내기 상품은 막고 있다.

하지만 블록체인 예측 시장 플랫폼 어거(Augur)에는 올해 7월 요인 암살을 이벤트로 바이너리 옵션 상품이 디자인돼 올라왔다.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상품의 디자이너가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댓글도 있었다. 실제로 지난 11월 CFTC의 집행위원인 브라이언 킨텐즈는 개인 의견이라고 전제하며 CFTC는 비도덕적인 파생상품을 디자인하는 코더(coder)를 기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인 암살을 파생상품으로 설계하면 이 상품에 단 한 명의 미국인이 가입해도 CFTC의 관할에 해당하므로 개발자를 미국 법원에 기소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했다.

요인 암살 파생상품은 누가 봐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윤리적 판단이 모호한 상품들을 디자인한 사람들을 일일이 기소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알려진 템플릿을 활용해 스마트 콘트랙트를 맺는 방식처럼 설계자가 없는 내기 계약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애초에 규제를 따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블록체인과 관련한 쟁점에서 정부는 막을 수 있는 것과 막아야 하는 것의 차이를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고민이 선행되지 않는 한 그들의 엄포와 법안은 한시적으로 대중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극 대사에 불과하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9호(2018.11.19 ~ 2018.11.2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