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지배구조 개선 내걸고 단숨에 한진칼 2대주주로…토종 행동주의 펀드 시대 열리나
‘위협’ 대신 ‘감시와 견제’? 자산 30조 한진그룹 겨눈 ‘강성부 펀드’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내걸고 대기업을 정조준했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 강성부 대표가 이끄는 신생 사모펀드(PEF) KCGI(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가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지분 9%를 전격 매입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선 것이다.

외국계 자본이 아닌 국내 행동주의 펀드가 대기업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 투자업계에서는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성부 펀드 “감시와 견제 역할 할 것”

지난 11월 15일 국내 자본시장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행동주의 펀드가 자사 규모 30조원이 넘는 한진그룹의 지주사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그간 ‘엘리엇’을 비롯한 해외 사모펀드들이 국내 대기업을 겨냥해 지배구조 개선, 배당 확대 등을 압박한 사례는 많았지만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를 내건 토종 펀드가 대기업 지분을 대거 확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진그룹에 도전장을 내민 곳은 증권사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출신인 강성부 대표가 지난 7월 설립한 사모펀드 운용사 KCGI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로 알려진 강 대표는 1개월여 만에 ‘블라인드 펀드(투자처를 사전에 정하지 않은 펀드)’로 1400억원이 넘는 출자금을 그러모으며 첫 투자처로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한진칼을 선택했다.

강 대표는 ‘KCGI 1호 사모펀드(이하 강성부 펀드)’가 100% 지분을 보유한 투자목적회사 그레이스홀딩스를 통해 한진칼의 지분 9%(532만2666주)를 장내 매수로 취득했다. 주당 매입가는 2만4557원, 총매입가는 1307억원이다.
‘위협’ 대신 ‘감시와 견제’? 자산 30조 한진그룹 겨눈 ‘강성부 펀드’
‘강성부 펀드’는 이 투자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28.95%)에 이어 한진칼의 2대 주주로 단숨에 올라섰다. 그레이스홀딩스의 법률 대리인인 법무법인 한누리의 구현주 변호사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저평가된 한진칼의 기업 가치 제고가 투자 목적”이라고 말했다.

한진칼은 그룹 대표 계열사인 대한항공과 한진·칼호텔네트워크·진에어 등 주요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한 한진그룹의 지주회사다. 즉 ‘조양호 회장 일가→한진칼→대한항공 등 계열사’로 이어지는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내건 행동주의 펀드가 한진그룹의 핵심부를 겨냥하자 주가는 즉각 반응했다. 지분 취득 사실을 공시한 다음 날인 11월 16일 한진칼의 주가는 3650원(14.75%) 오른 2만8440원에 마감됐다. 이후 오름세를 유지해 11월 22일 3만2100원까지 오르며 52주 신고가를 경신했다. 주요 계열사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11월 22일을 기준으로 한진 또한 52주 신고가를 다시 썼고 대한항공 우선주는 상한가를 기록했다. 이후 주요 주주인 크레디트스위스가 지난 23일 65만주를 팔아 차익을 실현하며, 주가는 소폭 하락했다. 이 회사의 한진칼 지분은 5.03%에서 3.92%로 낮아졌다.

금융 투자업계에서는 KCGI의 이번 투자가 일단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성부 펀드가 소위 ‘오너 갑질’로 조성된 한진그룹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지주사 체제의 빈틈을 절묘하게 파고들면서 자산 30조원의 대그룹을 흔들고 주가를 급등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분석이었다.

윤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진칼은 최대 주주 지분율이 30% 미만에 불과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가능성이 존재했던 기업”이라며 “특히 그간 오너 일가 이슈 등의 여파로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등 그룹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강성부 펀드는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기업 가치 제고를 표방한다. 구 변호사는 “국내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할인받는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배당성향과 일감 몰아주기, 부실 계열사 지원, 대주주의 사익 추구 행위로 일컬어지는 후진적인 지배구조 때문”이라며 “KCGI는 경영 효율성과 투명성 개선, 장기 성장을 위한 투자, 주주 중시 경영이 병행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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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0’ 토종 행동주의 펀드史

주주행동주의는 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 위해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의 지분을 확보한 뒤 기업의 지배구조(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투자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린다.

따라서 행동주의 펀드는 일정 지분(의결권)을 확보한 후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 인수·합병(M&A)이나 재무구조 개선, 지배구조 개편 등 주주 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때로는 회사 경영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기업을 상장폐지시키고 구조조정을 통해 차익을 얻는 수단으로 M&A를 활용하기도 해 ‘기업 사냥꾼’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03년 SK를 상대로 7559억원의 차익을 챙긴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과 2006년 KT&G의 경영권을 위협하며 1500억원의 차익을 실현한 미국계 칼 아이칸 펀드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 행동주의 펀드는 외국과 달리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뒷받침할 사회·제도적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치호 애널리스트는 “한국에서 행동주의는 매우 ‘낯선’ 전략”이라며 “행동주의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일감 몰아주기와 승계 논란 등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들이 존재하는 반면 선제적이고 의미 있는 토종 행동주의 투자 사례가 미미했다”고 지적했다.

2006년 11월 들어서야 의미 있는 토종 행동주의 투자 사례가 나왔다. 일명 ‘장하성 펀드’다. 당시 소액주주 운동에 앞장섰던 장하성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미국계 헤지펀드인 라자드에셋매니지먼트가 운용하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의 투자고문을 맡아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거나 돈을 많이 쌓아두고도 배당에 인색한 기업에 투자했다.

태광산업 계열사인 대한화섬과 크라운제과·화성산업·동원개발 등이 투자 대상에 올랐고 장하성 펀드가 지분 공시를 할 때마다 주가가 크게 뛰었다. 대한화섬은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엿새 만에 주가가 75%, 태광산업도 65%가 오를 만큼 자본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흥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출시 후 2년 만인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목표를 두다 보니 단기 수익을 중시하는 소액주주들의 동의를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장하성 펀드는 출시 후 6년 만인 2012년 청산됐다.

이후 2016년 라임자산운용이 행동주의를 주요 전략으로 내세운 국내 첫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라임-서스틴데모크라시펀드’를 내놓았지만 자금 규모가 크지 않아 파급력이 미미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강성부 펀드의 한진칼 지분 매입을 계기로 다시금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회·제도적 분위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국민연금은 지난 7월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고 지난 9월 금융위원회가 국내 경영 참여형 PEF의 경우 의결권 있는 주식을 10% 이상 취득해야 하는 규제를 풀기로 했다.

이때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차 지분 1.4%를 보유한 채 자사주 소각 등을 요구한 것처럼 국내 행동주의 펀드도 소규모 투자로 기업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정용현 KB자산운용 밸류운용본부 매니저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소액주주권 강화 등으로 기업 지배구조 개편과 주주 환원 정책 확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관심을 반영하듯 올 들어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도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국내 헤지펀드로는 처음으로 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이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맥쿼리인프라)의 운용사 교체를 요구했다. 운용사 변경 제안은 임시 주총에서 부결됐지만 운용 보수 인하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보다 앞선 올해 3월에는 KB자산운용이 행동주의 공모펀드인 ‘KB주주가치포커스펀드’를 출시했다. 이 펀드는 향후 배당성향 증가 가능성이 있는 기업과 사업구조 개선을 통해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주요 투자 대상으로 삼는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배당뿐만 아니라 자회사 경영, 자산 유동화 등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가치 제고 방안이 다양해질 것”이라며 “이제 시장의 관심은 배당정책에서 경영권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 투자업계는 올해를 기점으로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투자가 봇물을 이룰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동양 애널리스트는 “경영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저평가 자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라며 “보통의 지주사처럼 오너의 지배 지분이 50% 내외로 높거나 자사주가 많고 시가총액이 많지 않다면 행동주의 펀드와의 경영권 분쟁은 언제든지 부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권 방어 vs 코리아 디스카운트

수세에 몰린 기업들은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에 더해 토종 펀드의 ‘공습’을 방패 없이 막아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며 경영권 방어 제도 확충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존 주주들에게 싼값에 주식을 발행해 우호 지분을 늘릴 수 있도록 하는 ‘포이즌 필’이나 특정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의 도입이다.

정구용 한국상장사협의회 회장은 “국내 상장사는 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경영권 방어자에게 매우 불리하고 불공정한 M&A 관련 법제로 인해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 간섭과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며 “세계 주요국에서 이미 보편화된 경영권 방어 수단을 우리 기업들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시급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 투자업계는 행동주의 펀드의 규모가 커지고 기업과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커지면서 행동주의 펀드의 ‘질’도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대주주의 독단적이고 방만한 경영과 전문 경영인의 보신주의 경영을 견제하고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며 구조조정과 주주 이익 환원 정책을 통해 기업 가치 회복을 통한 주가 상승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감시’와 ‘균형’의 역할을 통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소다.

강성부 펀드 역시 “경영권에 대한 위협보다 감시와 견제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경영권 장악’ 의혹에 선을 긋고 있다.

이들은 특히 “엘리엇·라자드·칼 아이칸 등 해외 행동주의 펀드들은 국내시장에 형성된 ‘먹튀’, ‘투기자본’ 등 부정적 여론을 무시해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며 “해외 펀드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적 제도와 정서를 고려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단기 이익 실현을 지양하고 장기적인 회사 발전을 제고하겠다는 의미다.

이제 시장은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변곡점이 될 강성부 펀드의 성공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송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그동안 의결권 대결까지 갈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대형 펀드가 없어 투자가 활발해질 수 없었다”며 “강성부 펀드의 한진칼 지분 9% 매입은 한국형 주주행동주의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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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0호(2018.11.26 ~ 2018.12.0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