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금융의 본질은 규칙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정한 충성…비트코인의 뿌리와 맞닿아
‘규칙에 의한 지배’로 탄생한 하왈라 네트워크
(사진) 영화 '프리미엄 러쉬'의 한 장면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송금과 택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택배는 물건을 이동시켜야 하지만 송금은 돈을 이동시키지 않는다. 택배 회사가 의뢰받은 물건 대신 비슷한 물건을 보내면 계약 위반이다. 하지만 송금은 장부만 변경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의 추상 능력을 활용한 고도의 허구적 조작이다. 오늘날 금융 전산망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송금이 물건을 보낼 때처럼 실제로 그 돈을 전송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동 지역에서 발달한 하왈라(hawala)다.

하왈라는 중동에서처럼 종교적·사회적 이유로 은행업이 도입되지 못하거나 자리 잡지 못한 지역에 뿌리내린 사금융 송금망이다. 인도 대륙의 훈디, 중국 화교 네트워크에서 이뤄지는 치트(chit)·촙숍(chop shop)을 통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조직적이고 방대하며 역사도 깊고 나름대로 문화적 토대도 갖추고 있지만 기본 원리는 환치기와 같다.

한국에 있는 철수가 미국에 있는 갑수에게 돈을 보내려고 한다. 철수가 A에게 돈을 주고 갑수는 B에게서 돈을 받는다. A는 B에게 돈을 전달하지 않는데도 철수가 A에게 맡긴 돈을 갑수가 B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하왈라라고 할 수 있다. B가 A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역방향의 송금 의뢰도 있기 때문에 A와 B는 주기적으로 정산하거나 아니면 아예 공동의 계좌를 사용하는 한 가족이거나 동일한 조직이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B에게 갑수임을 증명해야 한다. 철수의 돈을 받고 A가 철수에게 준 전표를 갑수가 B에게 제시하면 된다.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풀기 어려운 난제다. 보통은 철수가 갑수에게 물리적인 증표를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왈라를 이용한다. 이때 암호가 필요하다. 철수와 갑수만 아는 암호를 A에게 알려주고 갑수가 B에게 암호를 대고 돈을 받는다면 철수가 멀리 있는 갑수에게 전표를 전달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

하왈라가 암흑가의 비즈니스를 넘어 소수집단의 문화적 특성을 구성하기도 하는 이유는 이 조직들이 명예를 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명예는 고객에 대한 책임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돈을 주지 않고 파산하거나 도망가도 B는 갑수에게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또 B가 갑수에게 돈을 주지 못하게 되면 A는 철수에게 환불한다.

물론 하왈라 네트워크 내부에서 신의를 저버린 업자를 가차 없이 응징한다. 그래서 사고는 많지 않다. 환치기가 조직폭력배들의 비즈니스인 이유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응징으로 신뢰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돈’이 아닌 ‘신뢰망’이다

하왈라의 명예는 규칙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정한 충성이다. 영화 ‘프리미엄 러쉬’는 미국에 뿌리내린 화교 금융 네트워크가 배경이다. 하왈라 업자는 정해진 시간에 전표를 가져오는 자에게만 돈을 지급한다. 비록 악당이 전표를 가로챈다고 해도 악당에게 돈을 지급하기 때문에 전표를 빼앗으려는 악당으로부터 전표를 지키기 위한 사투가 가능하다. 전표를 제시하는 이가 부정한 방법으로 입수했다는 사정을 뻔히 알아도 업자는 규칙대로 돈을 내준다. 작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금융망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경험으로 터득한 법칙이다. 국왕들이 법치에 귀 기울이기 이전부터 ‘규칙에 의한 지배’라는 문화를 가장 앞서 실천한 분야가 바로 금융 네트워크다.

비트코인은 하왈라의 암호 전표라고 할 수 있다. 하왈라의 전표는 배달 사고가 나기도 하고 위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복제 불가능하고 전송 도중 가로채기를 당할 염려가 없다.

비트코인의 시장가격은 일단 무시하고 생각해 보자. 철수가 A에게 1000달러를 주고 미국에 있는 갑수에게 스마트폰으로 비트코인 비밀 키를 전달한다. 갑수는 B에게 암호 키를 제출할 것이고 B는 1000달러를 갑수에게 지불한다. 비트코인의 암호는 해킹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B는 갑수가 1000달러를 수령할 진짜 주인임을 믿을 수 있다.

초창기 비트코인은 하왈라의 난제를 해결해 주는 솔루션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하왈라의 전표와 달리 비트코인은 암호들 간의 산술이 가능하다. 비트코인은 암호 체계이면서도 균등하게 분할될 수 있고 균등하게 합산될 수 있다. 갑수가 암호표를 절반으로 나눠 제시하면 500달러를 주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또 비트코인의 암호 체계는 통합적이기 때문에 다른 하왈라 조직에서도 통용된다. 갑수는 철수가 지정한 B만이 아니라 C나 D에게도 비트코인을 제시하고 10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널리 확산되면 갑수는 비트코인을 업자에게 가져가 1000달러로 바꾸지 않는다. 아예 친구에게 주고 친구에게 1000달러를 받을 수도 있다. 금 보관증으로 시작했다는 달러가 그러하듯이 금융망에서 널리 인정받는 전표가 화폐의 속성을 띠는 것은 자연스럽다.

비트코인 가치의 뿌리는 위조되지 않는 송금 전표다. 그런데 최초에 철수가 A에게 맡긴 1000달러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트코인은 10년 동안 비판을 받아 왔다. 비판론자들이라면 10년 전 피자나 배달했다는 싸구려 시절을 들먹이며 정당한 송금액을 맡기고 비트코인을 받은 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트코인 생태계에서는 철수가 A에게 맡긴 1000달러가 존재한다. 바로 비트코인의 시장가격이다.

이론상 비트코인은 지구적으로 단일 가격이다. 국경을 넘는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고 현실적으로는 차액 거래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수가 1000달러를 주고 산 비트코인을 갑수에게 보내면 갑수는 바로 1000달러에 팔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 비트코인의 가격은 우연이 아니라 재현 가능한 현상이다. 비트코인이 기능을 가지면 비트코인이 가격을 갖게 된다는 논리다.

비트코인을 개별적인 돈으로 인식하지 말고 전체를 하나의 신뢰망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비트코인 가격을 설명할 수 있다.

[돋보기] 비트코인에서는 저절로 되는 ‘결제 완결성’

하왈라의 모형을 제도화한 것은 바로 은행이다. 금융망이 실제로 돈을 보내지 않으면서도 송금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장부를 연결해 계산하고 그 계산 결과에 따른 채무가 이행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은행 서로 간에 정산을 미루다가 한 은행이 도산해 버릴 수 있다. 이 은행이 갚지 못하는 금액에 대해 금융망이 책임져야 한다. 고객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원칙이 결제 완결성이다.

중앙은행이나 국제결제기구가 인정한 금융회사를 이용해 송금했다면 그 금융회사가 정산하기 전에 도산한다고 해도 고객의 송금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실제로 돈이 이동하지 않았지만 금융 기구를 통한 송금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행위로 간주돼야 하기 때문이다. 부정의하거나 착오였다고 하더라도 송금을 돌이키지 않고 문제 해결은 금융 시스템 바깥에서 법 절차에 따르도록 한다. 돈을 직접 보내지 않고 중개 기관의 장부 변경을 송금과 동일시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는 명예나 법, 규칙이라는 인위적인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제이 클레이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결제 완결성을 비트코인의 속성이라고 꼽았다. 다만 비트코인은 하왈라나 금융망과 달리 명예나 법이라는 인위적인 노력을 투입해 결제 완결성을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 비트코인이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신뢰 네트워크의 정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5호(2018.12.31 ~ 2019.01.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