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현실과 블록체인 연결은 ‘난제’…삼성·애플 등 글로벌 기업 뛰어들어야 해결 가능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의 고백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블록체인은 당분간 ‘순수한 디지털’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2.0을 외쳐온 혁신 그룹의 선도자가 한 말로는 다소 충격적이다. 좋게 보면 자기성찰이자 성숙의 증거이지만 그간 이더리움이 선도해 온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미래에 투자해 온 이들의 믿음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순수한 디지털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은 단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비즈니스와 연결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시간 낭비일 수 있다는 그의 주장과 연결해 읽으면 블록체인이 약속했던 혁신이 당분간 실현되기 어렵다는 뜻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의 장점을 계승하면서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로 알려졌다. 가격이 수시로 변하는 괴상한 화폐인 비트코인과 달리 이더리움은 새로운 산업의 플랫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인문·사회·경제 전문가들은 이 논리를 반박할 만한 기술적 통찰이 없었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의 평가를 믿었다. 사실 경제 전문가나 법률 전문가, 정치가나 관료들은 뭔가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부상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 ‘꼰대’로 낙인찍힌다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자기 영역이라고 믿어 온 화폐를 거침없이 후벼 파는 비트코인까지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잘 알지는 못해도 정보기술(IT) 플랫폼으로서 이더리움의 존재 가치는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듯 미지의 신기술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을 막아서기는 어렵다. 이더리움이 무한 발행된다는 사실이나 비탈릭 부테린 스스로 ‘싼 코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이더리움 투자자들조차 잘 모른다. 설사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블록체인이 몰고 올 혁신과 산업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비트코인보다 먼저 탄생한 스마트 콘트랙트

스마트 콘트랙트는 비트코인보다 오래된 개념이다. 비트코인도 스마트 콘트랙트 실현의 한 방안으로 개발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 콘트랙트를 이더리움과 연결해 생각한다. 비트코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을 때에도 이더리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라는 답이 있었다.

하지만 25세의 비탈릭 부테린 스스로 이더리움이 스마트 콘트랙트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긴 해도 스마트 콘트랙트가 기성 산업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할 만큼 성숙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셈이다.

정보의 출처 자체가 순수한 디지털이라면 온라인 체스 같은 게임의 승패, 난수표 복권, 시간에 따라 이자율이 바뀌는 금융 파생상품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현실의 축구 경기나 야구 경기 승패에 따른 내기나 복잡한 현실 변수를 반영하는 금융 파생상품은 순수한 디지털 정보의 범주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이행되는 계약이라면 결국 결제 완결성이 확보돼야 한다. 결제 완결성을 시스템 자체적으로 보증하려면 국가나 대기업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려면 스마트 콘트랙트가 문제 삼은 현실세계는 디지털에서 이벤트가 완료되는 것에 한한다. 다수가 복권을 사고 난수표를 통해 당첨자를 확정한 뒤 참가자들이 걸어 놓은 판돈이 당첨자에게 자동으로 수렴되는 정도라면 스마트 콘트랙트에 가깝다. 만약 복권 당첨이 디지털 바깥의 현실 정보와 연결되거나 복권 당첨자를 확정하는 주체가 필요하거나 이전된 판돈을 금융회사를 거쳐 환전해야만 쓸 수 있다면 스마트 콘트랙트의 이상이나 블록체인의 무결성 중 어느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의 경계 바깥에서 생성되는 정보를 누군가 정직하게 입력하고 보증한다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 정직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정보의 정량화라는 난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것이 참치나 한우다’라는 정보는 의외로 쓸모가 없다. 참치의 종류와 부위, 한우의 정의에 관한 정보들은 경계가 모호하기 마련이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면 블록체인의 무결성은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처럼 오히려 공급 사슬망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2017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블록체인과 토큰들은 사기극이었을까. 실현 불가능한 청사진을 내세우며 돈을 그러모았으니 말이다.

블록체인의 무결성을 이용한 스마트 콘트랙트와 스마트 콘트랙트 중심으로 지구적 공급 사슬망이 혁신되고 확장되는 일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기술의 등장이 현실에 접목되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전반적인 구조변경과 맞물려야 한다. 생태계의 변경은 한 산업의 변화만으로는 이루기 어렵다. 다양한 산업의 복합적 변화는 기술만이 아니라 촉진자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모험적 사고로 변화를 추구하는 작지만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의 역할도 촉진자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몇 몇의 다국적기업들이 신기술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파급되는 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핸드헬드 컴퓨터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하지만 핸드헬드 컴퓨터를 선도한 스타트업들은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이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핸드헬드 컴퓨터를 몸에 지니게 만들 수 없었다. 배터리 소재 혁신을 주도한 대기업들과 비싼 컴퓨터를 하나씩 사서 들고 다니고 싶도록 한 다국적기업이 이어 받아 이뤄 낸 결실이다. 애플과 삼성이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나서야 지구촌 시민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의 핸드헬드 컴퓨터를 삶의 한 구성 요소로 받아들였다.

블록체인과 스마트 콘트랙트가 디지털의 경계 너머까지 확장하는 일은 결국 몇몇 다국적기업들의 몫이 될 수 있다. 거래비용과 기업의 존재 의의를 통찰한 로널드 코스의 논리를 적용하면 다국적기업들은 여러 국경을 건너야 하는 오늘날 지구적 공급 사슬망에서 야기되는 불신 문제의 해결책으로 부상했다. 블록체인의 발전이 다국적기업의 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블록체인이 지구촌 시민들의 삶에 파고들기까지는 다국적기업들로부터 선택 받아야 한다는 논리의 귀결은 블록체인 주창자들로서는 생각해 내기 어려운 고약한 역설이었다.

[스마트 콘트랙트와 오라클 문제]

스마트 콘트랙트는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이행되는 계약이다. 온라인 포커를 할 때 경기의 승패를 컴퓨터가 자동으로 판별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제의 완결성만 보장되면 도박이라는 계약이 자동으로 이행된다. 하지만 금융회사나 신용카드사가 도박 게임에 결제해 주지 않으므로 온라인 도박은 스마트 콘트랙트의 발화점이 될 수 없었다. 금융회사가 보장할 필요가 없는 비트코인을 걸고 도박을 하면 결제 완결성까지 해결되므로 도박 모형을 약간 변형해 보험의 스마트 콘트랙트까지 디자인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험 계약은 디지털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코드로 입력돼야 한다. 암에 걸렸다는 것을 누군가 확인하고 입력해야 한다. 결국 스마트 콘트랙트 보험이 작동하려면 모두가 신뢰하는 의사나 병원이 필요하다. 블록체인은 불신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이므로 이는 자기모순적인 난제다.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에 정확한 정보를 입력하는 주체를 오라클이라고 부르고 오라클을 믿을 수 있느냐와 관련한 스마트 콘트랙트 난제를 오라클 문제라고 한다. 25세의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창시자는 오라클 문제가 생각보다 풀기 어렵다는 것을 에둘러 고백한 셈이다. 19세의 천재 엔지니어가 이만큼 성숙할 때까지 많은 이들이 휘둘린 셈이라면 그 책임을 신기술을 공부하며 살피지 못했던 인문학자들의 직무 유기로 돌려도 그다지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6호(2019.01.07 ~ 2019.01.1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