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여유 마일리지 양도·거래 가능…도입 거부하다 주도권 놓칠 수도

‘마일리지 블록체인’이 반갑지 않은 항공사들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지구가 사실은 평평하다든가 달이 인공적 구조물이며 인류는 아직까지 달에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음모 이론’이라고 한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유형의 이야기들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특성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수가 절대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왔기 때문에 거짓이 진실로 둔갑했다는 것, 이들 소수가 세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지구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소수가 설계한 프로젝트와 관련됐다는 얼개다. 과학적 사고 체계를 강조하는 이들이 음모 이론을 비판하는 이유도 개별적 가설의 타당성이 핵심이 아니다. 인간의 의도 중심으로 세상을 읽는 관점을 가장 큰 문제로 삼는다.

사실 호모사피엔스의 사고 체계와 음모 이론은 잘 어울린다. 음모 이론이 과학적 사고보다 오래된 이유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인간의 의도와 관련 지어 생각하는 습관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법적·윤리적 체계의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이런 사고 습관을 남용하면 의도로 짜인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특히 비트코인처럼 파괴적이고도 혁신적인 기술이 몰고 올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의도 중심의 접근은 방해물이다. 비트코인은 정부의 독점 영역으로 인식돼 온 통화관리 체계를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적 화폐의 대명사는 달러이므로 비트코인을 옹호하는 이들의 의도는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중국·일본 정부는 비트코인에 대해 호의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제외하면 미국 정부가 가장 호의적이고 중국 정부는 비트코인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래서 비트코인 현상의 전개를 알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의도보다 신기술이 초래한 새로운 경쟁 압력과 적응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정치학적인 분석틀보다 미시경제학적 분석틀이 훨씬 유용하다.


◆‘음모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트코인 현상

생산성의 발전은 개별 생산자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의 산물이 아니다. 생산 시설이 정치적 의사결정권자들의 손아귀에 있을 때 생산성은 향상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는 풍부하다.

한 산업 부문에서 생산성 향상의 수혜자는 소비자와 다른 산업 부문이다. 생산성 향상을 추구한 내부자들은 생산성의 향상으로 얻는 게 별로 없다. 생산성의 향상이 생산성을 추구하는 주체에 이로울 때는 경쟁 압력 아래서다. 다른 기업보다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생산성 향상에 몰두하더라도 산업 내부에서의 모방과 지식의 전파 때문에 상대적 지위가 제자리일 때도 많다.

설사 그렇더라도 개별 생산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이 개별 기업에 반드시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므로 개별 기업의 의도에 돋보기를 들이대면 산업 전체의 방향을 읽기 어렵다는 말이다.

항공사들의 마일리지 정책은 지구적 경쟁 압력의 산물이다. 항공사 마일리지에 블록체인이 적용되면 마일리지 자체가 비트코인과 유사한 성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개별 항공사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방향이다. 마일리지를 퍼블릭 블록체인 토큰으로 발행하면 항공사 서버는 통제 권한을 잃는다. 가족 간에만 마일리지를 승계하도록 하는 등의 항공사의 정책은 의미를 잃는다. 이 때문에 마일리지의 자유로운 양도와 거래가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항공사가 마일리지 포인트를 블록체인에 올릴 이유가 없다. 개별 항공사의 이익은 고객들이 마일리지를 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 쌓인 항공 마일리지가 2019년부터 소멸된다. 마일리지 중 대략 30%가 사용되지 않으므로 항공사들은 관련 부채를 덜어낼 수 있다.

싱가포르항공과 같은 경쟁 친화적인 기업들은 이미 항공사 전체의 이익을 배신하기 시작했다. 자사의 마일리지를 블록체인에 올려 소비자들이 빠짐없이 사용하도록 할 생각이다. 암묵적인 카르텔을 깨뜨리는 내부자들의 이런 도발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비자들 간의 네트워크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로 항공사들의 폐쇄적 마일리지 정책은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우버와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공유 경제의 바람을 타고 수하물 중량 한도를 거래하는 시장도 움트기 시작했다. 수하물이 많으면 추가 요금을 내지만 수하물이 적으면 항공사로부터 돌려받는 이익이 없는데 이는 합리적이지 않다. 한도를 넘는 수하물이 항공사에 비용을 유발한다면 짐이 없는 승객은 항공사에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정보가 투명하고 지불 수단이 확실하다는 전제에서 수하물의 한도를 이용한 택배 네트워크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에어체인네트워크라는 블록체인 프로젝트는 수하물 중량 한도를 채우지 않는 승객들의 동선을 파악해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항공 택배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물론 항공사가 자신들의 자원이 외부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거래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블록체인과 소비자들의 권리 의식, 무엇보다 출혈경쟁을 마다할 여유가 없는 후발 주자들의 개방정책이라는 압력 속에서 이런 공유시장을 무작정 금지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 수하물의 무게만큼 마일리지 포인트로 환급해 주고 그 마일리지 포인트를 자유롭게 양도하게 하는 것이 항공사로서는 최선일 수 있다. 즉 비행기도 없고 고객 정보도 없는 외부자들이 마일리지 통합 블록체인 플랫폼 사업을 주도하게 할 바에야 항공사 스스로 자기 마일리지가 확장된 항공 산업의 유력한 화폐가 되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다.

각 산업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들이 비트코인을 모방한 블록체인 토큰을 만들 때 그들이 블록체인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서는 답을 얻기 어렵다.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트코인의 발명이 몰고 온 새로운 경쟁 압력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꺼내든 적응의 산물일 뿐이다.

[돋보기] 마일리지 통합 토큰의 가능성
마일리지 M2O(mileage to opportunity) 프로젝트는 사용되지 않는 전 세계 마일리지를 통합해 토큰으로 유통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내세웠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의 등장 이후 가장 많이 논의돼 온 것은 기업들의 마일리지 통합이다.

이더리움이 주창하는 스마트 콘트랙트는 데이터의 정량화나 오라클 문제라는 만만치 않은 기술적 장애가 있다. 하지만 마일리지 통합은 기술적이거나 개념적인 장벽이 없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비트코인과 달리 기업들의 마일리지 포인트는 실체가 있으므로 통합 마일리지 코인이 비트코인을 앞서거나 심지어 비트코인 현상을 묻어버릴 수 있다는 전망은 블록체인만큼이나 오래됐다.

블록체인이 등장한 이상 통합 마일리지를 가로막는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지만 거대 기업들 간의 이해 조율과 규제 기관의 대응이라는 난제 때문에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M2O와 같은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는 이유도 규제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거대 기업들이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 기관이 통합 마일리지 블록체인 토큰을 허용한다면 이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글로벌 기업들의 이합집산이 매우 치열할 것이다. 이미 OK캐시백이라는 통합 마일리지를 개발해 온 SK같은 기업도 이 경쟁에서는 난쟁이로 보일 정도다. 통합 마일리지 시장은 글로벌 페이먼트 경쟁과도 밀접한데 구글·페이스북·애플·삼성·알리바바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치열한 각축장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7호(2019.01.14 ~ 2019.01.2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