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시장 침체 속 ‘헛된 기대’ 넘쳐…비트코인의 세계관은 ‘주류화’ 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제도권 진입만 손꼽아 기다리는 비트코인 투자자들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홍콩 최대 부호이자 세계 23위 자산가로 이름이 올라 있는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이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모기업인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가 준비 중인 암호화폐 트레이딩 플랫폼 ‘백트(Bakkt)’에 출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 회장은 비트코인의 미래를 낙관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다. 2013년에는 야후의 설립자 제리 양의 설득으로 비트코인 결제 지갑인 비트페이에 투자하기도 했고 2016년에는 블록스트림에도 투자했다.

백트의 설립자 제프리 스프레처 ICE 회장 부부는 월가의 금융 기업들이 안심하고 비트코인을 구입하고 거래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1차적인 사업 모델로 잡았다. 장기적으로는 비트코인이 국제 거래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고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결제와 금융 솔루션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 부부가 2014년부터 비트코인을 연구해 얻게 됐다는 이 야심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스타벅스까지 가세했다.

백트는 최근 리 회장과 같은 영향력 있는 투자자들로부터 1억8000만 달러를 모았다고 했지만 개장은 계속 늦춰지고 있다. 원래 2018년 11월 오픈을 예고했지만 12월로 연기됐고 다시 2019년 1월 24일로 발표했다가 최근에 다시 2019년 상반기로 특정 일자 없이 연기됐다. 회사는 기술적인 문제로 연기한다고 밝혔지만 규제 기관인 미국 선물거래위원회(CFTC)와의 실무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침체에 빠진 암호화폐 시장이 백트의 출범만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백트의 연기 소식이 나올 때마다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하고 있다. 유명 암호화폐 투자자 윙클보스 형제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했던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 허가 관련 소식에 따라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내리던 2016년과 모양새가 비슷하다. 결국 2017년 3월 SEC는 3년간 끌어오던 비트코인 ETF를 불허했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은 헛된 기대가 꺾인 직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백트 개장이나 비트코인 ETF 뉴스에 따라 암호화폐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암호화폐 이력이 짧은 투자자들의 성향을 반영한다. 이들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성장이 공적 제도와 주류 기업들의 수용 여부에 달렸다고 믿는다. 주류화가 조속히 진행된다는 기대로 투자했다가 비관적인 뉴스에 낙담하는 모습이 가격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제도권은 비트코인을 최대한 피하려 할 것

그런데 만약 제도권과 주류 기업들이 비트코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위기에 몰렸을 때라고 가정해야 한다. 국가 화폐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는 비트코인을 국가 화폐에 근간을 두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만약 비트코인 가격이 제도권의 비트코인 호감도에 좌우된다고 확신한다면 당장이라도 팔아 치우는 것이 최선이다. 돌출적인 선택이 간혹 있기도 했지만 비트코인에 대해 제도권은 일관되게 무시해 왔고 무시할 수 없을 때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틀어막아 왔다.

비트코인의 성장은 독특한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이 아이디어는 세계가 대체로 질서정연하고 대부분의 정부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암묵적 믿음과 배치된다. 안정된 질서라는 것은 있더라도 우연이고 대부분의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마음이 없거나 마음이 있더라도 실력이 부족하다. 쓰나미나 지진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예외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질서야말로 예외적 상황이라는 논리다.

비트코인을 옹호하는 이들은 하이퍼인플레이션, 금융 위기, 정부의 몰락이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세계를 전제한다. 주류 기관은 그 자신이 바로 질서정연한 세계의 상징물이기도 하므로 비트코인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부정과도 같다. 정말로 질서 있는 세계라면 비트코인이 튤립보다 가치가 없다는 이들의 주장이 타당하다.

비트코인 옹호론자들의 시각으로 세계를 둘러볼 때 몰락이 임박한 독재 정부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민중혁명이나 쿠데타로 독재 정부가 전복되면 어제까지 호사를 누리던 독재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지위와 재산을 빼앗기고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이 두려움이 현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이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도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바로 이들, 엘리트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독재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혁명 이후 증명할 수 있으면서도 현 정부의 수사망에 걸려들지만 않는다면 독재 정부의 몰락을 원하는 바깥 세력에 협력하려고 할 것이다.

‘유사 익명성’을 가지고 중개 기관을 거치지 않는 암호화폐의 특성은 이런 일에 쓸모가 있다. 바깥 세력은 협력을 약속한 엘리트가 만든 개인 키와 연결된 공개 주소에 여생을 편안하게 향유할 수 있는 거액의 비트코인을 보낸다. 바깥 세력은 공개 주소의 거래 내역을 전 세계에 공표한다. 자신의 계좌를 확인하는 위험부담 없이 자신에게 비트코인이 입금됐다는 것을 내부의 협력자가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바깥 세력은 권력 상층부에서 협력자들을 포섭하고 독재 정부에 핵심 관료들이 이미 포섭됐다고 공개하면서 여러 개의 공개 주소에 비트코인이 전송되는 것을 일부러 보여줄 수도 있다. 암호 키는 암기할 수도 있으니 독재 정부는 배신자를 특정할 증거를 얻기 어렵다. 독재 정부의 엘리트들은 누가 포섭됐는지 확인할 수 없으므로 서로를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고 그만큼 현 시스템이 유지될 것이라는 확신이 약화된다.

바깥 세력이 비트코인을 전송할 때마다 이를 공표하기 때문에 독재 정부의 핵심들은 자신과 관련한 정보도 외부에 넘겨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잔혹 행위나 적극적인 충성을 주저하게 된다. 독재 정부 붕괴 직전 협력자들은 국경을 넘어 조용히 비트코인을 챙겨 여생을 평온하게 보내거나 비트코인의 암호 키를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이 독재 정부 붕괴에 협조하고 잔혹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다.

질서정연한 세계에서라면 마약이나 범죄와 같은 일탈의 수단으로 보일 뿐이지만 언제든지 질서가 붕괴될 수도 있는 세계에서라면 비트코인의 이런 속성은 개개인이 완전한 불신 상태를 벗어나 타인과 협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뢰의 동아줄이다.

어쩌면 현재 질서의 최대 수혜자인 주류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조차 비트코인을 혐오하는 이유도 비트코인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돋보기] 비트코인 익명성의 또 다른 모습 ‘유사 익명성’
비트코인의 익명성은 이중적이다. 은행 계좌와 달리 비트코인의 소유자를 알고 있는 정부나 금융회사는 없다. 다만 거래소를 통해 구입할 때 거래소의 거래 기록과 통장 기록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 간 거래나 채굴을 통해 얻는다면 비트코인의 실소유자를 찾기 어렵다. 물론 블록체인상에서의 비트코인의 이전은 모두에게 공개된다. 수사기관이 범인의 금융거래를 보려면 법원의 영장이 필요하지만 비트코인 관련 수사를 할 때는 클릭 몇 번만으로 의심 계좌의 거래 내역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개돼 있지만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투명성과 익명성의 이중성은 음미할수록 여운이 크다.

수사기관이 특수한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자원과 시간을 투입한다면 거래 패턴이나 실제 사람과의 접촉 지점을 확인하는 방법 등을 통해 소유자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자원은 한정적이므로 대부분의 비트코인 소유자들은 익명성에 기댈 수 있다. 비트코인이 소수의 엘리트들로부터 다수의 대중으로 금융 권력을 이전할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한데 유사 익명성은 소수의 거액 거래자들보다 다수의 소액 거래자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8호(2019.01.21 ~ 2019.01.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