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27억 명 유저 확보한 페이스북이 직접 발행...성공 가능성은 '미지수'
드디어 등장한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6월 18일 드디어 황제의 칙령이 반포됐다. 이제 암호화폐는 지구촌 시민들의 필수품이 될 운명이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300년 동안 동방의 컬트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문명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 27억 명의 유저를 확보한 정보기술(IT) 제국 페이스북은 암호화폐 리브라를 2020년까지 세상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기존 암호화폐들의 가격 변동성을 극복하겠다는 리브라는 금융권으로부터 소외된 수십억 지구촌 시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20억 명 이상의 지구촌 시민들이 페이스북이라는 단일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돼 있으므로 페이스북이 주도하는 암호화폐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로 보인다.

리브라는 단순히 달러의 전자적 표현물이 아니다. 만약 페이스북이 은행업을 영위하면서 고객들의 예금 잔액에 대응하는 전자 토큰을 발행한다면 리브라는 전자화된 양도성 예금이거나 당좌수표와 비슷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다만 전자화된 양도성 예금이라고 해도 분산화된 서버에서 작동하며 암호 체계를 활용하는 이상 아이피 추적이 가능한 기기에서만 작동하도록 해 기기 주인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수 있다고 해야만 금융 당국을 간신히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리브라는 케인스의 ‘방코르’와 닮은 꼴

놀랍게도 그들은 당국자들의 눈치를 보는 대신 리브라가 독립된 ‘제국의 화폐’라고 선언해 버렸다. 리브라는 달러의 전자적 표현물이 아니다. 달러·유로·엔화와도 상대적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포부에서 나타나듯이 리브라는 독립된 화폐단위다. 게다가 미국의 중앙은행(Fed)을 연상시키는 리저브 시스템을 갖춘다.

리브라 어소시에이션은 스위스에 주소를 둔 다른 여러 국제기구를 닮고자 한다. 리브라를 발행하면서 보유하게 될 자산들은 각국의 통화는 물론 안전 자산에도 투자해 이자 수익도 창출한다. 그 이자 수익은 리브라협회와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사용하고 남은 것은 시스템에 투자한 이들에게도 나눠준다.

여러 나라의 통화 바스켓으로 담보 자산의 가치를 보존한다는 발상이나 국제기구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금융정책으로부터의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발상은 모두 케인스의 방코르를 연상시킨다.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전후 영국 대표로 협상에 참여한 케인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무역 질서를 위해 독립된 국제 결제 단위를 제안했다. 방코르는 디플레이션의 속성을 가진 금에 대한 케인스의 반감을 반영해 정치적인 조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후의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예견한 그는 미국 정부의 변덕에 따라 화폐 질서가 교란되는 것도 염려했다. 하지만 미국은 금이 아닌 별도의 화폐단위에 달러가 종속된다는 것은 미국 주권보다 상위 개념의 국제기구를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별도의 화폐는 국제기구의 의사결정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별도의 국제통화를 포기하는 대신 달러를 금에 고정해 미국의 통화정책에 따라 국제 결제 수단이 교란되는 것도 차단하는 선에 만족해야 했다.

방코르를 제안한 케인스는 물론이거니와 미국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리브라가 시도하고 있다. 케인스의 방코르는 실물이 없는 회계 단위로서만 존재한다. 게다가 국가 간에만 거래되는 화폐였다. 민간 기업이나 개인들이 방코르를 소유하거나 방코르로 결제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방코르 시스템의 이면에는 ‘현인 지배’라는 정치사상이 깊게 배어 있다. 고도의 정치적 과정을 거쳐 현자들에 의해 양이 조절되므로 방코르는 금에 묶여 있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만약 불특정 다수의 기업과 사람들이 방코르를 소유하게 되면 방코르의 양은 수요에 따라 변동될 수밖에 없으므로 대중의 투기적 욕망에 노출된다.

‘현인 지배’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은 현재의 시스템도 동일하게 깔고 있는 전제다. 달러를 금에 고정하기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는 달러 금태환을 포기한 시점에 붕괴됐다고는 하지만 그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달러는 더 이상 금을 보증하지 않지만 각국의 화폐들은 여전히 달러에 의존한다. 미국 밖의 지구촌 시민들이 직접 달러를 보유하거나 거래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리브라는 금융회사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탄생한 만큼 당연히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 의해 소유된다. 가치가 안정적이라고는 해도 달러와 다른 별도의 화폐단위이므로 가치의 변동은 독립된 위원회에 의해 조정된다.

물론 리브라는 별도의 통화정책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담보자산들을 운용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리브라가 단순히 달러나 금에 연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사실상 통화정책을 닮기 마련이다. 리브라가 만약 달러와의 일대일 교환을 전제로 달러 자산을 발행량만큼 보유한다면 리브라만의 신용 위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리브라 자산의 구성 비율에 따라 유동성·안정성·수익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신용 위기, 즉 디폴트도 발생할 수 있다.

리브라의 자산을 금에 묶어 놓는다면 금본위제로의 회귀다. 비트코인에 고정한다면 가격의 변동성을 줄인다는 애초의 취지에 어긋난다. 달러에 묶는다면 지구촌 시민들이 달러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할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리브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지속돼 온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고 인식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 엘리트들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새로운 국제 체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릴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리브라 선언이 밀라노 칙령처럼 암호화폐를 공식화하는 날로 역사에 남게 될지는 그야말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진정한 의미의 황제였는지에 달렸다.

[돋보기]리브라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진짜 황제라면 정치인들의 반대는 국지적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스크럼을 짜고 이 공룡이 정부 영역을 침입하려는 시도를 좌초시킨다면 그가 황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비트코인이 다른 프로젝트에 대해 갖는 우의점도 선명하고도 새삼스럽게 각인해 줄 것이다.

리브라 프로젝트가 언론에 나오자마자 반응한 것은 미국의 상원 은행위원회였다. 그들은 공개편지를 통해 리브라 프로젝트가 개인 정보를 남용할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리브라 프로젝트가 공식화되자 정치인들의 목소리도 한층 분명해졌다. 맥신 워터스 미 하원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미 의회와 규제 당국의 검토가 있기 전까지 리브라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의회 마르쿠스 퍼버 의원도 페이스북과 같은 다국적기업이 암호화폐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과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 총재도 리브라를 금지할 뜻을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50개에 달하는 미국의 주 모두에서 리브라가 사업 승인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리브라가 한국의 규제 장벽을 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0호(2019.06.24 ~ 2019.06.3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