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Ⅱ]
- 2014년부터 200억원 투입, ‘상업화’와 다른 길
- 봉제 장인·청년 손잡고 새로운 활기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3번 출입구로 나와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울시 도시재생 지역 1호인 종로구 창신동이 나온다. 이 지역은 건장한 남자도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언덕배기 지역으로 오래된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다.

동대문·종로 등 중심지와 인접해 있지만 높은 건물과 고층 아파트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봉제 공장’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거대한 공장이 아니라 적게는 혼자, 많게는 네댓 명이 모여 옷을 만드는 소형 봉제 공장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봉제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파악된 공장만 1000여 개, 종사자는 30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최근 공장이 계속 늘고 있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 우리나라 봉제 산업 역사 품은 창신동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창신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봉제마을은 한국 봉제 산업의 역사를 품고 있다. 6·25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창신동 일대에 모여들며 자연스럽게 구제품 옷 시장이 열렸고 1970년대 후반 청계천 주변의 봉제 공장들이 대거 이동하며 동대문 평화시장의 배후 생산지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국 봉제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대형 쇼핑타운 호황기 시대를 맞은 1990년대까지 창신동 봉제마을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 후반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파고도 거뜬히 헤쳐 왔다. 오히려 내수 시장이 어려움을 겪자 일본과 미국 등으로 수출 길을 열며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봉제 산업이 중국·동남아 등 저임금 국가로 옮겨 가며 봉제마을은 급격한 쇠퇴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 경제의 기반이 가라앉자 봉제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이 동네를 떠났고 활력을 잃은 동네 곳곳은 급속도로 노후화됐다.

그러다 노후·낙후 지역을 대단위로 정비하기 위해 2007년 서울시 뉴타운 사업지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마을이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뉴타운 사업은 처음에는 많은 이의 환영을 받으며 의욕적으로 추진됐지만 지나친 사업성 추구, 주민들의 재정착률 저하, 투기 세력에 의한 지가 불안정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창신·숭인 일대는 2013년 전국 최초로 주민의 뜻에 따라 뉴타운지구 전체가 해제된 첫 사례지가 됐다.

이후 낙후된 지역을 변화시키기 위한 지역 주민과 행정 당국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14년 5월 국토교통부에서 전국 최초 ‘도시재생 선도 지역’으로 지정받으며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현재 창신동은 주민 참여를 기반으로 시비 100억원, 국비 100억원 등 예산 약 200억원을 들여 재생 사업을 진행해 왔고 올해 12월을 끝으로 사업이 완료된다.

◆ 낡은 기반 시설 속에 스며든 도시재생 사업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지난 11월 6일 그동안 진행된 도시재생 사업의 성과를 둘러보기 위해 창신동 일대, 그중에서도 봉제 공장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어 봉제거리라고 불리는 곳을 찾았다. 창신시장·창신길과 이어져 있는 봉제거리는 골목 곳곳에 봉제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가파른 골목길, 오직 사람의 두 발로 지나야 하는 좁디좁은 골목길 사이사이 열린 문 사이로 실밥을 뜯는 모습도 보이고 무언가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도 보인다.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오래된 주택 골목에서 들려오는 ‘위이잉’ 거리는 재봉틀 소리와 나지막한 라디오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세탁소 스팀기의 수증기도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온다. 간판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골목을 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골목이 얽히고설킨 봉제거리에는 한국 의류 산업에 필요한 모든 공장이 모두 자리하고 있다.

원단을 정해 설계하는 패턴 공장, 그대로 천을 자르는 재단 공장, 재단된 원단을 재봉틀로 이어 붙이는 재봉 공장, 각종 부자재를 달고 주머니를 만드는 공장, 완성된 옷을 다림질하고 실밥 등을 제거하는 공장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옷을 만들어 낸다.

봉제거리 초입과 큰길가에는 주로 패턴 가게들이 보이고 골목길에 접어들면 재단 공장 그 주변에 봉제 공장들이 있고 좀 더 깊은 곳에 주머니를 다는 공장과 옷을 다리는 공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봉제거리에는 공장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옷감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다. 골목 곳곳을 누비며 쉼 없이 원단과 옷감을 공장으로 옮긴다. 워낙 많은 오토바이가 돌아다니는 통에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충돌 사고가 날 위험성이 높아 보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봉제마을에 일어난 도시재생 사업의 성과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좀 더 봉제거리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색적인 건물과 시설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봉제거리 박물관’,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아트브릿지 뭐든지 예술학교’ 등 곳곳에서 진행된 도시재생 사업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색적인 간판들도 눈에 띈다. ‘창신동라디오 덤’, ‘뭐든지 도서관’ 등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공간이 골목 사이사이 숨어 있다.

골목 어귀에 창신동 봉제 일의 개념도가 걸려 있고 골목길 곳곳에 봉제를 의미하는 다양한 그림들도 그려져 있다. 특히 골목길을 걷다 보면 벽에 이 일대 봉제 산업의 대강을 정리한 안내판이 붙어 있다. 골목을 거리박물관으로 꾸며 곳곳에서 봉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시설물과 간판·안내판 등이 한데 조화를 이루며 봉제거리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봉제거리를 둘러보다 한 패턴 공장에 들어갔다. 3명이 한창 작업 중이다. 이곳에서 도시재생 사업의 결과가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자신을 ‘김 씨’라고 소개한 이곳 사장은 공장이 30년 됐다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10년 가까이 김 씨가 운영 중인 곳이다.

김 씨는 “대형 건물이나 상업 시설이 들어서는 큰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동네 분위기는 밝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은 요즘 젊은 친구들이 봉제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많이 모이고 있다”며 “사업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빈 공장이 많았는데 이제는 빈 공장을 찾기 어렵고 오히려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봉제거리의 봉제 장인과 패션 디자이너, 모델을 꿈꾸는 대학생들의 협업이나 창업도 여럿 이뤄지고 있다. 창신동에서 디자인하고 생산한 옷을 입고 패션 모델이 마을 골목길을 런웨이 삼아 걷는 ‘상상 패션 런웨이’ 행사가 대표적이다.

젊은 디자이너와 봉제인을 교육하는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도 진행 중이다. ‘창신. 데님연구소’는 지난해 아카데미에서 교육 받은 대학생들이 졸업한 뒤 이곳에 창업한 패션 스타트업이다.

봉제거리를 둘러보는 사이 이색적인 광경도 목격됐다. 삼삼오오 모인 20~30대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것이다. 한 무리 두 무리를 넘어 이런 광경이 계속되다 보니 궁금증이 일었다. 이들은 모두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으로 향했다.

봉제역사관에 들어서자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관람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회사(이랜드그룹) 소속으로 팀별 과제인 야외 방 탈출 게임 리얼 월드 미션을 하러 왔다고 했다. 최근 봉제역사관은 리얼 월드와 협약을 맺고 미션을 푸는 퀘스트를 진행 중이다. 아무래도 이랜드가 의류 기업이다 보니 직원들의 교육과 팀원 간의 소통을 위해 내준 숙제인 듯싶었다.

이곳에서 만난 고정석(39) 씨는 “회사 과제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게 됐지만 봉제역사관까지 걸어오면서 본 봉제거리가 신기했다”며 “대형 공장이 아닌 주택가 소형 공장에서 서로 협업하며 옷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문경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관장은 “최근 게임 때문인지 방문객이 많이 늘어났다”며 “특히 젊은 친구들이 이곳을 방문, 봉제마을을 둘러보면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상업화와는 먼 봉제거리의 도시재생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봉제거리를 둘러보며 계속 든 생각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됐는데 왜 상업화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다. 대표적으로 ‘성수동 수제화거리’가 떠오르며 비교가 됐다.

수제화거리는 봉제거리보다 앞서 도시재생 사업이 전개된 곳으로, 지금은 20~30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다.

1990년대 성수동 수제화거리는 1000여 개의 제화 관련 가게들이 운영되고 국내 수제화 산업의 80% 이상을 생산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지만 2000년대 들어 중국산 기성화가 들어오면서 쇠퇴한 지역이다. 이를 살리기 위해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했고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표면적으로는 대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제화거리에는 아픈 이면이 있다. 구두 공장보다 카페와 음식점 등이 더 많이 들어섰다. 오히려 상권이 형성되고 유명해지면서 임대료가 많이 올라 기존에 있던 구두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추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봉제거리는 철저한 봉제 중심의 도시재생이 이뤄지고 있었다. 도로 정비나 신축 상업 건물이 들어오는 대신 봉제 산업과 관련된 유의미한 시설이 더해졌을 뿐이다.

물론 주민들의 삶이 확연하게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골목길에 가로등은 제법 생겼지만 집은 여전히 낡고 불편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유명 음식점이나 카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제거리의 주인들, 특히 봉제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현재의 개발에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오히려 지금의 도시재생을 주민들이 직접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남준기념관’ 건립이다.

주민들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다섯 살 때부터 20대까지 창신동 저택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남준기념관을 지어 달라고 서울시에 요구했다. 결국 기념관이 세워졌고 전국 1호 지역재생 기업인 ‘창신숭인 도시재생협동조합’이 기념관 안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동네 어린이들이 “놀이터가 너무 멀고 재미없다”고 시에 건의한 내용이 반영돼 창의적 놀이 공간 ‘산마루놀이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물론 일부 주민들은 변화를 느끼지 못하면서 대표적인 도시재생 실패 사례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백남준기념관·봉제역사관·마을회관 등을 짓는 데 약 100억원, 거리 정비와 폐쇄회로TV(CCTV) 설치에 약 70억원 등 주민들이 직접 체감할 만한 주거 환경 개선보다 문화 시설 도입에 대부분 돈을 썼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봉제거리가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업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을 그러모아 지역 경제를 살린 수제화거리가 더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과연 봉제거리가 당초 계획한 도시재생의 목적대로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을지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한다.


◆ [인터뷰] 손경주 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 상임이사
- “봉제마을은 지켜야 할 역사이자 문화”
철거 대신 보존 택한 ‘봉제마을’…‘도시재생 1호’ 창신동의 실험
도시재생 사업의 중심은 주민이다. 개발에 따라 삶의 터전이 망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의 힘에 의해 수많은 도시재생 사업이 실패했다. 개발을 추진했던 많은 지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 기존에 살던 원주민은 비싼 땅값과 임대료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창신·숭인 도시재생 지역에는 특별한 회사가 하나 만들어져 있다. 바로 전국 최초 주민 중심 도시재생 회사 ‘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이하 창신숭인협동조합)’이다. 주민과 함께 지역의 자산을 활용해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자립을 추진이 설립 목적이다. 창신·숭인의 변신을 이끌어 온 손경주 창신숭인협동조합 상임이사(사진)를 만나 창신·숭인 지역의 도시재생 이야기를 들었다.

▶ 이제 도시재생 사업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창신·숭인 지역의 도시재생 사업은 2014년부터 올해까지 총 5년 동안 진행됐습니다. 사업비는 200억원의 예산이 편성됐고요.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진행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그동안은 선도 사업이었고 앞으로는 진행해 온 사업을 활용해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어야죠.”

▶ 특히 지역의 문화를 살린 봉제마을 조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창신·숭인 지역은 역사적·문화적으로 한국 봉제 산업의 숨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역사가 됐죠. 특히 지금은 이곳 봉제마을의 중요성이 더 커진 상황입니다. 남대문 상권이 동대문 상권에 밀리면서 동대문 중심으로 봉제 산업이 재편되고 있고 배후 생산지로서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이 때문에 처음 도시재생 사업 시작부터 봉제마을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 봉제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요.
“봉제마을 육성, 보존하기 위해 이미 많은 정부 기관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공장 개선 사업을 추진하고 노동부는 취업 지원, 인력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우리 협동조합에서는 간접 지원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실 배정받은 예산으로 직접 지원도 불가능하고요. 크게 2가지 사업인데, 우선 봉제인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입니다. 많은 봉제인들이 스스로를 못 배워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이분들은 장인입니다. 의류 산업계에서는 이분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아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협동조합에서는 외부 디자이너들과 봉제 장인들을 연결해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역사 문화의 관광화입니다. 쉽게 말해 봉제를 지켜야 할 역사 문화로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관광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광자원화 개발보다 경제 효과가 크진 않지만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문제에서 조금 더 자유롭습니다. 특히 이곳 봉제 산업은 1000개가 넘는 소규모 공장을 오토바이가 연계하는 시스템인데 관광자원화가 어렵기도 하고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지역재생 기업(CRC) 차원으로 봉제 장인과 외부 디자이너가 함께 일할 수 있는 셰어펙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죠. 둘째는 봉제인과 디자이너가 같이 거주할 수 있는 공공주택 형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삶 속에서 이해와 공유를 통해 자연스러운 봉제 산업을 만들어 가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cwy@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0호(2019.11.11 ~ 2019.11.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