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헤스터 퍼스 SEC 위원 “토큰에 법 적용 3년 유예하자”…수용과 거부의 균형점 찾는 미국
‘크립토 맘’의 암호화폐에 대한 새로운 제안
(사진) 헤스터 퍼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
[한경비즈니스=오태민 지놈체인 대표, ‘비트코인은 강했다’·‘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블록체인의 다른 이름은 ‘분산 장부’다. 데이터를 별도의 서버에 백업 받아 분실이나 훼손의 위험을 줄이는 수준의 관리 방법은 블록체인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블록체인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먼저 분산된 데이터베이스가 동기화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인증하는 엄격한 테스트 작업 소위 작업 증명이라고 하는 검증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또 이를 감독하는 주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프로그램 자체의 논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 전체를 결정할 때 분산된 서버들이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정부가 공격할 타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블록체인 생존을 가능하게 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 특성이 토큰 발행을 합법화하는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를 구성하는 다섯 명의 위원 중 한 명인 헤스터 퍼스 위원은 얼마 전 토큰 발행에 3년간 유예 기간을 주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퍼스 위원은 SEC가 비트코인 관련 금융 상품을 허가해 줘야 한다고 주장해 ‘크립토 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인물이다.
퍼스 위원은 미국 시카고에서 2월 6일 열린 국제 블록체인 회의(International Blockchain Congress)에서 ‘증권 심사 유예 제도’를 제안했다. 토큰을 처음 판매한 시점으로부터 3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정해 증권법 적용을 면제해 주자는 것이 핵심이다. 면제해 주는 대신 토큰을 발행한 이들은 선의의 노력을 통해 3년 내에 생태계를 분산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개 소스를 비롯해 프로젝트와 관련한 핵심적인 경영, 회계적인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도 제시했다. 무엇보다 퍼스 위원은 단일 주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분산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퍼스 위원의 제안은 이더리움 암호화폐 공개(ICO) 사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을 통해 초기 투자를 받았음에도 증권법 적용을 면제 받았다. 만약 SEC의 잣대가 증권(투자) 계약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인 호위 테스트라면 이더리움도 빠져나가기 어렵다. 실물이 없는 상태에서 투자 수익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비트코인을 받아 생태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SEC는 이더리움에까지 증권법을 적용할 생각이 없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기존의 규제로는 제어하기 힘든 암호화폐
이더리움의 사례에서 보듯이 블록체인 토큰은 출발 당시 증권의 성격을 가졌다가도 생태계가 성숙함에 따라 점차 투자 계약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로 이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토큰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제삼자가 화폐나 재화와의 교환을 통해 토큰의 가치를 보장할 때는 증권의 성격을 계속 유지한다. SEC가 제시한 호위 테스트는 이보다 엄격하고 광범위하다. 가치를 보장한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발행 주체의 노력을 통해 투자 대상물의 가치가 커질 수 있고 이에 따라 투자자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면 투자 계약이라고 본다. 호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채 투자금을 받는 행위는 불법 행위라는 것이다. SEC는 ICO를 통해 자금을 모은 이들에 대해 사후에 추적해 기소하거나 기소를 전제로 투자금을 돌려줄 것을 종용해 왔다.

메신저 텔레그램은 2018년 ICO를 통해 17억 달러를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이더리움과 같은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하고 SEC에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만약 퍼스 위원의 제안을 적용받을 수 있다면 텔레그램은 2021년까지 텔레그램이 지배하지 못하는 생태계로 플랫폼을 성숙시키면 된다. 물론 퍼스 위원은 자신의 제안이 SEC 위원 한 사람의 제안일 뿐이며 법제화하더라도 과거의 ICO가 아니라 미래의 ICO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케서린 콜린 바이낸스 미국 최고경영자(CEO)는 “만약 퍼스 위원의 제안이 현실화된다면 이는 미국의 암호화폐 시장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퍼스 위원의 임기가 오는 6월 종료되는 데다 의견을 청취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므로 제안이 구체적이지 않은 점 등이 한계로 지적 받고 있다. 예를 들어 3년 동안 분산화를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SEC가 중시해 온 선의의 소비자들을 사업자들의 기만과 태만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비록 SEC 위원 중 한 사람의 생각이지만 그가 ‘현직’ 위원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미국의 금융 당국이 블록체인이라는 신기술을 완전히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겠지만 향후 수년 내에 토큰 발행은 미국 정보기술 스타트업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돋보기] 사토시 나카모토는 사실 ‘법알못’이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9년 자신이 변호사가 아니므로 금융법과 관련해서는 상식적인 수준 이상으로는 아는 게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이 다시 주목받은 계기는 자신이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는 크레이그 라이트 박사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변호사이고 금융법은 자기 분야라고 확언한 트윗을 날린 적이 있다. 사실 그는 변호사도 아니고 나중에 이 트윗도 지웠다.
비트코인은 금융 관련 법체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고 있지만 그 창시자가 금융 관련 법률을 모른다는 사실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라이트 박사가 없는 말까지 해가며 자신이 전문가라고 과장해야 했던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 옹호론자들은 실제로 사토시 나카모토가 금융법을 잘 모른다는 진술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트코인 창시자의 정부와 법률에 대한 생각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트코인이 현행법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비트코인 생존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심판과 선수를 겸하는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게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때마다 규칙을 바꾸려고 하는 상대와 게임을 하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이는 현행 규칙을 세세하게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창시자가 제안한 것은 현행 법체계를 우회하는 꼼수가 아니었다. 분산화를 통해 정부가 목표로 삼을 타깃 자체를 없애 버리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더리움에 증권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관용을 베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SEC가 토큰 생태계를 규제해야겠다고 인식한 시점에 이미 이더리움은 분산화를 달성해 정부의 공격 목표 자체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이더리움 개발자를 구속하고 이더리움 재단을 없앤다고 해도 이더리움 생태계는 지속될 수 있었다.
2010년 12월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가 사라진 시점과 비트코인 생태계의 성숙과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옹호론자들의 생각이다. 정부가 그를 없앨 필요가 없는 시점에 다다라서야 그는 스스로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4호(2020.02.17 ~ 2020.02.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