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비트코인- 꾸준히 자신이 사토시라고 주장한 크레이그 라이트 박사- ‘결정적 증거’는 수년째 안 내놔
그를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부르기 힘든 이유
(사진) 크레이그 라이트 박사
[한경비즈니스 칼럼=오태민 지놈체인 대표, ‘비트코인은 강했다’·‘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비트코인은 리더십이 없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트코인 투자자들 중에도 제법 많았다. 그 틈을 비집고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사람이 있다. 바로 크레이그 라이트 박사다. 그는 2016년 막대한 마케팅 비용까지 써가며 자신이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겠다고 하고는 그때마다 말을 바꿔 왔다.

누군가 자신이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토시 나카모토만이 채굴할 수밖에 없었던 첫째 블록의 비밀 키를 제시하거나 그 블록의 코인을 옮기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정황 증거가 많더라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10년 전 자기 신분을 숨기고 활동한 사람이다. 그래서 특정인이 그가 아니라고 증명하는 증거를 내기는 쉽지 않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이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개발자라면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영문을 작성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것을 증명하기는 쉬워도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기 어려운데 라이트 박사는 이 비대칭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2019년 6월 미국 법원은 초창기 비트코인 소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법정 모독죄로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여러 차례 말을 바꿔 법원을 능멸하고 있다고 생각한 판사가 내린 지시인데도 라이트 박사의 지지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그가 결정적인 증거를 제출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가 속한 회사와 그의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BSV의 가격이 뛰어오르면서 기대감을 높였다.

◆첫째 코인의 비밀 키만 내놓으면 ‘상황 끝’


원래 이 소송은 사토시 나카모토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라이트 박사가 비트코인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했던 세상을 떠난 한 개발자의 유가족이 비트코인을 내놓으라고 민사 소송을 걸었다. 즉 라이트 박사가 진짜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믿는 사람이 자신이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는 라이트 박사를 상대로 비트코인 반환 소송을 한 셈이다. 그래서 그가 사토시 나카모토인지에 대해서는 별 다툼의 여지가 없다.

라이트 박사가 사토시 나카모토가 맞는다면 대략 100만 BTC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재판 과정에서 라이트 박사는 엄청나게 많은 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맞지만 당분간 그 코인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튤립트러스트라는 신탁 회사에 비트코인을 맡겼는데 2020년 1월이 돼야만 자신에게 접근 권한이 돌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위조가 의심되는 서류들을 제출했다. 또 자신이 소유했던 초창기 비트코인 주소라고 법원에 제출한 주소들 중에는 대형 거래소가 보유하고 있는 주소는 물론 엉뚱한 사람의 소유로 확인된 주소도 포함돼 있었다.

그해 8월 법원의 판결문에는 라이트 박사가 법원을 모독했고 말을 여러 차례 바꿨고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 적시돼 있다. 판사는 라이트 박사가 서류를 조작하고 진실을 호도한 정황이 상당하다고 적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에 대해서는 섬세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을 질타했다.

튤립트러스트로부터 비트코인 접근 권한을 받는다는 2020년 1월이 되기 직전 그는 또다시 기한이 연기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직후 튤립트러스트에서 몇 개의 서류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고 법원에 제출 기한의 연기를 신청했다. 라이트 박사의 변호사는 튤립트러스트로부터 개인 키를 받았다고 암시했고 그 때문에 BSV는 며칠 만에 3배나 뛰어올랐다. 이후 개인 키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을 바꿨다.

한편 라이트 박사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튤립트러스트로부터 개인 키를 받을 확률은 99.99%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결국 법원에 내놓은 말은 또 한 번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다. 튤립트러스트라는 신탁 기관 자체가 변호사들로 구성돼 있으므로 변호사의 비밀 특권 때문에 자신이 튤립트러스트로부터 받은 서류를 법원에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20년 3월 9일 미국 법원은 라이트 박사의 변호사 비밀 특권 주장을 기각하고 법원이 제출하라고 지시했던 서류를 3월 12일까지 제출하라고 명시했다. 이 재판을 맡은 브루스 라인하트 판사는 라이트 박사의 변호사가 작성한 문서가 변호사 비밀 특권의 근거인데 라이트 박사가 이전에도 위조 문서를 제출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문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누구나 펜만 있으면 작성할 수 있는 문서를 제출했다고 덧붙였다.

사토시 나카모토를 연구하는 이들이 라이트 박사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두 인격의 불일치 때문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자신의 역사적인 발명과 관련해 어떠한 배타적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라이트 박사는 비트코인 특허를 출원하는 등 재산권에 집착하고 있다. 2020년 2월 그는 비트코인과 비트코인캐시가 자신에게 소송을 당하지 않으려면 비트코인의 소스 코드를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협박은 앞뒤가 맞지 않는 발상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면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모순’이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특허권’ 주장은 모순일 뿐


만약 라이트 박사가 특정인이 비트코인 코드로 노드를 운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정부도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라이트 박사도 결국 사법 기구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막을 수 없다는 비트코인의 특징은 애초에 농담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또 특허의 기본 개념은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를 창출한 이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라이트 박사가 특허를 출원하는 시점에서 비트코인 소스 코드는 이미 수년간 공개돼 있었다. 그래서 원래 특허 출원을 원하는 기업들은 출원하기 전에 학술적 발표나 언론 보도를 피한다. 출원 전에 아이디어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주장을 배제하지 못할 근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정부가 비트코인 소스 코드에 대한 라이트 박사의 특허 출원을 신청대로 인정해 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설사 비트코인이 자중지란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특허권을 줬다고 해도 정부나 혹은 정부들은 비트코인의 숨겨진 노드들을 찾아내 압류할 수 없다. 정부가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발명품의 본질이며 이를 개발한 미스터리한 인물이 위대한 이유다.

정황적인 증거들이긴 해도 라이트 박사가 사기꾼이라는 단편적인 사실들은 상당히 누적돼 있다. 일단 그는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도 스스로 ‘박사’라고 지칭했고 그가 스스로 말한 호주에서의 군 경력은 거의 대부분 날조였다. 또한 그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증거가 있고 그가 큰맘 먹고 공개한 간단한 프로그램도 작동이 안 됐다. 곧바로 들통날 잘못된 지식을 떠벌리거나 자기 경력에 대한 거짓과 과장도 많았다. 또 사토시 나카모토가 온라인에서 활동했던 시기 그리고 활동 시간의 빅데이터가 라이트 박사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라이트 박사는 호주가 새벽일 때 활동하지 않았고 사토시 나카모토는 미국의 서부와 남미의 동부가 새벽일 때 활동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 모든 증거는 정황일 뿐이다. 라이트 박사가 어느 날 갑자기 첫째 코인이 담긴 비밀 키를 가지고 나타나면 모든 논쟁은 끝난다. 하지만 그가 굳이 그러지 않고 있는 이유를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가능성은 이 정도다. 그럴 수 없든가 아니면 그러면 너무 큰 손해를 보든가. 그의 추종자들은 후자 때문이라고 애써 변호하고 있지만 입증 책임이 라이트 박사 본인에게 있다는 사실만은 추종자들도 부정하지 못하는 아픈 대목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8호(2020.03.16 ~ 2020.03.2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