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슈퍼 엘니뇨’ 예상…‘아랍의 봄’ 부른 곡물 파동 재현 우려도

전 세계 식탁물가에 비상등이 켜졌다. 이상기후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농산물 가격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밀(소맥)·콩·옥수수 등 주요 곡물을 비롯해 육류·기호식품의 가격까지 줄줄이 오르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매달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의 3월 지수는 212.8을 기록해 10개월 내 최고치다. 2008년 아이티·소말리아 등에서 일어난 곡물 파동 때(201.4)를 이미 능가했다. 농산물발 인플레이션인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재현되면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이머징(신흥국) 국가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곡물·기호식품…안 오른 게 없다
식량 위기는 2000년대 이후 공급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신흥국의 육류 소비 증가로 사료용 곡물 소비 급증, 바이오 연료 사용 확대, 기상이변 빈도 증가, 투기 자금 증가 등이 맞물린 결과 전 세계는 ‘식료품을 싼 가격에 확보할 수 있는 시대’와 작별하게 됐다.
[곡물가 폭등, 재앙은 시작됐다] 옥수수·콩·밀 가격 ↑, 식탁물가 ‘비상’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 따르면 2012년 여름부터 올 1월까지 장기 하락세를 유지하던 곡물 가격은 2월 이후 일제히 반등, 소맥은 21%, 옥수수는 10%, 콩은 8% 정도 가격이 올랐다. 곡물뿐만 아니라 기호식품도 초강세다. 커피는 2월에 비해 가격이 무려 52% 폭등했고 설탕(원당)도 10% 올랐다. 2월 대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골드만삭스 원자재가격지수(GSCI)의 에너지·금속은 각각 0.3%, 2.8% 하락한 반면 S&P GSCI 농산물은 14.2%나 상승했다. 미국 한파와 브라질 가뭄 등 이상기후로 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란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날 선 대립을 하고 있는 점도 한몫했다.
[곡물가 폭등, 재앙은 시작됐다] 옥수수·콩·밀 가격 ↑, 식탁물가 ‘비상’
아침 밥값도 고공 행진 중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3월 17일 “아침상에 오르는 8개 주요 상품 가격이 올 들어서만 평균 25%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지적한 상품은 커피·오렌지주스·밀·설탕·우유·버터·코코아·돼지고기 등으로 우리의 식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 해당 신문은 ‘전 세계에 식품 인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반적인 수급 여건이 양호해 아직까지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석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동향분석실 실장은 “지난해 곡물 농사가 풍작이어서 생산 갭(생산-소비)이 전년에 비해 크게 개선될 전망이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수급에 미치는 영향도 아직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주요 곡물의 가격이 올랐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극심한 가뭄으로 가격이 상승했던 지난해 상반기 평균을 밑돌고 있고 과거 3년 평균치보다 아직은 낮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마냥 안심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곡물 시장은 외부 요건들에 따라 변동성이 워낙 크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상기후와 낮은 재고율이 문제다. 재고율은 재고량을 소비량으로 나눈 수치로, 1985년 31.3%였던 기말 재고율은 2010년 20% 내외로 떨어졌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주시해야 하며 양적 완화 이후 원자재 시장에서 재미를 봤던 투기 자본들이 언제든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수도 있다.

여러 불안 요소들 가운데서도 올해 곡물 시장 가격 폭등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는 역시 ‘기상이변’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곡물 담당 연구원은 “특히 올해는 슈퍼(몬스터) 엘니뇨의 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곡물 가격 폭등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선제적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무엇보다 식품 가격 상승세는 가계 지출에서 식료품 비중이 큰 신흥국의 경제에 큰 악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의 개발도상국들은 소득의 75%를 식량 구입에 사용하고 있다”며 “식량 위기 발생 시 신흥국들의 정치·사회적 혼란 가능성과 파장에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곡물가 폭등, 재앙은 시작됐다] 옥수수·콩·밀 가격 ↑, 식탁물가 ‘비상’
혁명의 도화선 된 곡물 가격 폭등
2008년 곡물 파동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인도네시아·아이티·모잠비크 등 30여 개국에서 시위와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2008년 식량 가격의 상승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벌어졌다. 당시 신흥국 소비 증가와 바이오 연료를 만들기 위한 곡물 소비 증가가 겹쳤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06년 6월부터 2008년 4월까지 밀·옥수수·콩의 가격은 각각 86%, 125%, 123% 상승했고 쌀은 무려 232%나 급등했다.

2010년엔 가뭄으로 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이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자 곡물 가격이 급등했고 이것이 이듬해 ‘아랍의 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집트의 사례는 먹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정치적 이슈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이집트 정부는 과거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시절부터 이집트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인 아이시를 공급할 때 보조금 제도를 채택했다. 정부가 밀가루를 제공하는 이른바 ‘국영 빵집’이 동네마다 있었기 때문에 8000만 인구의 40%가 넘는 빈곤층은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아이시(Ish)는 ‘생명’과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밀가루 가격이 급등하자 재정 여력이 바닥난 무바라크 정부는 보조금 지급 중단을 결정했다. 아이시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인들은 무바라크 정권 퇴진 운동을 벌였다. ‘아이시’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 때문에 30년 무바라크 정권은 무너졌다.

튀니지에서도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이 급격히 오르자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과 겹쳐 부패 정권에 대항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반정부 시위는 알제리·리비아·예멘·바레인 등으로 확산됐다. 한 전문가는 “러시아의 가뭄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로까지 번지게 됐다”며 “이들 국가들의 경제 상황이 여전히 어렵기 때문에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 시위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곡물 수입국 간의 협력을 통해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유엔 차원에서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후진국·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 등 국제 협력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비록 생존권의 위협을 받는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도 식량 위기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12년 기준 23.6%로, 미국(125%)·독일(124%)·영국(101%) 등 선진국의 4분의 1 수준이다. 정부와 지자체들은 곡물 파동 이후 식량 안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해외 농업 개발에 나섰지만 준비 부족으로 이렇다 할 실적을 올리지 못했으며 2009년부터 2013년 해외 농업 개발 추진비로 1000억 원 이상을 썼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