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존’ 기득권 속에서 경제 논리 압도, 양극화 해법 내놔야

한국의 정치가 시민사회 내의 이익집단과 이해관계의 집약과 표출을 통한 갈등의 관리에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 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를 제도권 내에 수렴해 갈등이 관리되고 조정되게 하는 게 정치다. 이러한 기능을 충족하기 위한 정당 체제로 양당제가 적당할지, 다당제가 더 효율적인지의 논쟁은 별개로 하더라도 상충하는 이해관계 조절에 실패한다면 공동체 복원은 요원해진다.
[대한민국 재도약의 조건] ‘한국 정치는 3류’…19년 동안 제자리걸음
정파 초월해 문제 직시해야
사회의 각기 다른 영역과 계급 관계의 조화로운 공존은 현재 한국 사회의 화두다. 그중에서도 가장 절박하게 와 닿는 것이 사회적 양극화다. 흔히 빈부 격차라는 말로 표현되는 양극화의 문제는 비단 경제적 영역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특정 지역에서 사실상의 일당 우위 체제는 분명 비정상적이다.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는 세대 간에도 심각한 양상으로 증폭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가진 계층과 저소득층의 양분법적 대립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에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와 경제의 융합 현상은 점점 강해진다. 어차피 두 영역이 분리되는 것이 아닐진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긍정적 의미의 융합보다 부정적 의미의 ‘정경유착’이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이에 대해 정치가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의 통합은 연목구어가 될 수밖에 없다.

흔히 경제계에선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말한다. ‘한국의 정치는 3류’라고 말했던 1995년 대기업 총수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장과 분배를 상호 대립적으로 볼 것인지, 상호 보완적인 선순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인 화두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 중 애써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것은 편향성의 동원(the mobilization of bias)으로 보인다. 양 측면이 모두 불가피성을 내포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사회·경제적 대립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소하기가 녹록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바로 이 지점이 정치와 경제가 만나는 지점이다. 여당과 야당 사이에 이른바 부자 감세냐 서민 증세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편을 포용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정서를 저변에 깔고 있다. 양측의 논리 전개는 접점을 찾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유다. 선거 득표만을 의식하는 현재 정치권의 모습은 서구 정당에서 각 당의 이념적 정체성과 계급의식이 정당을 통해 표출되고 관리되는 것과는 큰 괴리가 존재한다.

규제 개혁이 정권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규제 개혁은 말 그대로 일방적인 규제 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분야에 따라 규제가 강화돼야 할 부문과 영역별로 규제가 완화돼야 하는 상황을 동시에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규제 개혁은 규제 완화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에 대해 야당이나 비판적 세력은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물론 성장이 중요하고 경기 부양을 통한 지속적 성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소득의 재분배가 점차 악화되고 있다면 일방적인 경기 부양은 후대에게 또다시 부담을 안기는 정책이 될 수도 있다. 아베노믹스가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을 치유하는 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됐지만 최근에 와서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강 건너 불’로만 봐서는 안 된다.

정치권은 정파나 당파성을 초월해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권당과 거대 야당은 ‘적대적 공존’의 우산 속에서 기득 패권주의에 안주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외로 귀결된다. 중간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제3정당의 출현론이 꾸준히 제기되는 배경이다.


한국 정치는 변화 준비가 돼 있나
1987년 체제를 극복하자는 개헌 논의도 정치·사회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이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복잡한 셈법 때문에 성사된다고 보기 어렵다. 개헌은 지나치게 집중돼 있는 권력의 분점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권력 집중의 완화나 제3지대 중간층의 이해가 대표될 때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해소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 공동체의 복원으로 연결될 것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그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기에는 한국의 정당 체제가 너무 허약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비정규직의 완화, 노동자 계층의 고소득층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완화를 통한 공존은 결국 정치가 그 물꼬를 트게 해야 한다. 비례대표의 확대도 좋은 방안 중 하나다.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는 분명 고유한 영역이 있다. 그러나 두 권력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현실에서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인식이 전제될 때 지속 가능한 발전이 담보될 수 있다. 이는 사회·경제적 먹이 피라미드에서 상위에 포진하고 있는 계층에게도 이익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계급의식의 발현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또한 정치의 몫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는 이를 준비할 철학과 지성, 양식을 가지고 있을까. 불행히도 이에 대한 해답은 부정적이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고 지지층을 확보하는 것은 정치의 본령이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들이 각자의 지지층을 위해 분명한 이념적 정체성을 나타내고 각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의 공정한 경쟁이 담보될 때 정치는 제 본령을 찾아간다. 정치가 온전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경제·사회·문화·환경·안보·복지 등 모든 분야가 건강해질 수 없다. 대의제 국가에서 기본적인 정책은 입법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정당의 모습도 바뀌어야 한다. 산업화 시대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정파적 정당과 이념에만 집착하는 정당 체제로서는 세계적 추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제 구조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후기 산업화·세계화·정보화·탈냉전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당 구조로의 변화가 절실하다. 그것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살리는 길이다. 정치권이 경제적 재도약을 위한 구조의 변화를 꾀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상대의 영역을 인정할 때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를 상징적으로 노정하고 있는 이른바 ‘갑질’과 ‘을질’의 불편한 진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은 노동 부문을 포함한 사회적 대타협을 모색해야 한다. 몇 번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역시 대타협을 지향하고 견인해야 할 곳은 정치권이다. 사회·경제적 대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할 역량과 의지를 정당 체제가 보여줄 수 있는가. 정치권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