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 수요 확대, 계 모임 만들고 복잡한 기능 ‘열공’

성공한 남성의 전유물이자 로망인 시계. 최근 몇 년 새 이 시계에 꽂힌 20, 30대가 늘고 있다. 수백~수천만 원, 높게는 억 단위의 초고가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분위기다. 오랜 시간 명품 시계 시장을 지켜 온 중·장년층 VIP에 더해 일명 ‘엔트리’라고 불리는 젊은 남성들의 움직임은 시계 시장의 빅뱅을 불러왔다.
[SPECIAL REPORT] 명품 시계 전쟁 ‘2030세대를 잡아라’
#경력 5년 차 직장인 김병철(32·가명) 씨는 남자 동료 5명과 함께 ‘시계 계’를 한다. 인생 첫 시계는 ‘제대로 된’ 것으로 사고 싶어 2년간 매달 40만 원씩 모으기로 했다. 가격대가 수백~수천만 원을 웃도는 제품을 단번에 구입하기가 부담 되기 때문이다. 김 씨는 계원들과 함께 한 달에 두어 번 모여 시계 기능을 공부하거나 인기 아이템 정보를 나눈다. 또 시내 주요 백화점의 명품 시계 매장을 수시로 찾는 등 트렌드 따라잡기에도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을 시덕(시계 덕후)이라고 소개하는 김도흔(34·가명) 씨는 ‘파네리스티’다. 이탈리아 시계 브랜드인 파네라이 애호가를 칭하는 말로, 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커뮤니티 이름이기도 하다. 김 씨는 회사원·연구원·전문직 종사자·학생 등으로 구성된 500여 명의 한국인 파네리스티 회원들과 주로 인터넷에서 시계 정보를 나누고 종종 지역별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 파네라이 제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명품 시계 시장이 변했다. 기존 하이엔드급(수억 원대) 시계의 주요 고객은 50~60대였는데, 최근 40대 성공한 사업가들이 속속 진입하고 있다. 1500만 원대 이하 시장에서는 20, 30대 엔트리의 진입이 숨 가쁘다. 세대가 다른 이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수용할 수 있는 제품은 각기 다르지만 목적은 똑같다. 시계로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명품 시계는 ‘기계식’ 시계다. 배터리가 아니라 태엽이나 손목의 움직임에서 동력을 얻는 시계가 그것이다.

수요자들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20, 30대 엔트리 세대는 패션에 눈을 뜬 남성들이 크게 몰렸다. 하지만 시계를 ‘예물’용으로 고르는 이들의 수요도 그에 못지않다. 다이아몬드 세트보다 시계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결혼을 앞둔 박아련(31·가명) 씨는 “잘 끼지 않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느니 비슷한 가격이면 매일 찰 수 있는 시계를,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며 “예비 신랑과 나는 철저하게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했다”고 말했다.


증여·상속·예물용으로도 인기
최상위 계층의 소비도 늘어났다. 한정판이라면 수억 원짜리라도 돈을 아끼지 않고 사는 컬렉터 수가 늘어난 것이다. 또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8%의 관세가 사라지면서 해외에서 즐기던 쇼핑이 한국으로 옮겨온 것도 한몫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증여·상속·뇌물 등 ‘검은 거래’ 수단으로 고가의 시계를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고급 브랜드나 한정판 같은 희귀 상품들은 시간이 갈수록 시계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환금성이 뛰어나다. 게다가 시계는 일단 매장에서 팔려 나가면 추적이 거의 불가능해 뒤탈이 없다. 이 때문에 고급 시계 브랜드들은 고객을 보호하기 위해 매매된 시계 내역 공개를 극도로 꺼린다. 명품 시계 시장은 은밀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VIP 행사를 열어도 진짜 VIP는 행사장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몰려드는 소비자들 덕분에 시계 수입 업체들과 백화점이 바빠졌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는 만큼 철저한 시장조사를 하는 이들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화점들은 브랜드 다양화에 시동을 걸었다. 롯데백화점은 최근 잠실에 문을 연 에비뉴엘 월드타워점 2층에 시계 브랜드만 총 28개(편집 숍 포함)를 구성했다. 매장 면적은 국내 최대 규모다. 브랜드별 단독 부티크 매장으로 구성해 고급스러움을 더한 이들 브랜드 가운데 국내 백화점에 최초로 입점한 브랜드(가가밀라노·유보트·린드 베들린)도 있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은 올 초 리뉴얼 작업을 진행하며 명품 시계 영업 면적을 약 3배, 입점 브랜드를 13개로 늘렸다. 신세계백화점과 갤러리아 백화점 역시 명품 시계 전문관을 늘렸다. 오명훈 롯데백화점 해외패션머천다이저(MD)는 “이미 글로벌 명품 시계 업체들이 한국을 주목했다. 지금 전 세계 5대 명품 시계(파텍필립·바쉐론 콘스탄틴·브레게·블랑팡·예거르쿨트르)가 다 들어와 있다. 이 밖에 국내에 들어온 명품 시계 브랜드는 30여 개가 넘는다. 얼마나 브랜드가 다양해졌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양현석 시계로 유명한 리처드밀은 아시아 최초 매장을 한국에 세웠다. 추신수 시계로 잘 알려진 로저드뷔는 전 세계 20개 매장 중 3개 매장을 한국에 냈다.
[SPECIAL REPORT] 명품 시계 전쟁 ‘2030세대를 잡아라’
얼마나 많은 브랜드 제품이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수치로 증명된다. 지난 4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바젤 월드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2013년 스위스 시계 판매액이 공개됐다. 총금액은 28조 원. 그중 한국이 사들인 금액은 6080억751만 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11.4% 증가한 수치다. 한국은 스위스 시계를 세계에서 열한째로 많이 구입한 나라로 꼽혔다.

지난 7월에는 한국의 명품 시계 수입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 자료에 따르면 지난 7월 명품 시계 수입액은 227억8500만 원이었다. 관세청이 월별 통계 자료를 집계한 2000년 1월 이후 최대치다. 2014년 1~9월 누적 수입액은 1481억3000만 원으로, 2014년엔 지난해 연간 수입액 1762억7000만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수입국은 스위스·중국·미국·프랑스·독일 등으로, 특히 스위스 제품 수입액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SPECIAL REPORT] 명품 시계 전쟁 ‘2030세대를 잡아라’
이렇게 한국 시장에 들어온 브랜드들은 각자의 경쟁력을 내세워 손님 모시기 전쟁에 들어갔다. 세계에서 몇 개 안 되는 한정판을 한국에 가장 먼저 선보이는가 하면 한국 소비자만을 위한 제품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인만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세운 곳도 있다.


너도나도 ‘귀한 물건’ 내놓고 치열한 경쟁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스는 약 7000만 원짜리 시계를 24개만 제작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먼저 제작된 ‘넘버 1’ 제품을 한국 시장에 보냈다. 파르미지아니 역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시계를 한국에 선보였는데, 약 30억 원에 팔렸다.

20, 30대에게 인기가 높은 태그호이어는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한 제품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다. 알 크기가 작은 시계를 선호하는 국내 소비자들을 위해 43~44mm에서 39~40mm로 크기를 줄인 제품이나 ‘예물’용 시계로 디자인이 서로 비슷한 남녀 세트 시계 등이 대표적인 예다. 마케팅 역시 한국인의 특성에 맞게 펼치고 있다. 온라인으로 신제품 정보를 가장 빨리 찾는 한국 소비자들을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와 모바일 홈페이지, 페이스북 등 온라인 ‘3종 서비스’를 동시에 진행한다. 태그호이어가 이런 마케팅을 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파르미지아니 홍보·마케팅 담당인 이현숙 템퍼스코리아 차장은 “소비자를 잡기 위한 시장 경쟁 매우 치열하다. 그간 명품 시장에는 볼 수 없었던 온라인 마케팅까지 해야 한다. 매장의 고급 서비스와 온라인 바이럴 마케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담당자들이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중국인 손님을 잡기 위한 마케팅까지 더해졌다.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은 업계에서 ‘큰손’으로 통한다. 한 관계자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중국인이 없으면 시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중국인의 바잉 파워가 대단하다. 이들은 세계 3대로 꼽히는 ‘바쉐론 콘스탄틴’ 브랜드를 가장 선호하는데, 가격이 수천만~수억 원에 달해도 척척 현금을 내고 가져간다. 중국에 똑같은 브랜드의 제품이 있지만 중국 시장에 대한 불신으로 한국에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대어를 낚기 위해 통역과 비서 역할도 해주고 시계를 사면 현금화할 수 있는 상품권도 주는 서비스를 한다. 그래야 재방문·재구매가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중에는 구매 대행, 일명 ‘보따리장수’도 늘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인 보따리장수와 면세점 명품 매장의 대량 거래는 이쪽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중국이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는데, 관세가 대수냐. 뒤를 봐주는 이들이 있어 걱정 없이 들고 나간다”고 말했다.

명품 시계 붐은 국내 시계 매출 성장을 견인했다. 지난해 백화점들의 고급 시계 매출 신장률은 불황 속에서도 롯데 14.6%, 현대 31.5%, 신세계 11%, 갤러리아 13%에 달했다. 수입 잡화 브랜드가 매출 하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때 시계만큼은 성장 가도를 달린 것이다. 2009년부터 꾸준히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 온 만큼 미래도 밝다.

IWC·바쉐론 콘스탄틴·반클리프&아펠·까르띠에 등 브랜드를 보유한 리치몬트코리아는 2012년(매출 2432억 원) 이후 최근 3년간 해마다 1000억 원 안팎으로 판매가 폭증해 지난해 외형(매출 4139억 원)이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오메가·브레게·블랑팡·티쏘·해밀턴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스와치그룹코리아 역시 지난해 매출이 2156억 원으로 전년(매출 1538억 원) 대비 40.1%나 늘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07억 원으로 2년 전보다 네 배 폭증했다.

하지만 20, 30대들의 명품 소비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20, 30대들이 무리하게 수입 자동차를 샀다가 유지비가 감당 안 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카푸어족’이 연상돼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명품 시계 시장이 성숙기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오랜 시간 우리는 명품이라고 하면 샤넬·루이비통이 전부고 이 브랜드 제품을 들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사람들은 보여주기 식의 사치품 쇼핑은 이제 삼류라고 생각한다. 시계 시장은 아직 샤넬만 좇던 과거 시절에 와 있다. 아직도 다수가 롤렉스를 먼저 찾는다. 가격이 높고 낮음을 떠나 자기만의 개성과 가치를 담은 브랜드가 진짜 명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돋보기
한국, 명품 시계 없지만 명품 부품은 있다?
명품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철저한 명품 ‘소비족’일뿐이다. 명품의 본고장인 유럽은 물론 미국·일본 등이 세계 명품 시장을 놓고 자국 브랜드로 맹활약하고 있지만 한국은 유독 명품 분야만큼은 힘을 쓰지 못한다. 물론 로만손·아르키메데스 등의 한국 시계 브랜드도 있다. 스위스 바젤 박람회에도 참가하며 명품 브랜드임을 피력하지만 한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디자인을 베낀 것 일색인데다 정통성도, 장인 정신도 없다”는 업계의 질책만 난무한다. 심지어 한국에서 만든 한국 브랜드 제품에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새기는 곳도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우려에서다. 이 때문에 한국 명품 시계 브랜드의 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엔 글로벌 명품 시계 브랜드를 만드는 숨은 조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가 선택한 자재 업체들이 그 주인공이다.

대전에 있는 남선기공은 지난 10월 22일 국내 최초로 스위스 시계 브랜드인 피아제사와 시계 가공기 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 동종 업계 최고로 꼽히는 독일 헤믈레와의 치열한 경합 끝에 초정밀 시계로 유명한 피아제에 고속 5축 가공기 ‘SPHINX-5X/30’을 수출하는 판매 계약을 했다. SPHINX-5X/30은 임플란트, 시계 부품, 항공 부품 등 초정밀 가공에 사용되는 제품으로 성능이 우수해 해외 유수 업체들과 경쟁하고 있는 제품이다.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피아제가 속한 리치몬트그룹 내의 타 브랜드(태그호이어·까르띠에 등)에도 제품 공급이 이뤄질 전망이다.

세라믹 시계 특화 기업인 에코시계는 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그룹에 속해 있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 위블로에 세라믹과 실리콘 등을 납품한다. 위블로 시계 베젤(테두리)에 사용하는 소재들로, 시계의 얼굴인 셈이다. 에코시계는 지난 1월 박근혜 대통령이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위블로와 세라믹 신소재 핵심 부품 개발 협력 의향서를 맺고 향후 10년간 5000만 달러 규모의 세라믹 신소재 핵심 부품을 개발해 공급하는 장기 계약도 체결했다. 에코시계는 스위스 시계 명가인 스와치그룹 브랜드인 라도에도 고가의 세라믹 시곗줄과 케이스 등을 공급한다.
[SPECIAL REPORT] 명품 시계 전쟁 ‘2030세대를 잡아라’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