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만에 40% 하락, 걸프 산유국은 미국 겨냥한 치킨게임 불사

[‘디플레 역풍’의 진실] 30년 만의 공급과잉…OPEC ‘사분오열’
지난 11월 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는 세계 에너지산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이날 OPEC는 시장이 대체로 예상한 대로 하루 생산량 3000만 배럴의 기존 쿼터(할당량)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OPEC 회원국의 하루 생산량은 사우디아라비아 950만 배럴, 이라크 330만 배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280만 배럴, 쿠웨이트 270만 배럴, 베네수엘라 250만 배럴, 나이지리아 190만 배럴 등 기존 쿼터인 3000만 배럴에 비해 약 40만 배럴을 웃도는 수준이다.


OPEC, 감산 합의 실패 충격
OPEC의 ‘감산 백지화’는 끝 모를 유가 하락세에 불을 지폈다. 지난 5개월 동안 국제 유가는 40% 가까이 미끄러졌다. 그러자 원유 생산으로 자국 경제를 지탱하는 몇몇 OPEC 회원국들의 재정은 위기 수준으로까지 몰렸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 재정 건전성이 양호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감산 계획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시장은 당장 유가 하락으로 반응했다. ‘쿼터 유지’ 발표 직후인 11월 28일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65달러에 거래되며 하루 만에 10.5% 급락했다. 지난 6월 말의 배럴당 105달러와 비교하면 가격 하락 폭이 37%에 달한다. 12월 3일 종가 기준으로 WTI는 배럴 당 67.38달러, 두바이유는 67.06달러, 북해산 브렌트유는 69.92달러로 주저앉았다. 2011~2012년 최고점에 비하면 50% 가까이 폭락했다.

OPEC는 석유 생산을 주도하는 산유국 중 12개국이 모여 만든 일종의 생산·가격 조정 카르텔이다. 1950~1960년대에 들어서자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고 당시 ‘세븐 시스터즈(7 Sisters)’로 불리며 국제 원유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메이저 석유 자본(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산유국 협의체가 바로 OPEC다. OPEC는 이후 원유 생산량 조정을 통해 국제 유가를 주물러 왔고 1980년대의 글로벌 호황, 한국·중국 등 신흥국 경제의 도약 등을 바탕으로 꾸준히 유가 상승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이번 총회를 통해 회원국 간의 카르텔이 깨질 조짐이 보이며 사상 처음으로 OPEC의 권위가 실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유가 급변동 시기마다 생산량 조절을 통해 국제 유가를 조정해 온 OPEC가 가격 방어 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국제 유가와 에너지 시장을 둘러싼 환경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디플레 역풍’의 진실] 30년 만의 공급과잉…OPEC ‘사분오열’
원유를 중심으로 한 국제 에너지 시장의 변화의 핵심은 30년 만에 찾아온 ‘공급과잉’에 있다. 현재 시장에선 OPEC가 정한 하루 생산량 한도인 3000만 배럴보다 약 1000만 배럴, 많게는 2000만 배럴이 더 생산된다고 추정한다. 공급과잉을 불러온 건 OPEC를 제외한 산유국, 즉 비OPEC 국가들의 생산량 증대 덕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급 증가를 이끌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원유 공급 증가는 세계 원유 증가분의 63.2%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셰일오일 혁명’의 중심에 서있다. 셰일오일은 진흙이 오래 시간 쌓여 굳어진 셰일 암석층에 녹아 있는 기름을 말한다. 지하 깊은 곳에 넓게 산재해 있다 보니 수직으로 파이프를 꽂아 시추하는 전통적 채굴 방식으로는 생산이 어려웠다. 돈 되는 기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를 뽑아 올릴 기술력이 부족했고 어렵게 시추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잊혔던 셰일오일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떠오른 건 1990년대 중반 들어서다. ‘셰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석유 재벌 조지 미첼이 새로운 시추 방법인 ‘수압 파쇄(fracking)’ 기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과 기름, 모래와 화학약품 등을 섞은 혼합액을 고압으로 분사해 셰일을 부수며 오일과 가스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다. 현재 셰일오일은 미국 석유 생산량의 45%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2006년에 하루 평균 생산량이 31만 배럴에 불과했던 셰일오일은 2013년 들어 348만 배럴로 급증했다. 이는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4%에 해당하는 양이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미국의 셰일오일 매장량은 580억 배럴에 달한다. 러시아(750억 배럴)에 이어 세계 둘째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2~3년 안에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산유국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세계 석유 수입량에 대비한 미국의 석유 수입 비중은 2005년 26.4%에서 지난해에는 17.3%로 급감했다. 미국이 에너지 수입국에서 공급국으로 변신하고 있다는 증거다. 만약 미국이 원유 수출을 재개한다면 국제 유가 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이 확실하다.

유가 하락을 둘러싼 기존 강자(OPEC)와 신흥 세력(셰일오일 등 비OPEC 국가)의 싸움은 치킨게임으로 번진 양상이다. 당분간 감산은 없다고 결정한 OPEC의 결정은 다분히 미국의 셰일오일을 포석에 둔 결정이다. 알리 살라 알-오마이르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11월 27일 OPEC 총회 후 “배럴당 100달러든, 80달러든, 60달러든 어떤 시장 가격도 받아들이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보고서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 국가들의 배럴당 원유 생산원가가 27달러 정도라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 셰일오일의 생산 비용은 지역마다 다양하지만 적게는 30달러, 많게는 80달러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EIA 분석에 따르면 평균 45달러 안팎이다.


세계 석유 소비 증가율 0.8% 그칠 듯
OPEC의 셈법은 간단하다. 기존 생산량을 유지해 원유 생산원가를 45달러 선까지 떨어뜨리면 미국 셰일오일 기업들이 도산에 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내 셰일오일 기업 중에서 사업 철수를 고려하거나 내년도 자본 지출, 즉 설비투자 지출을 낮추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OPEC는 셰일오일 고사 작전에 성공하면 ‘공급과잉’ 문제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IA는 하루 원유 소비량이 7700만~7900만 배럴이라며 셰일오일 공급이 중단되면 세계 원유 생산량은 7300만 배럴로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시 공급 부족 사태가 오면 추락한 유가는 자연스럽게 100달러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는 게 OPEC의 계산다.

수요 측면에서도 유가 하락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 위기 직전까지의 세계 석유 소비는 브릭스(BRICs)를 중심으로 한 신흥국 시장의 높은 경제성장에 힘입어 꾸준히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세계 석유 소비는 연평균 1.6%를 기록했다. 위기 때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2010년 들어 위기에서 벗어나자 다시 3.3%의 높은 증가세를 회복했다. 하지만 2011년 들어 세계 석유 소비는 1.0% 초반으로 급락했다. 올해는 아예 1%의 벽이 무너져 0.8% 증가하는 데 그칠 전망이다.

전 세계 ‘에너지 블랙홀’로 불리는 중국의 경기 불황 역시 수요 감소를 이끄는 요인이다. 영국의 에너지 연구 기관인 우드 매켄지는 보고서에서 “2005년 하루 250만 배럴이던 중국의 원유 수입량이 2020년에는 하루 920만 배럴로 뛸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정책 이후 매년 10%의 고성장을 유지해 오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2012년 들어 7%대로 떨어졌다. 최근 중국의 원유 수입이 큰 폭으로 늘고는 있지만, 이는 유가 하락을 틈탄 사재기 성격이 짙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12월 1일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11월 제조업구매관리자지수(PMI)는 전월 대비 0.5% 포인트 하락한 50.3을 기록해 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에너지의 ‘탈(脫)석유화’도 유가 하락을 부추기는 주요인이다. 셰일가스 혁명, 그에 따른 전기 생산 단가 하락,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의 발전은 석유에 의존했던 산업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있다. 전기차·수소연료전지차 등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그린 카 열풍도 석유 수요를 줄이는 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국은 2005년 전체 에너지 수요에서 원유와 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40.3%, 22.5%였다. 하지만 2013년 들어서는 각각 36%, 27.3%로, 원유는 줄고 가스는 늘었다. 두 대표 에너지원의 수요 비중 차가 8.7%까지 떨어진 것은 집계가 시작된 1980년 이후 처음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