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서 창조경영까지 고비마다 새 화두, 사장단 위상 높아져

[대한민국 신인맥(1)] '제일모직' 재무라인 전성기…구조조정본부 거쳐 CEO로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을 전후로 세계는 큰 패러다임 전환을 겪고 있었다. 1980년대는 변화의 시대로 불렸다. 불확실성의 시대, 위기의 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정보혁명이 막 시작되던 때다. 인적자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회장 취임 이후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첫째, 자율 경영. 둘째, 기술 중시. 셋째, 인간 존중의 경영 이념을 강조했다. 앞선 50년은 인재 제일 경영의 위력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인재와 교육을 강조한 경영 철학이 삼성의 성장 기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관리의 틀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인재가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이건희 회장의 판단이었다. ‘저 훌륭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니 다 회장 얼굴만 보고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회장이 앞에서 길을 보여주면 직원들이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도전·창조 등의 가치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가르치고 목표를 세우고 관리하고 챙기면 된다고 강조한 반면 아들은 변화의 시대에서는 창의적·도전적인 인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사장들에게 경영을 맡길 테니 내게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하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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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구상은 ‘삼각편대’였다. 이 회장 자신이 큰 방향을 잡고 비서실이 세부 전략을 마련하고 각 계열사가 이를 실천하는 구도였다. 이 회장은 부회장 시절부터 힘의 균형이 과도하게 비서실에 쏠려 있다고 지적했고 1991년 200명 규모에서 130명으로 대폭 축소했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대 회장은 경영권의 80%를 쥐고 비서실이 10%, 각 계열사 사장이 10%를 나눠 행사하도록 했지만 나는 앞으로는 회장이 20%, 비서실 40%, 계열사 사장이 40%를 행사하는 식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비서실장의 잇단 교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리의 삼성’은 유효했다. 관리통들은 인사와 예산을 통제하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회장의 발언에 녹아 있는 강조점을 따로 분리해 필요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앉히고 예산을 배분했다.

이미 관리의 틀에서 교육 받아 성장한 리더들이었기에 사장들 또한 체질이 관리 문화에 적응돼 있었다. 자율 경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사장들은 매일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회장님이 하라고 한 게 없느냐”고 체크했다.

그 시절 삼성의 정체기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까’ 고심하던 중 1993년 6월, 드디어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는 ‘신경영’의 기치를 들었다.

‘다 바꾸라’는 개혁은 기존의 판을 완전히 뒤집는 혁신이었다. 이건희 회장 체제로의 완전한 전환이었다. 비로소 삼성의 힘의 중심추가 서서히 옮겨지고 있었다. CEO의 부상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50년 전통이 한 번에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 대신 CEO들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 놓았다.

‘콩 놔라 팥 놔라’ 하던 문화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경영 성과로 판단 받는 문화로 바꿨다. 또한 사장들이 비서실 눈치를 보는 폐해를 막기 위해 비서실 중심으로 회장의 지시 사항을 관리하던 문화에서 관리본부장들을 내보내고 젊은 층으로 ‘세대교체’했다. 명실 공히 CEO 중심 체제로 바꾸기 위한 조치였다.

이건희 회장은 또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전통인 관리의 삼성 바탕 위에 ‘전략의 삼성’을 주문했다. 회장이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시스템으로 알아서 움직이는 삼성, 삼성의 DNA가 계속 확산되는 그런 그룹을 꿈꿨다.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과거와 다르게 ‘기획통’, ‘전략통’이 새로운 키워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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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이후 첫 비서실장은 현명관 삼성건설 사장이었다. 현 실장은 행정고시와 감사원을 거친 후 호텔신라 부사장으로 입사한 케이스로, 삼성 공채 출신이 아닌 현 사장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공채 출신만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던 그간의 전통을 깨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부 관리통이 아닌 외부 감사통이라는 점에서 파격이었다. 현명관 비서실장의 임명은 경영진 세대교체의 출발점인 동시에 신경영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1993년 말 신경영 실천을 위한 정기 임원 인사를 통해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비서실에는 깜짝 놀랄 만한 인사가 있었다. 대대적인 축소 통합과 함께 각 팀의 책임 임원을 기존의 전무급에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이사급으로 대폭 교체했다. 또한 비서실 인사팀장에 황영기(현 금융투자협회장) 당시 재무팀 국제담당 이사를 발탁했다.

오래 근무한 인사 팀원들도 대폭 물갈이했다. 황 팀장은 국제 금융통으로 분류되며 한 번도 인사 관련 업무를 한 적이 없다. 그는 파격적인 인사 기준을 도입했는데, 인사 업무 경험이 없는 사람, 해외 업무 경험자, 이공계 출신 등 세 가지를 신규 인사팀원 선발 기준으로 제시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관리의 삼성 하에 전통적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왔던 인사와 재무 라인들이 떨고 있었다.

신경영 이후 삼성은 급성장을 거듭했다. 1996년 삼성 매출은 72조원으로,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의 17조4000억원의 네 배로 늘어났다. 연평균 17.2% 증가율로 같은 기간 한국의 국민총생산 GDP가 연평균 8%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큰 폭의 성장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조 단위 경상이익을 올렸다. 매출을 끌고 가는 주체는 삼성전자였다. 전자의 CEO들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1997년 사상 초유의 외환 위기를 맞으며 기업들에 구조조정의 파도가 몰려온 것. 외환 위기의 충격은 신경영으로 체질을 개선한 삼성에도 여지없이 몰아쳤다.

1998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그해 신년사에서 이건희 회장은 또 하나의 경영 키워드를 제시한다. ‘상시 위기 경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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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주도한 재무통 ‘각광’

이 시기에 등장한 또 한명의 입지전적 인물은 이학수(1996~2008년 비서실장) 부회장이다. 지금까지도 삼성그룹 역사상 10년 이상 2인자 자리를 지킨 이는 소병해와 이학수 두 명뿐이다.

전통 엘리트 재무통인 이학수 부회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당시 구조조정에 기여하면서 삼성의 도약에 기여했다. 이 실장은 재무 특성을 살려 IMF 과정에서 삼성 내 사업 조정과 투자 조정 등에 기여했다.

이병철 시대의 핵심 인맥을 이병철-소병해로 요약한다면 이건희 회장 시기는 이건희-이학수로 연결된다. 이학수 실장 체제에서 비서실은 1998년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학수 실장은 IMF 과정에서 삼성 내 사업 조정과 투자 조정 등을 주도했다.

외환 위기가 터진 1997년부터 이를 수습하는 1999년까지는 성과주의 인사로 요약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통해 그룹이 생존을 모색하고 있을 때 이를 뒷받침하는 재무적 성과에 집중하는 시기였다. 모든 경영 평가는 이익을 얼마나 냈는지에 맞춰졌다.

이때 연봉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보상 체계도 차별화됐다. 상시 구조조정 체제에서 재무 인력이 회사의 고속 성장을 이끌다 보니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이때부터 ‘재무통’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특히 ‘제일모직 경리과 라인’이 유명했다. 당시 재무통들은 일종의 로열 코스를 거쳤다. 공채→제일모직→구조조정본부→CEO가 대표적인 출세 경로였다. 이학수 부회장이 걸은 그 길이었다. 삼성에서 출세하려면 구조조정본부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구조조정본부 팀장→계열사 사장으로 이어지는 패턴이었다.

특히 ‘이학수-김인주-최광해’로 이어지던 전략기획실 3인방이자 재무 라인이 유명했다. 많은 계열사 중 제일모직 경리과인 이유는 1960~1970년 당시 제일모직이 그룹의 핵심 회사여서다. 이곳으로 인재들이 모였다.

이와 함께 제일합섬 경리과 출신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김인주 삼성선물 전 사장과 최광해 삼성전자 전 부사장, 최도석 삼성카드 전 부회장, 배호원 삼성정밀화학 전 사장(제일합섬 경리과), 유석렬 삼성카드 전 대표, 제진훈 제일모직 전 사장 등도 모두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의 대표적인 재무통들이다.

그 사이 세기가 바뀌고 있었다. 외환 위기 시대가 저물고 2000년대 전후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가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이었다. 디지털 혁명이 전 세계에 일고 있었다.

2000년 신년사를 통해 이건희 회장은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전략이자 경영 방침으로 디지털 경영을 선언했다.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10년 후 20년 후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는 ‘핵심 인력’에서 해답을 찾았다.

“디지털 시대는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리로 싸워야 하는 두뇌 전쟁의 시대”라는 설명이었다. 또한 ‘기술 인재’를 우대하고 기술통인 황창규-임형규-이기태-이상완 사장 등을 삼성전자의 CEO로 발탁했다.

여전히 재무 라인들이 당시 삼성 수뇌부의 핵심이었다. 단적으로, 2005년 인사에서 삼성의 사장단 50여 명 중 20여 명이 구조본 경력을 갖고 있었다. 2005년 삼성전자 등기 임원 총 5명 중 3명(이학수-최도석-김인주)이 재무통이었다.

2015년 현재 3명(권오현-윤부근-신종균)의 등기 임원이 모두 기술 라인인 점과 확연히 비교된다. 계열사 사장단 또한 구조조정본부 출신과 재무 라인이 휘어잡았다.

제일모직에는 이학수 라인으로 분류되는 제진훈 대표가 있었다. 삼성전자의 지분을 들고 있는 핵심 관계사인 삼성생명에는 비서실장 출신의 이수빈 회장이 있었고 삼성물산에는 역시 비서실장 출신의 현명관 회장과 비서실 출신의 이상대 사장이 사령탑이었다.

이 밖에 구조본 사람들은 특히 화학계열 CEO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삼성전자와 일부 금융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의 사장단 자리는 이들의 몫이었다.

관리의 삼성은 이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2006년 초 이건희 회장은 ‘창조경영’을 주창하고 나왔다. 성실하고 철저한 일처리와 회의 문화를 자산으로 ‘빠른 추격자’였던 삼성은 세계 초일류, ‘시장 선도자’로의 변모를 시작한다.

창조적 S급 인재 확보와 육성을 위한 조직 문화의 일환으로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과 자율 근무제를 도입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구글캠퍼스처럼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도 좋은 일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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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CEO’최지성, 미래전략실장으로

구조조정본부는 2006년 전략기획실로 재편됐다가 2008년 삼성 특검을 거치며 해체되기도 했지만 2010년 미래전략실로 다시 출범했다. 2008년을 기점으로 위세를 떨치던 이학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미래전략실장으로 김순택 실장 시대가 열렸다.

김순택 실장도 과거 현명관 실장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과거부터 그룹 내 신사업을 담당한 기획통 김 실장은 이학수 본부장의 유일한 대항마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건희 회장이 김 실장을 아껴 놓았다가 그를 앞세워 이학수 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재무통과 단절하는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의 등장으로 뉴 컨트롤타워로 기획통이 뜨는 것 같았지만, 그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최지성 부회장(2012년)에게 자리를 내줬다. 동시에 새로운 영업통의 부상을 알리고 있었다.

최 실장은 마케팅과 영업의 달인으로 불리며, 삼성전자 내에서 ‘반도체 교본을 통째로 외웠던 전설적인 사람’으로 통한다. 지금도 삼성 미래전략실장 자리를 지키며 이재용 시대의 새판 짜기의 중심에 서 있다.

최 실장은 삼성전자 CEO 출신이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미래전략실과 함께 삼성그룹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성공을 바탕으로 TV·디스플레이·스마트폰 등에서 연이어 흥행하고 그룹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면서 삼성전자의 경영진은 미래전략실 못지않은 세력으로 부상했다.

최 실장 체제를 맞게 되면서 삼성 인맥에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최 실장은 경리과 근처도 가보지 않았다. 비서실을 잠깐 거치긴 했지만 대부분이 영업 마케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삼성전자가 개발자들이 실세인 조직이라면, 기존에는 주변부 인맥이었던 최지성 실장이 미래전략실장이 되면서 큰 흐름을 바꿔 놓은 것이다. “미래전략실장 자리는 전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는 게 맞다”는 자체 평가로 인사 태풍이 일단락 지어졌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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