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김영란법 신풍속도 : 바뀌는 기업 홍보]
3만원 이하 맛집 리스트 만들고 등산 코스 개발
언론인 지원 사업 ‘올스톱’…주요 그룹 언론재단 ‘존폐위기’
화훼농가 어쩌나…골프 회원권 ‘애물단지’
(사진) 강북삼성병원 지하 3층 장례식장 표정. '김영란법' 시행 전인 지난 9월 26일 복도엔 조화로 가득했다(위). 김영란법이 시행된 첫날인 28일엔 썰렁한 표정이었다(아래). /서범세·김기남 기자

[한경비즈니스=김현기 기자 ]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400만 명에 이르는 법 적용 대상자들의 조심스러운 심리의 영향으로 지난 추석엔 5만원 이하의 선물 세트가 큰 인기를 끄는 이색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업 홍보실은 법 적용 대상자들과 실무에서 밀접한 관계로 얽혀 있는 만큼 법 테두리 안에서 이들과 친목을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물색하고 있다.

화훼농가들도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다. 동일인 경조사비를 10만원 한도로 제한함에 따라 축하 화환과 조화를 보내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승진 축하란을 보내는 관행에도 급제동이 걸렸다. 축하란도 선물에 해당하여 5만원을 초과하는 난을 보내면 문제가 되는 탓이다.
화훼농가 어쩌나…골프 회원권 ‘애물단지’
(사진) 국내 한 골프장에서 열린 골프 대회. /한국경제신문

◆골프 접대 금지…회원권 팔아야 하나

한 대기업 홍보팀 직원은 식사 상한액인 1인당 3만원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맛집 리스트를 작성 중이다. 가벼운 반주를 곁들여 먹을 수 있는 태국 음식점, 이탈리아 레스토랑 등이 목록에 올랐다.

이 관계자는 “점심 식사를 하듯이 가볍게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2차로 술집을 가는 대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누면 건강도 챙길 수 있어 이참에 다이어트도 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홍보실은 현행법상 골프가 금지돼 주말 골프 접대 대신 등산 코스를 계획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는 이상 원칙적으로 골프 접대는 허용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공식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적절한 등산 코스를 찾기 위해 팀원들이 직접 사전 답사를 다녀오는 수고마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접대비가 줄어드는 만큼 몸으로 때워야 할 판”이라고 푸념했다.

기업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골프장 회원권도 골칫거리다. 한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무기명 회원권은 사용자 여부를 알 수 없는 회원권이어서 접대용으로 많이 활용됐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골프 접대가 사라져 회원권 자체가 쓸모없게 돼 버린 것.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시행돼 어차피 제대로 사용할 일도 없어 굳이 비싼 회원권을 보유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처분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LG 등 언론장학재단을 운영 중인 대기업의 고민도 깊다. 이미 올해 진행된 건은 김영란법과 무관하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당장 내년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20년 넘게 언론인을 대상으로 해외 연수 사업과 저술 지원 및 특파원 어학 교육 등 지원 사업을 펼쳐 온 삼성언론재단은 9월 20일 자사 홈페이지에 ‘2016년 하반기 언론인 저술 지원’ 신청 대상자에서 현직 언론인의 접수는 잠정 보류한다고 밝혔다. 보류 사유는 하나다. 김영란법 때문이다.

김영란법 이전에는 기업에서 운영하는 언론장학재단을 통해 언론인들이 해외 연수를 갈 수 있었다. 앞으로는 기업 언론재단이 지원하는 해외 연수비용은 청탁금지법상 제재 대상에 해당할 수 있다.

삼성언론재단 관계자는 “일부 언론에선 재단이 폐지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아직 폐지를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며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추이를 지켜보면서 권익위의 해석이 맞는지 여부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급제동이 걸린 것은 해외 연수뿐만이 아니다.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도 제동이 걸렸다. 기업 홍보실 관계자들은 해외 박람회 취재 지원을 놓고 어떤 방식으로 초청 대상자를 선정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외 박람회는 최신 제품을 홍보하고 최고경영자(CEO)의 경영전략을 소개하는 자리인 만큼 기자 초청이 필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해외 행사에 기자를 초청하려면 모든 언론사에 동등한 출장 기회를 줘야 한다. 하지만 국내 한 대형 전자 업체에 출입 등록을 한 언론사는 500여 곳에 달한다. 모두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하면 전세기 2~3대를 띄워도 모자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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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차 시승식도 전면 중단

그동안 자동차 업계에 전반적으로 시행돼 온 신차 시승식도 잠정 중단됐다. 한 자동차 회사 홍보실 관계자는 “자사 출입 기자들과 일부 파워 블로거들을 대상으로 시행해 온 신차 시승식을 일단 중단할 계획”이라며 “상황을 지켜본 뒤 시승식을 계속 진행할지 말지 판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김영란법은 법 시행 전부터 달라진 신(新)풍속도를 자아냈다. 기업은 김영란법을 공부하기 위해 설명회를 갖고 대응 방안을 고심하는 등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9월 22일 김영란법 특별 세미나를 열었다. 전경련 법무팀 소속 변호사가 강사로 나서 김영란법의 헌법적 의의와 적용 대상, 수수 허용 금액, 이해 상충 방지 조항 등을 다루면서 발전 방향 및 위반 행위의 신고·징계·처벌 절차에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는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10대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김영란법 대응 방안 전국순회 설명회를 열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전국 설명회와 상담센터 등을 통해 수렴된 기업들의 질의와 답변을 정리한 가이드라인을 발간하는 등 기업들이 김영란법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우리 사회의 관행과 규범을 선진화하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삼성그룹도 김영란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자리를 가졌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그룹 사장단은 서울 서초동 삼성 서초사옥에서 9월 21일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 법무팀으로부터 법 시행에 따라 달라지는 점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법의 기본적인 취지와 내용에 대해 얘기를 들었고 과거에는 용인됐지만 법 시행으로 금지되는 사항들에 대해 주의할 점 등을 얘기했다”면서 “이미 사장단에서 공부를 많이 한 상태라 특별한 질문은 없었다”고 말했다.

henr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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