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 시멘트 산업의 역사]
1960~70년대 산업부흥 첨병…1990년대 이후 폐자원 활용 친환경 산업 진화
시멘트 산업, ‘새마을운동’ 촉매제…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
(사진) 한국시멘트협회 제공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한국의 시멘트 산업은 1960년대 경제개발 초기 전략산업으로 육성된 이후 발전을 거듭해 왔다.

시멘트는 산업 개발 및 주요 건설자재로 국토 건설과 산업부흥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시멘트 산업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발전이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국내 시멘트 산업은 폐자원을 재생에너지로 활용하는 친환경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시멘트

인류가 시멘트의 주원료인 석회를 처음 사용하게 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구석기시대에 불을 발견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아궁이로 사용하던 석회석의 표면이 빗물에 의해 소화 현상을 보이고 시일이 지나 굳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면서 석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신석기시대 유적지인 이스라엘 북부 입타엘과 요르단강에 자리한 제리코에서 석회 콘크리트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석회를 가공해 사용한 시점을 기원전 7000~8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시멘트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현존 구조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인류는 약 5000년 전 소석고(석고를 가열해 결정수를 일부 없앤 흰색 가루)에 물과 모래를 섞어 만든 모르타르를 피라미드의 석재를 접합하는 줄눈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2500년께 건설된 이집트 쿠퍼왕의 피라미드는 시멘트를 활용한 가장 오래된 구조물로 꼽힌다. 해당 구조물은 석회석을 구워 만든 생석회와 석고를 구워 만든 소석고의 천연 시멘트를 사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큰 변화를 보이지 못했던 석회 가공법은 18세기 들어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기계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인 존 스미턴은 1756년 영국 에디스톤 등대 재건 공사 과정에서 점토분을 함유한 석회를 구우면 딱딱한 성질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최초의 수경성 석회를 만들었다.

영국인 제임스 파커는 1796년 비슷한 방법으로 로만 시멘트를 발명했고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루이스 비카는 1818년 석회석과 점토질을 잘게 부숴 섞은 암석을 혼합·소성해 수경성과 강도가 높은 고품질 로만 시멘트인 천연 시멘트를 발명했다. 이 시멘트는 영국 템스강의 터널 공사 및 국회의사당 재건 공사에 사용됐다.

이후 1824년 영국의 벽돌공인 조셉 애스프딘이 이중 소성 방식을 이용해 로만 시멘트보다 품질이 우수한 포틀랜드 시멘트의 시초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845년엔 아이작 존슨이 석회석과 점토의 배합비율 및 소성 온도 등 시멘트 제조의 중요 조건들을 밝혀내면서 시멘트 제조학의 기반이 마련됐다.

한국에서 포틀랜드 시멘트가 처음 쓰인 시기는 110여 년 전이다. 1899년 준공된 경인철도(노량진~인천)에 포틀랜드 시멘트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석회질 시멘트는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조(條)에 나오는 ‘증토축성’에서 증토는 석회석을 섭씨 영상 800도 이상 고온에서 구운 생석회에 물·진흙·모래를 섞은 강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몽촌토성의 동쪽 성벽에서도 강회를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된 바 있다.
시멘트 산업, ‘새마을운동’ 촉매제…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
(그래픽) 윤석표 팀장

◆6·25전쟁 이후 국토 재건의 씨앗

한국의 시멘트 산업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씨앗이 되며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건설한 고속도로·다목적댐·산업단지·항만·공항 등 시멘트 산업의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한국은 유럽이 250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50~60년 만에 이뤄냈다. 시멘트 산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 한국은 국토 재건과 부흥을 위해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사용했다. 기존 두 개의 공장만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해마다 엄청난 외화를 들여 수십만 톤의 외국산 시멘트를 수입했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거대한 시멘트 공장을 속속 준공하면서 국내 시멘트 산업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지하자원도 시멘트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은 다른 자원에 비해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의 매장량이 풍부한 편이다. 경제 발전 초기 국가의 강력한 산업 육성 정책과 자원을 바탕으로 한국은 세계 5대 시멘트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10월 31일 쌍용 동해공장 준공식에서 “증산·수출·건설 붐을 일으켜 자립 경제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시멘트 공업 육성 발전은 긴급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며 “오늘날 시멘트 공업의 발전과 시멘트 생산량은 해당 국가의 산업과 문화를 측정하는 하나의 척도”라고 말했다.

시멘트는 한국의 주거 문화에도 영향을 줬다. 1961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서울 마포에 근대식 아파트인 도화아파트를 지으면서 한국에도 아파트 시대가 열렸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아파트 건설을 촉진, 정릉·홍제동·문화촌 등 소규모 아파트와 한남동 힐탑아파트·화곡동아파트 등의 고층 아파트를 탄생시켰다.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빌딩이 도심에 하나둘 들어설 무렵인 1970년대 초·중반 시골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면에서 나눠준 시멘트로 봉당을 새로 발랐고 새 화장실을 만들었다. 건넛마을과 연결하는 다리도 지었다. 시멘트로 만든 공동 우물과 빨래터는 시골 마을의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했다. ‘새마을운동’은 시멘트 산업을 통해 탄력을 받은 셈이다.

시멘트는 전국의 도로도 변화시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도로 포장은 아스팔트가 주를 이뤘다. 정유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아스팔트가 시멘트에 비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오일쇼크를 거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가격 경쟁력에서 아스팔트보다 시멘트가 우위를 점한 것이다.

특히 1980년대 들어 기존 4~5톤 트럭 대신 15톤 트럭이 국내 화물수송의 주력으로 등장하면서 아스팔트보다 튼튼한 시멘트 포장이 각광받게 됐다. 시멘트 도로의 수명은 20년 이상으로 아스팔트보다 3~4배 오래 간다.

아스팔트 도로로만 인식되던 고속도로에 시멘트 포장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 이유다.

1984년 6월 개통된 88올림픽고속도로는 한국 고속도로 건설 사상 최초로 전 구간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사례였다. 88올림픽고속도로 건설에는 총 40여만 톤에 해당하는 1014만4000포대의 시멘트가 소요됐다. 1985년에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을 시멘트로 재포장하는 사업이 추진되기도 했다.

국내 시멘트 기업들의 기술력도 일취월장을 거듭했다. 시멘트업계는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에 돌입해 댐이나 원자력발전소, 석유 및 액화천연가스(LNG) 기지 등 특수 목적의 대형 공사에 사용할 수 있는 10여 종의 특수 시멘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85년 경기도 평택 일대에 세워진 LNG 기지는 콘크리트 균열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특수 시멘트가 적용됐다.
시멘트 산업, ‘새마을운동’ 촉매제…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
(사진) 1967년 옛 동양시멘트 제3차 증설 공사 계약 조인식에서 고(故) 이양구(가운데 왼쪽) 동양그룹 창업자가 일본 미쓰비시 측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한국시멘트협회 제공

◆21세기 미래 산업으로 재도약

한편 세계적으로 환경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내 시멘트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폐자원의 재활용 등 에너지 자원의 다원화를 촉진하는가 하면 폐열을 제품 생산에 활용하는 지식 집약적 산업 구조로 바꿔 나가고 있다.

시멘트는 주원료인 석회석(80~90%)과 부원료인 점토·규석·철광석 등을 일정하게 혼합해 섭씨 영상 145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 만드는 제품이다. 이때 생산되는 가스의 온도는 섭씨 영상 2000도 이상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고온의 열을 굴뚝을 통해 대기 중에 배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에너지 절감과 온실가스 감축이 화두가 되면서 버려지는 열을 전기로 재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이디어는 현실이 됐고 시멘트업계는 폐열 발전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시멘트업계는 산업 폐기물과 부산물을 시멘트 원료 및 연료 자원으로 활용하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 오고 있다. 1990년대부터 폐타이어 등을 시멘트 제품 생산 연료로 활용 중이다.

한국시멘트협회 관계자는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은 시멘트를 통해 이뤄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한국의 시멘트 산업은 미래 지향적 21세기 산업으로 끊임없이 진화 중”이라고 말했다.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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