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중견기업의 고충은]
30년간 각종 지원에서 밀려…산업부 정리로 ‘제2의 도약’ 노린다
'둘째의 설움' 중견기업에 볕 뜰 날 올까
(사진)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5월 열린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한국경제신문)

(편집자 주/)한국의 경제구조는 소수의 대기업이 산업을 이끌고 그 아래 수많은 중소기업이 자리해 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대기업의 부담을 키우고 동시에 중소기업의 경제력까지 약화시킨다.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한국 경제는 새로운 동력을 발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른바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기업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2015년 기준 한국의 중견기업은 3558개로, 전체 기업의 0.1%에 불과하지만 한국 전체 고용의 약 5.5%(115만3000명)를 창출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홀대받아 온 중견기업에 대한 전략적 육성이 곧 경제성장과 직결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최근 중견기업계는 산업통상자원부로 주무 부처가 이관되는 등 변화의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정부 또한 중견기업을 내실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지난 30년간 흘려온 중견기업들의 눈물을 닦아 줄 때가 비로소 온 것일까. 한경비즈니스가 중견기업들의 고민과 함께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한경비즈니스=이명지 기자] 든든한 버팀목인 맏형과 챙겨줘야 할 막내 사이에 끼인 둘째. 한국의 중견기업이 놓인 위치는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국내 대기업이 만들어 내는 부(富)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8.8%를 차지한다. 비난을 받을 때도 많지만 대기업이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축이라는 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한편 중소기업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각종 지원을 받고 있다. 중소기업 성장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도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견기업은 늘 한 걸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업체를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은 중견기업을 늘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원한 사각지대는 없나 보다. 최근 들어 중견기업 성장에 관심을 갖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며 중견기업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둘째의 설움' 중견기업에 볕 뜰 날 올까
'둘째의 설움' 중견기업에 볕 뜰 날 올까
◆너무나 넓은 ‘중견기업’의 범위

중견기업이 처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중견기업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알아야만 한다.

중견기업특별법 제2조는 ‘중견기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산 10조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이 아니면서 중소기업기본법상 중소기업을 졸업한 기업. 또 업종별로 3년 평균 매출액이 400억~1500억원을 초과하는 기업, 또는 자산 총계 5000억원 이상인 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중견기업연합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의 중견기업은 3558개로, 한국 전체 기업의 0.1%를 차지한다. 개수는 적지만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중견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만 115만3000명으로, 전체 고용 인력의 5.5%를 차지하며 매출액은 620조4000억원으로 국내 기업 총매출액의 17.3%를 차지하고 있다.

성장치도 견실하다. 2015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출 실적이 전년 대비 각각 11.1%, 6.6%씩 감소한 반면 중견기업은 3.2% 증가했다.

소규모의 숫자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지만 그동안 중견기업은 소홀한 대접을 받아 왔다. 우선 중견기업에 대한 정의 자체도 모호하다. 중견기업특별법 제2조를 뜯어보면 중견기업은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기업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을 졸업한 후 대기업집단으로 편입될 때까지 중견기업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농심·동원·오뚜기 등 규모를 어느 정도 갖춘 기업부터 중소기업에서 막 벗어난 소규모 기업까지 ‘중견기업’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여 있다.
'둘째의 설움' 중견기업에 볕 뜰 날 올까
'둘째의 설움' 중견기업에 볕 뜰 날 올까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낀 수저 설움’

정의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곧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체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과 여러 가지 제도로 보호망을 갖춘 중소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이 미미하다는 것이 중견기업을 더욱 음지로 내몬다.

중견기업 관계자들은 중견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정거래·조세·판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개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대기업과의 격차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수익성과 임금수준, 노동생산성 및 연구·개발(R&D) 투자 등 전반적인 측면에서 대기업과 중견기업간의 격차는 벌어진다.

하도급 거래 구조상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원사업자 노동자의 임금이 100이라고 가정할 때 1차 수급 사업자 노동자의 상대 임금은 52.0%, 2차 수급 사업자 노동자의 임금은 50%까지 하락한다.

3차 이상 수급 사업자 노동자는 42.2% 수준에 불과하다. 범위가 큰 중견기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떨어진다는 점은 양질의 인력이 중견기업으로 수급되는 것을 막는다.

중견기업들은 조세 관련 지원법에서도 비켜 간다. 조세특례제한법의 세액공제 및 감면에서 매출액 3000억원 미만의 중견기업들은 연구 및 인력 개발을 위한 설비투자 세액공제 등에서
중소기업과 차등 대우를 받는다.

법인세법도 기업을 중소기업과 일반 기업으로 분류하고 중견기업을 일반 기업에 포함해 지금도 상대적으로 높은 중견기업의 법인세 실효 세율을 높이고 과세 형평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는 현재 중소·중견과 대기업을 구별해 이뤄지지만 중소기업 간의 거래는 과세에서 제외한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는 대기업의 편법 증여 또는 중소기업 보호 측면에서 논의돼 왔지만 중소·중견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됐고 그 결과 중견기업의 과세 부담이 더 커졌다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견기업들은 판매에서도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을 갖고 있다. 중소기업 제품 공공 구매 제도 중 ‘중소기업자 간 경쟁 제품 제도’도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중소기업자 간 경쟁 제품으로 지정되면 중소기업 이외의 기업(중견기업 및 대기업)은 3년간 해당 제품에 대한 공공기관 입찰 참여가 제한된다.

매출액 2000억원 미만이면서 3년간 중소기업 간 경쟁 제품 입찰 실적이 있는 일부 초기 중견기업들에 대해 참여를 허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는 기업은 극소수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또한 중견기업엔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에 적합한 업종을 지정해 대기업의 진출을 막아 중소기업들을 시장에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중견기업도 규제 대상에 포함돼 오히려 중견기업의 판로를 규제하는 성장 억제 정책으로 변질돼 버렸다.

상속 문제 또한 중견기업 창업자들을 울상 짓게 한다. ‘가업 상속 공제’는 중소기업과 매출액 3000억원 미만의 중견기업 중 사전·사후 요건을 충족한 기업만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2세 혹은 3세에게 가업을 잇게 하고 싶어도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내지 못해 주저하는 창업자들이 많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설움’을 무려 30년간 겪어 온 중견기업계에도 최근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가 ‘중소기업 정부’를 표방하면서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아 온 중견기업에도 ‘볕 들 날’이 오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움직임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중견기업 관련 정책을 지휘할 부서가 중소기업청에서 산업통상자원부로 변경됐다. 올해 7월 기존 중소기업청이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되면서 창업·소상공인·벤처·중소기업 관련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기존 중기청의 중견기업정책국은 산업부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당초 중견기업 관련 업무는 산업부의 몫이었지만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중견기업국을 중소기업청으로 이전시켰다. 중소기업청도 중견기업의 지원을 위해 힘썼지만, 주 관리 대상인 중소기업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4년간 상대적 소외를 겪어 온 중견기업들은 산업부로의 이관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마침내 그 숙원을 이루게 됐다.

산업부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중견기업 관련 업무를 진행 중이다. 산업부는 올해 9월 1일 ‘중견기업 정책혁신 범부처 태스크포스(TF)’ 출범 회의를 열었다.

TF는 산업 생태계, 글로벌 혁신, 산업·무역 융합 등 3개 실무 분과로 구성된다. 정부는 범부처 TF를 통해 유망 중소·중견기업이 글로벌 전문 기업으로 성장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새 정부 중견기업 정책 혁신 방안(가칭)’을 마련해 하반기 중 발표한다.

이동욱 산업부 중견기업정책관은 “중기부 등 관계 부처와 협력을 강화해 글로벌 강소·중견기업의 비율을 높이고 중견기업 정책과 산업·무역·통상정책 등과의 연계를 강화해 기업의 성장 단계별 맞춤형 지원 시책을 발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규모가 작은 중견기업들은 기존의 중소기업청이 주최하던 사업들이 무산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청은 성장 잠재력을 갖춘 중소 및 중견기업을 선정해 R&D, 해외 마케팅을 지원하는 ‘월드클래스300’ 외에도 세계 일류 상품 육성 사업과 R&D 성과에 따라 정부 자금을 인센티브로 지원하는 사업을 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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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할 수 있는 정책 마련돼야

중견기업에 마냥 소홀했다고 쓴소리를 가하기에는 정부도 억울한 면이 있다. 중견기업을 위한 정책이 ‘전무(全無)’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14년에는 ‘중견기업특별법’이 제정돼 중견기업에 대한 체계적인 법적 지원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 중견기업연합회에 따르면 중견기업을 위한 시책과 세부적인 정책 시행 근거, 지원과 육성 근거를 명시한 특별법을 만든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당시 중견기업연합회는 “특별법을 통해 기업 성장 단계별 맞춤형 지원책 강화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 나아가 한국 경제의 안정과 활력 회복의 계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중소기업청 또한 그동안 중견기업 성장 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 제정, 초기 중견기업 개념 법제화를 통한 정책 지원 확대, ‘명문 장수 기업’ 지정 범위 확대 등 여러 가지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소기업청은 상대적으로 중소기업 관련 업무에 치중돼 있다 보니 의도치 않게 중견기업 업무에 관심을 기울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주무 부처의 변화로 중견기업들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있는 상황이다. 중견기업연합회 또한 공정거래위원장 간담회, 일자리지원회 정책 간담회 등에 적극 참여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7월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기존 중견기업 관련 정책은 중소기업 지원 범위의 확대에 머물렀다고 지적하며 글로벌 전문 기업으로서 중견기업 성장을 이끌 ‘중견기업 육성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중견기업들 또한 무조건적인 지원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등 향후 도래할 새로운 산업 환경 변화에 발맞출 준비를 하고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구축해야만 한다.

강호갑 회장은 “중견기업은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정부의 핵심 정책 파트너로서 대한민국 대전환의 구심점 역할을 적극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중견기업들의 각오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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