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대기업과 중기 사이, 중견기업의 활로는? : 신발 속 돌멩이①-조세]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한국 경제의 허리’ 중견기업이 ‘피터팬 증후군’을 호소하고 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고 나면 그 많던 지원이 사라지고 수많은 규제가 이들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중소기업으로의 회귀를 검토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중견기업은 총 1036개 중 6.9%인 71개다.

이들은 “한국에서는 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불리하다”며 “성장 의욕이 위축된다”고 호소한다. 중견기업을 옥죄는 신발 속 돌멩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첫째는 ‘조세 부담’이다.

◆가업상속공제 요건 강화

#. “평생을 일군 회사인데…. 지금은 차라리 회사를 팔아 현금으로 줘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경기도 안양시에서 제조업체를 운영 중인 창업 1세대 A씨.

그는 최근 가업 승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를 중견기업 반열에 올리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승계 문제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죠. 그런데 (지분)상속세로 50%를 내야 하고 여기에 30% 가산세까지…. 상속세로만 지분 매매가의 65%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가업 승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최근 중견기업 창업 1세대의 고령화가 본격화되면서 A 씨와 같은 고민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가업 승계에 따른 조세 부담으로 승계 작업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에 따르면 2016년 6월부터 9월까지 설문에 참가한 중견기업 1036개 중 78.2%(약 810개)가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가업 승계를 이미 진행한 기업은 14.1%, 가업 승계를 계획하고 있는 곳은 7.7%에 불과했다.
가업상속 조세부담에 일감몰아주기까지…'피터팬증후군' 앓는 중견기업
‘78.2%.’ 과반인 중견기업들이 가업 승계를 사실상 포기한 이유는 상속세 등의 조세 부담 때문이다. 현행 상속세 규정엔 최대 주주는 최고 실효 세율이 상속 자산의 50%에 30% 할증까지 더해 최고 65%의 세율을 부과하고 있다.

이에 따라 810개 중견기업의 경영자 72.2%가 가업 승계의 최대 걸림돌로 상속·증여세 조세 부담을 꼽았다. 이들은 복잡한 지분 구조(8.8%)와 엄격한 가업 승계 요건(5.6%) 또한 넘어야 할 산이라고 덧붙였다.

국내에서도 중견기업의 조세 부담을 덜기 위해 ‘가업상속공제’란 조세 지원책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해당 제도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던진다.

직전 3개년도 평균 매출액이 3000억원 미만인 중견기업 중 사전·사후 요건을 충족한 기업만 공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기업 수가 매우 적다는 지적이다.

관련 법에 따르면 피상속인은 가업 10년 중 5년 이상 대표이사로 재직해야 하며 상속인은 상속 개시일 전 2년 이상 직접 가업에 종사하는 등의 요건을 따라야 한다. 또한 가업 상속 후에도 10년간 정규직 노동자 수, 상속인의 지분 등 사후의무 요건을 이행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최근 정부는 중견기업의 가업상속공제의 요건을 보다 강화했다. 납부 능력 요건을 신설하고 공제 한도를 축소 조정한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8월 2일 발표한 ‘2017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2019년 11월부터 중견기업 가업 상속인의 가업 상속재산 외 상속재산이 상속 세액의 1.5배보다 많으면 가업상속공제 적용을 배제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선 내년 11월 이후에는 500억원의 공제 한도를 받을 수 있는 가업 영위 기간도 20년 이상에서 30년 이상으로 조정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목표였던 가업상속제도의 취지를 살리고 과세 형평성을 실현한다는 이유에서다. 그 대신 정부는 납세 부담을 덜기 위한 취지로 가업상속공제를 받지 않아도 연부연납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줄곧 가업상속공제의 대상 확대를 요청해 왔던 중견기업 경영자들은 당혹스러운 눈치다. A 씨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업 상속 공제 대상을 매출액 3000억원 미만 중견기업에서 중견기업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라며 “시장에서는 매출액 3000억원을 넘게 되면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출액 3000억원 이상의 중견기업 중에서도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기업 규모를 조절하는 방식을 계획하고 있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가업상속공제의 대상 확대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중견기업 육성을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중견기업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감안해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산하 중견기업연구원의 라정주 연구위원(연구책임자)은 2016년 펴낸 ‘가업 상속 과세특례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를 통해 “매출액 3000억원 이상 중견기업은 업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군으로 상속 문제가 발생해 경쟁자들보다 뒤처진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며 “가업상속공제 적용 대상을 3000억원 미만 중견기업에서 모든 중견기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가업상속 조세부담에 일감몰아주기까지…'피터팬증후군' 앓는 중견기업
◆일감 몰아주기 과세 강화

중견기업인들의 허리를 휘청하게 하는 조세 부담은 또 있다. 바로 특수관계법인 간 내부 거래를 뜻하는 ‘일감 몰아주기’다. 당초 일감 몰아주기는 재벌의 편법 증여 또는 중소기업의 보호 측면에서 논의돼 왔지만 “중견기업의 일감 몰아주기가 대기업보다 더 심하다”는 여야 및 시민 단체의 비판이 잇달아 중소·중견기업으로 규제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특히 8월 기획재정부의 세법개정안 이후 중견기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정부가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 증여 방지를 위해 지배 주주 등의 증여세 과세 대상 이익 계산 방법을 변경함에 따라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의 과세 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증여세인 ‘증여의제이익’은 기업의 세후 영업이익에 특수관계법인 거래 비율과 지배 주주의 주식 보유 비율을 곱해 산정한다. 이번 개정안은 중견기업의 특수관계법인 거래 비율에서 차감되는 정상 거래 비율을 종전 40%에서 20%로 낮췄다.

여기에 주식 보율 비율에서 차감되는 한계 보유 비율도 종전 10%에서 5%로 인하했다. 과세 대상이 되는 지배 주주의 이익 규모가 커지도록 해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증여세를 늘린 것이다.
가업상속 조세부담에 일감몰아주기까지…'피터팬증후군' 앓는 중견기업
그간 대기업의 그늘에 가려졌던 중견기업은 대책 마련에 비상이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올 상반기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대규모기업집단 이외 기업집단에서의 일감 몰아주기 사례’ 보고서에 이름을 올린 기업만 총 20개 그룹이다.

이 보고서는 국내 주요 중견기업인 동원그룹·농심그룹·성우하이텍그룹·한미사이언스·넥센그룹·풍산그룹·SPC그룹·대상그룹·오뚜기그룹·한일시멘트그룹·고려제강그룹·영원무역그룹 등 20개 그룹에서 일감 몰아주기 등의 의심 사례가 발견됐다고 분석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이 중 성우하이텍그룹과 에이앤엠의 내부 거래 비율은 111.97%, 농심그룹과 태경농산의 내부 거래 비율은 84.37%, 넥센그룹과 넥센L&C의 내부 거래 비율은 84.08%에 달한다고 꼬집었다.

중견기업의 한숨도 커졌다. 편법 증여를 목적으로 한 일감 몰아주기가 아닌 기술 경쟁력 제고나 원가절감 등을 위한 계열사 거래에 대해서도 증여세를 과세하는 것은 중견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경영 환경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우려가 터져 나왔다.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와 중견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는 근본적으로 (원인이) 다르다”며 중견기업의 정상적인 내부 거래에 대한 과세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내부 거래를 하는) 중견기업 중에는 대기업 납품을 위해 부도 위기에 놓인 2·3차 중간 유통 기업(벤더)을 인수하고 이들 기업을 통해 제품을 공급받는 곳까지 일감 몰아주기로 비쳐지고 있다”며 “업종별·산업별 차이가 없는 획일적 규제로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견기업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과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여야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공정거래 질서와 조세 형평성 확립을 목표로 중견기업도 일반 대기업과 동일하게 일감 몰아주기 과세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기재부 역시 올 10월 한 대학에 ‘일감 몰아주기 과세의 실효성 제고 등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정치권에 따르면 해당 문건에는 중소·중견기업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특례를 폐지하는 방안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 측은 “중소·중견기업 특례 폐지 등은 전혀 결정된 바 없다”고 반박했지만 “일감 몰아주기 과세의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맡긴 것은 맞다”고 밝혔다.
가업상속 조세부담에 일감몰아주기까지…'피터팬증후군' 앓는 중견기업
가업상속 조세부담에 일감몰아주기까지…'피터팬증후군' 앓는 중견기업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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