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1169호 (2018년 04월 23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김정은의 삶

[커버스토리 = 김정은 대해부]
- 판단력 좋고 머리회전 빠른 ‘스포츠광’…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잔혹함’도 가져

 
[한경비즈니스=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성장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소재다.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최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김 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 씨가 1973년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로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의 매우 드문 사진을 공개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고용희 씨는 ‘꽃다운’ 20세였다.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반할 청순함과 젊은 미모였다. 1962년 부모를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이주한 지 10년 만에 일본에 다시 와 공연했다.


(사진) 생모 고용희 씨와 어린 시절 김정은 위원장. /연합뉴스

고용희 씨는 김 전 위원장과의 사이에 김정철(1981년생)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 위원장(1984년생), 김여정(1987년생)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을 낳았다. 1976년 동거를 시작한 지 10여 년간은 정상적으로 결혼 생활을 했다.

김 전 위원장과의 원만했던 결혼 생활은 고용희 씨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사실상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유선암으로 치료를 받았고 2003년 암이 재발돼 사실상 완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고용희 씨는 아들 중 한 명을 김 전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성혜림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고(故) 김정남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과 그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2003년 9월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고용희 씨는 그해 프랑스 의료진이 극비리에 방북, 치료를 받은데 이어 2004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종양 및 뇌 관련 치료를 받았지만 그해 5월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 전 위원장은 고용희 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 전 위원장은 병 치료차 프랑스로 떠난 고용희 씨가 생각이 나 서로 사랑했던 시절 함께 들었던 ‘뒤늦은 후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도 있다.

1985년 ‘현이와 덕이’ 남매의 노래였던 ‘뒤늦은 후회’는 2018년 4월 2일 남북예술단 합동 공연에서 김 위원장의 신청으로 가수 최진희 씨가 불러 화제가 됐다. 아마 김 위원장이 생모 고용희 씨에 대한 생각으로 남한 가수에게 부모의 애송곡을 신청한 것으로 추론된다.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로 ‘조기 유학’

김 위원장은 봉건시대 때 궁궐에서만 자란 왕자처럼 평양에 있는 김 전 위원장의 관저와 전국 명승지에 있는 호화 초대소인 특각에서 주로 생활했다. 김 위원장의 생활을 7세 때부터 보아 왔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씨는 “왕자들(김정철·김정은)은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관저 내 전속 가정교사로부터 배웠고 그들에게는 학교 친구가 없었다.

두 왕자는 늘 함께 놀았고 이모님이라고 부르던 고용희 씨의 여동생인 고용숙 씨의 아들이 합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겐지 씨에 따르면 김정철 부부장과 김 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한자를 누군가에게 배웠다. ‘오하이요, 곤니치와, 곤방와’ 등 간단한 일본어 인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스위스 유학 시절 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남매를 돌봐준 외숙모 고용숙 씨와 남편 이강 씨는 “유년기 김 위원장은 운동을 열심히 했고 김여정 부부장은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증언했다.



(사진) 김정은 위원장(가운데)이 2017년 6월 13일 전 미국 프로농구(NBA) 출신 데니스 로드맨(오른쪽)과 NBA 출신 선수들의 농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김 위원장이 태어난 1980년대는 오랜 우상화 선전으로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 전 위원장은 절세의 위인이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을 학교에 보내면 수령의 자식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그러면 김 전 위원장이 심혈을 기울였던 우상화 사업에 차질이 예상됐다.

김 위원장을 학교에 보내면 수령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가 새나갈 수 있기 때문에 김 전 위원장은 자식들을 해외에 내보냈다. 김 전 위원장은 측근들에게조차 한동안 김 위원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1989년부터 13년간 김 전 위원장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처음이었습니다. 장군의 아들 두 사람은 간부들도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군이 지금부터 아들들을 소개하겠다면서 연회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간부들이 모두 장군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들들을 본 간부들은 전부 놀랐습니다.

당구대 옆에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형인 김정철 부부장, 동생인 김 위원장 그리고 그들 뒤에 부인 고용희 씨가 서 있었습니다. 아홉 살, 일곱 살의 아들들이 군복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모자를 딱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군님이 앞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경례를 딱 붙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김 전 위원장은 백두 혈통의 신비화와 우상화를 위해 김정철 부부장, 김 위원장, 김여정 부부장을 평양에서 교육시키지 않고 해외로 조기 유학을 보냈다. 우선 김정철 부부장이 1991년 파리를 거쳐 스위스 베른에 갔다. 이어 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도 1993년 이후 베른으로 갔다. 김 위원장은 1997년까지 스위스 베른에 있는 사립 국제학교에 다녔다.
 


(사진) 스위스 유학 시절 미국 뮤지컬 '그리스'에 출연한 김정은 (왼쪽) 위원장/연합뉴스

김 위원장은 베른 국제학교에 유학하던 첫해에 75일, 이듬해에는 105일을 결석했다. 베른 국제학교에서 김 위원장의 성적은 자연 과목이 6등급 가운데 3.5등급이었고 문화·사회·독일어 과목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어도 고급반에 들어갔다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보통반으로 내려갔는데 독일어보다 영어가 나았다.

정부 당국자는 “김 위원장의 영어 실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맞상대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전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2013년 미국의 은퇴한 농구스타 데니스 로드맨 선수와 만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코카콜라를 즐겼다는 뉴스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학과 체육은 꽤 잘했다. 학창 시절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고 여학생들에 대해서는 보통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심 이상의 것은 없었다. 김 위원장은 스위스 유학 시절 공부보다 일본 만화에 푹 빠졌었다. 특히 만화 중에서는 ‘포켓몬’을 제일 좋아했고 자기 주변인들에게 ‘포켓몬’을 꼭 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농구광이었다. 미국 NBA의 광팬으로 코비 브라이언트 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간직했다. 2013년 NBA 스타 데니스 로드맨 선수를 북한으로 초청해 미국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와 조선체육대 농구팀의 혼합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로드맨 선수는 2017년까지 북한을 다섯 차례나 방문했다.

김 위원장은 스위스 유학 시절에도 NBA 팀의 해외 친선 경기를 종종 보러 다녔고 김 전 위원장에게 NBA에 버금가는 대규모 농구장을 북한에 지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현대건설이 착공해 2003년 5월 평양에 완공한 1만2000석 규모의 류경정주영체육관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농구 경기를 할 때는 항상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 선수의 등번호 23번 유니폼을 애용했다.

2018년 4월 3일 남한 예술단과 태권도시범단의 평양공연 단장으로 북한에 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일국 북한 체육상과 면담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화와 체육이 먼저 교류를 해주면 좋지 않겠느냐’면서 특히 농구를 콕 집어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농구에 대한 애착이 ‘덕후’ 수준이다. 유학 시절 김 위원장의 단짝 친구였던 포르투갈 외교관의 아들 조엘 미카엘로 씨는 김 위원장이 공부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 ‘백두 혈통’ 정통성 위해 대학은 북한에서

김 위원장은 1998년부터 베른 리버펠트-슈타인 횔츨리 공립학교를 다니다 9학년이던 2000년 말 학교를 그만두고 평양으로 귀국했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 씨는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 전 위원장으로서는 더 이상의 해외 생활보다 평양에 돌아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은 평양의 백두 혈통에게는 불가사항이었다.

김 위원장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95~1998년 북한에서는 4년간 연속적인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했고 150만 명이 아사했다. 김 위원장은 귀국해 2002~2007년간 김일성종합대학과 군사종합대학을 수학했다. 실제로 그가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통성 있는 백두 혈통의 후계자로서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아버지 김 전 위원장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경력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제네바대를 다닌 이복형 김정남 위원장이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 기록이 없다는 것은 2008년 8월 김 전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된 후 진행된 후계 경쟁에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서방세계에 조기 유학으로 자본주의에 물들 것을 우려한 김 전 위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유학 생활 동안 외부와 자유롭게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김 위원장의 스위스 베른 집에는 왕재산경음악단 여성 단원들이 거주하면서 평양 관저와 똑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김 위원장은 주로 이들과 접촉하며 생활했다. 김 위원장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다.

만약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김 전 위원장의 심복인 당시 리철 스위스 주재 북조선 대사가 항상 따라다녔다. 김 위원장은 늘 형과 함께 지냈고 수행원을 겸하는 10대 미소녀 두어 명과 어울려 다녔다. 운전사·영화기사·경호원·요리사 등도 간혹 김 위원장 형제의 놀이 상대가 돼줬다.

김 전 위원장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씨는 김 위원장이 어려서부터 형 김정철 부부장과 달리 승부욕이 강했고 ‘왕자병’ 의식이 심했다고 증언했다. 농구를 좋아했던 김 위원장은 종종 농구 선수들을 관저로 불러 형 김정철 부부장과 편을 나눠 농구를 하곤 했는데, 경기가 끝나면 자기 편 선수들에게 반말로 잘못을 지적했다고 한다.

“농구 경기가 끝나면 형 김정철 부부장이 하는 말은 딱 세 마디 ‘고생했어’, ‘수고했어’,‘해산’뿐이었어요. 반면 김 위원장 쪽은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해요. 모두 스물 두세 살…나이가 많은 선수들에게 ‘그렇게 하니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는 거야, 알겠냐’라면서 무지하게 큰소리를 내요.”

김정철 부부장과 김 위원장은 스위스 유학 중에도 북한의 경축일, 특히 김 전 위원장의 생일(2월 16일)과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 북한 건국기념일(9월 9일), 노동당창건일(10월 10일) 등 중요한 기념일이 있으면 꼭 귀국했다. 일단 귀국하면 2개월 정도 평양에 머물렀다.

김 전 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여자아이 같다는 이유로 김정철 부부장보다 김 위원장에게 관심에 보였다. 김 전 위원장은 김 위원장에게는 매년 성대한 생일잔치를 열어줬지만 김정철 부부장에겐 생일이 막내딸 김여정 부부장의 생일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은 날 몰아서 공동 생일상을 차려 줬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태생적으로 대담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다혈질적 성격이었다. 유학 시절 때 ‘포켓몬’을 본다고 동급생들이 놀리자 바로 책을 집어던지고 동급생들과 싸우려고 해서 주변 친구들이 말리자 겨우 진정했다고 한다.

한때 김 전 위원장 측근들은 김정철 부부장과 김 위원장 형제를 각각 ‘큰 대장 동지’와 ‘작은 대장 동지’로 불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열 살 무렵 이모 고용숙 씨가 자신을 ‘작은 대장’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왜 내가 작은 대장이냐”고 따졌고 이후 김 위원장의 호칭은 ‘작은’이란 수식어가 빠진 ‘대장 동지’ 또는 ‘김 대장 동지’가 됐다.

또한 어릴 적 화가 나면 구슬을 형의 얼굴에 던지고 60세가 넘은 김일성 주석의 부관을 발로 툭툭 차며 ‘땅딸보’라고 놀리는 등 버릇없고 거친 면모도 있었다.

김 위원장의 유년기 성장 환경은 부친 김 전 위원장과는 매우 달랐다. 김 전 위원장은 이복동생 및 작은아버지 김영주 씨 등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겪었고 항상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어야만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성장했다.

김 전 위원장은 여섯 살 때인 1947년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익사했고 2년 뒤인 1949년 생모 김정숙 씨가 사망했다. 성년이 된 후에는 김영일·김평일 씨 등 이복동생과 계모 김성애 씨의 질시와 견제를 무릅쓰고 독자 생존을 모색했다. 항상 신중함과 경계심으로 무장하고 면종복배의 노회한 권력층을 관리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어려서부터 거칠 것이 없었고 김 전 위원장의 절대적인 사랑과 관리를 받았다. 잠재적 경쟁자였던 김정남 전 위원장은 이미 10대 중반 이후 평양에 6개월 이상 거주하지 않았다. 

-“왜 내가 작은 대장이냐”

김 위원장의 스위스 유학 시절 학교 성적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판단력이 빠르고 머리 회전이 매우 좋은 것으로 평가됐다.

필자는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시절 김 위원장이 친인척과 스위스 학교 동급생들과 나눈 대화를 복기해 이를 근거로 지능지수(IQ)를 산출했다. “김 위원장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질문을 빠르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답했으며 현안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다. 본인 주장에 대한 적절한 논리를 제시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후지모토 씨에 따르면 1998년 6월 26일 고용희 씨의 생일날 15세 김 위원장은 “후지모토, 외국 백화점과 상점에는 물자와 식량이 넘치도록 진열돼 있는데 우리나라 상점은 어떻게 된 건가요?”라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이미 일본을 여행한 것 같았고 스위스를 시작으로 유럽에도 가족 여행과 유학 때 목격한 해외의 풍요로움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장군 가족이 북한 국내 물자 부족에 대해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관저에서 TV 시청이 가능했다. 해외 뉴스로 전해진 은폐된 북한 내부 영상 등으로 자국의 물자 부족을 감지한 듯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10대 후반의 아이가 자국과 외국을 비교했다는 것에 겐지 씨는 놀랐다. 겐지 씨는 김정철 부부장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려서부터 공격적 성향 드러내

또한 이웃 나라 중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후지모토, 위(김 전 위원장)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이제 중국은 여러 면에서 성공했다고 해요. 공업·상업·호텔·농업 등 모두가 잘되고 있다죠?” “우리나라의 인구는 2300만 명인데 중국은 13억 명으로 통제 가능하다니 굉장해요. 전력 보급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농업도 큰일이에요.” 김 위원장이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고 국제 정세에도 밝다는 사례다.

한편 김 위원장의 공격적인 성향은 어려서부터 관찰됐다. 김 위원장은 일찍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열여섯 살 때 스위스에서 평양에 있는 한 살 많은 여자 친구와 국제 전화 통화를 했다.

김 위원장이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워 여자 친구가 좀 끊으라고 했더니 전화로 상소리를 해댔다. 보통의 청춘 남녀 대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거칠고 가학적인 성향과 안하무인의 태도가 나타났다.



(사진) 담배를 피우며 격술훈련을 참관하는 김정은 위원장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평양에서 3월 5일 열린 만찬 자리에서 김 위원장에게 “담배는 몸에 좋지 않으니 끊으시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는데 만찬 자리에 동석했던 리설주 씨도 “(자신도) 항상 담배를 끊으라고 부탁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며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고 김 위원장도 웃었다고 한다.

커트 캠벨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고(故)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전 부위원장이 처형된 직후인 2013년 12월 14일 미국 매체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 정부가 김 위원장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스위스 학교 동급생 등 많은 사람을 접촉했다. 김 위원장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과대망상증이 있고 폭력 지향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김 전 위원장은 막내딸인 김여정 부부장을 부를 때면 ‘귀엽고 귀여운 우리 여정아’라고 할 정도로 가족에게 살뜰한 편이었다. 자기를 보좌한 참모들을 작은 실수로 처형한 적도 없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유야 어떻든 어린 시절 자기를 안아 준 고모부 장성택 전 부위원장을 처형하고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형을 독가스로 죽였다.

김 위원장의 동의 없이 김씨 일가 친족을 죽일 수 있는 세력은 북한에 없다. 김 위원장의 승부욕이 독선적인 권력욕으로 확산된 측면이다. 잔혹성과 결단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특히 집권 2년 차인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 전 부위원장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장성택 전 부위원장이 김 전 위원장의 후계자로 이복형인 김정남 전 위원장을 지지했다는 내부 보고에 격분했다는 정보로 볼 때 과격함이 독재자에게 깊이 내재된 결과로 추론된다. 결론적으로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다.

김 위원장의 신청곡 ‘뒤늦은 후회’의 마지막 부분 가사는 ‘외로운 나에게 남은 것은 없구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다. 혹시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거부하고 혹시 외교적 수단이 소진돼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체제가 위험해질 때 이 노래를 신청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김 위원장의 과단성과 적극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그의 승부욕이 긍정적으로 작용해 한반도 비핵화로 2500만 명의 북한 인민을 먹여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커버스토리 : 김정은 대해부 기사 인덱스] 

-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은 김정은의 삶

- '김정은 체제'를 유지하는 파워맨 누구?

- 5명 중 1명은 휴대폰 소유...노트북 들고 한국 드라마 보는 북한 주민들

- '자주.선군.사회주의' 김정은 시대를 읽는 키워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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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04-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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