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조 국민연금' 어디로 가나?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전 이사장…“독립성 확보, ‘금통위’ 모델이 현실적”

전광우(69) 국민연금공단 전 이사장은 2009년 취임 당시부터 줄곧 ‘투자 다변화’를 강조해 왔다. 실제로 그는 재임 당시 채권 중심의 투자 패턴을 탈피해 글로벌·해외투자로 확대하는 등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전까지만 해도 80%에 달하던 채권 투자 비율을 50~60%대로 줄이고 런던 개트윅공항 등 굵직한 해외투자를 성사시키며 국내외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가 현재 사외이사로 있는 여의도 유수홀딩스 사옥에서 지난 8월 14일 전 전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국민연금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험료 정상화와 같은 ‘제도 개혁’과 기금 운용의 ‘수익률 제고’에 대한 논의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 개혁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만큼 단시간 내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금 운용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민이 무엇보다 중대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국민연금 해외투자 '대형 딜' 실종, 우려스럽다"
-‘국민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금 운용의 수익률을 높이는 것으로 이와 같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국민연금 고갈을 늦추기 위해 지금 논의되고 있는 ‘보험료 정상화’나 ‘수령 시기 연장’ 등 다양한 안이 논의되고 있죠. 분명 필요한 논의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민연금 제도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재정 안정성을 높여야 합니다. 기금 운용의 경쟁력을 높이는 게 전제가 되겠죠. 국민연금의 ‘제도 개선’과 ‘기금 운용의 경쟁력 확보’가 직접적으로 연계된 문제라는 겁니다.

다만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을 비롯해 2000만 명이 넘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중지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반면 기금의 운용 수익을 높이는 것은 국민연금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지속 가능한’ 국민연금을 위해 기금 운용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매우 핵심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죠.”

-국민연금 상반기 수익률이 0.49%로 나오면서 ‘기금 운용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에 동의하시나요.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익성과 안정성을 조화롭게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반기 수익률만으로 과민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수익률이 좋지 않 때도 있을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중·장기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것이니까요. 눈여겨봐야 할 것은 ‘투자의 질’입니다.

현재 국민연금은 전체의 46%를 국내 채권, 20%를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채권과 주식은 상당히 정형화된 투자입니다.

시장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죠. 반면 비정형화된 대체 투자는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수익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데 ‘보완재’ 역할을 해줄 수 있죠. 세계 주류 연기금의 대체 투자 비율이 30%인데 비해 국민연금은 현재 10% 정도입니다.

오히려 지난해(11.4%)보다 낮아졌죠. 최근 몇 년 동안 대체 투자 부문에서 신규 해외투자 대형 딜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기금 운용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대체 투자가 부진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나요.

“국민연금에서 대체 투자를 한창 활발하게 하던 시기는 2010~2011년 무렵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우량 자산들이 낮은 가격에 시장에 나와 있던 시기였죠.

당시 국민연금은 상당히 공격적인 투자로 높은 성과를 내며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꽤 주목을 받았죠. 개인적으로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최근 국민연금의 대체 투자가 부진한 것은 그때와 비교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기에 시장 상황이 달라진 측면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좋지 않은 거죠.

하지만 기금 운용에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면 투자 환경이 나쁘다고 해도 다른 경쟁자들이 찾지 못하는 ‘더 좋은 투자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것이 가능하겠죠. 더욱이 국민연금과 같이 자산 규모가 큰 기관이라면 더더욱 ‘투자 다변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고요.”

-투자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체 투자 등은 무엇보다 운용 인력의 전문성이 매우 중요한 분야입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죠.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글로벌 금융 전문가들의 방문이 더 어려워졌다든지, 국민연금 내 전문 인력 이탈의 가속화 등도 문제고요.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문제를 꼽자면 국민연금 내 각 분야의 투자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재량껏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이들을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최순실 사태 이후 국민연금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잖아요. 기금운용본부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공단 내부 감사에, 보건복지부 감사, 또 국회청문회까지….

이처럼 ‘감시의 눈’이 많아서는 전문가들이 재량껏 투자를 집행하는 데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죠. 어쩌다 결과가 한 번이라도 좋지 않으면 ‘과도한 책임 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바로 이것이 전문 인력의 이탈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 확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줄곧 ‘독립성’과 ‘전문성’ 두 가지를 강조해 왔어요. 이 두 가지야말로 기금운용본부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이 확보된다면 좋은 인재들이 국민연금으로 더 많이 유입되면서 전문성도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고요. 국내 자산 운용 시장에서 펀드매니저 한 사람이 1조~2조원에 달하는 규모의 자금을 굴릴 수 있는 기관은 흔하지 않아요.

전문가 개인적으로도 그만큼 매력적인 경력이 될 수 있는 기관인데, 요즘에는 오히려 국민연금에서 한국투자공사(KIC) 등으로 이직하기를 원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들려와 마음이 아픕니다. KIC만 해도 독립적인 자금 운용이 가능한 기관이잖아요.

이는 비단 직원들 개인의 경력 차원뿐만 아니라 국내 금융시장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의 젊은 금융 인재들이 국민연금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대규모의 자금을 굴리는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향후 국내 금융시장의 선진화를 앞당기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겁니다.”

-독립성 확보 방안은 어떤 게 있습니까.

“크게는 두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죠. 기금운용본부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떼어내거나 혹은 지금처럼 국민연금공단 내부 조직으로 두되 기금운용위원회의 구성이나 조직을 바꾸는 방안입니다. 개

인적으로 이상적인 것은 첫째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기금운용본부를 별도 조직화하는 것이 나을 수 있죠. 하지만 둘째 안이 더 현실성 있다고 판단됩니다. 현재는 기금운용위원회 20명 중 전문가는 2~3명에 불과합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죠.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총재·부총재를 제외하면 기획재정부 장관·한국은행 총재·금융위원장 등이 각각 전문성 있는 인사를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첫째 안이든 둘째 안이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컨센서스가 모아졌다고 보고요. 오히려 이 기회에 국민연금의 지배구조 개선이 잘 이뤄진다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기금운용본부장의 공백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차기 기금운용본부장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기금운용본부를 ‘누가’ 이끌어 가느냐가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같은 금융 분야라고 해도 은행과 증권, 자산 운용은 매우 이질적이고 다른 분야입니다.

투자 환경에 변화가 큰 시기인 만큼 자산 운용 시장에서 경험과 경륜을 많이 갖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조직을 단기간 내 안정화할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최근 2~3년 사이에 국민연금은 국내 큰 정치적 격랑에 휘말리면서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꺾여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에게 ‘국내 최고의 자산 운용 전문가’로서의 공감과 비전을 줄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될 테고요.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같은 해외의 자산 운용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이 역시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직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중요할 테니까요.”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7%에 해당하는 국민연금의 막대한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일종의 국민의 노후 자금을 ‘강제저축’하도록 한 것인데, 인구구조상 이 기금은 2040년까지는 계속 늘어날 겁니다.

문제는 기금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그 이후입니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국내 주식의 비율이 워낙 높기 때문에 국민연금 스스로가 시장이 돼버린 상황입니다. 향후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내다 팔아야 하는 시기가 올 텐데, 그전에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율을 조정함으로써 ‘과도한 집중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7%를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것은 해외 연기금과 비교해서도 전례가 없는 사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7% 정도인 이 비율을 앞으로는 더욱 낮춰야 한다고 보시나요.

“그 문제는 누구도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국민연금이 한 번에 국내 주식에서 발을 뺀다면 자본시장의 위축을 불러올 테고 국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이 ‘큰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으니까요.

다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에 대한 집중도가 더 높아지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레 그 비율을 조정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소프트 랜딩’이 필요하죠. 고래가 연못 속에 오래 갇혀 있다 보면 고래도 죽지만 연못이라는 생태계도 망가뜨립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국민연금은 향후 해외투자와 대체 투자 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약력 : 1949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인디애나대 경영학 박사. 1986년 세계은행(WB) 수석연구위원. 2001년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2004년 딜로이트코리아 회장. 2007년 외교부 국제금융대사. 2008년 금융위원회 위원장. 2009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2013년 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 2018년 와이즈경제포럼 회장(현).

한경비즈니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