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2019 한경비즈니스 기업 지배구조 랭킹]
- ‘제2의 KCGI’ 등장 가능성 높아
- 기관투자가 72곳 ‘코드’ 도입 완료
‘토종 행동주의·스튜어드십 코드’ 지배구조, 새로운 투자 테마로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우리 사회가 재벌을 위해 경영권 방어 장치를 도입하는 게 좋은 일인지 의문이다. 경영권 방어 문제는 지배구조를 선진화해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2017년 6월 취임 초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하며 내세웠던 논리다. 쉽게 말해 정부나 법에 기대하지 말고 재벌 스스로 자신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지배구조를 만들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으로서는 지배구조 개편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의 대기업집단처럼 계열사 간 복잡한 순환출자로 얽혀 있던 소유·지배구조 속에서는 말이다. 더욱이 2~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승계 과정에서는 취약해 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식시장을 외국인에게 본격적으로 개방되면서 국내 대기업들은 줄곧 외국계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됐다.

소버린의 SK에 대한 공격(2003년),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삼성물산(2015년)·현대모비스(2018년)에 대한 잇단 공격이 대표적 사례다.

◆ 규제 완화에 힘 받는 토종 사모펀드
‘토종 행동주의·스튜어드십 코드’ 지배구조, 새로운 투자 테마로
하지만 이젠 외부 공격만 신경 써서는 안 된다. 지분 확보를 통해 대주주나 경영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국내 사모펀드(PEF)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하반기만 하더라도 주주 행동주의를 표방한 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이 국내 대표적인 인프라펀드인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를 상대로 주주권을 행사했고 KCGI(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을 10.81%, 한진 지분 8% 등을 매입하면서 주요 주주로서 감시와 견제 역할을 활발하게 수행할 것을 예고했다.

외국계 사모펀드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이러한 활동들이 이제는 토종 사모펀드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자본시장의 생태계 변화는 앞으로 더욱 촉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다수 국내 기관들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등으로 주주권 강화 움직임이 확대된 데다 금융위원회가 사모펀드의 의결권 행사 규제를 푸는 사모펀드 제도 개편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국내 펀드가 주주권을 쥐고 대주주와 경영진에 적극적으로 맞선 것은 거의 없었다. 2006년 이른바 장하성펀드(한국지배구조펀드), 2016년 라임-서스틴데모크라시 사모펀드, 2017년 행동매주식전문투자형펀드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자금 규모 한계에 부닥쳐 대상 기업의 지분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토종 사모펀드들의 행동반경이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스튜어드십 코드가 주주권 행사 등 사모펀드의 우군 확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분석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과 자산 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가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을 말하는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기관투자가는 단순히 주식 보유에 그치지 않고 보유 주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특정 기업의 지분을 취득한 사모펀드가 재무구조 개선 차원에서 유휴 자산의 매각 등을 골자로 주주 제안을 했을 때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기관투자가들의 찬성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진 것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2018년 12월 말까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기관투자가는 총 72곳이다. 참여하겠다고 도입 의사를 밝히고 준비 중인 기관 37곳을 포함하면 109곳에 이른다.

사모펀드 규제 완화도 제2의 KCGI 등장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국내 사모펀드는 의결권 제한, 10%룰 등으로 해외 사모펀드와 비교해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현행 기준으로 PEF는 △기업 지분 10% 이상 확보 △6개월 이상 보유 △대출 금지 등 규정을 지켜야 했다. 예컨대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인 KCGI는 한진칼 지분 9% 확보에 그쳐 현행 기준으로는 1%포인트 지분을 더 확보해야 한다.

전문 투자형 사모펀드(헤지펀드)는 10% 이상 지분을 확보하더라도 의결권이 제한되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2018년 9월 말 밝힌 사모펀드 제도 개편 추진 방향을 통해 경영 참여형과 전문 투자형으로 이원화된 운용 방식을 일원화하고 10%룰을 폐지하기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다.

실제로 규제가 완화되면 단기적 차익을 노리는 행동주의 펀드나 장기적으로 기업과 윈-윈을 꾀하는 스튜어드십 펀드도 다수 나올 가능성이 높다.

◆ 투기 자본에서 주주 권리로…달라진 평가
‘토종 행동주의·스튜어드십 코드’ 지배구조, 새로운 투자 테마로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시장의 인식의 변화도 대기업들에는 부담이다. 사실 국내 주식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나 관련 자본에 대한 시각은 그동안 부정적이었다.

‘기업과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최대 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감시·견제’, ‘기업 가치와 주주권익 확대를 위해 필요한 자본’이라는 시각이 존재했지만 일부 외국계 펀드들의 돈만 노리는 기업 투자로 인해 ‘약탈 자본’ 혹은 ‘먹튀’라는 부정적 시각이 강했었다.

투자자들과 시장 관계자들은 물론 정치권과 금융 당국도 이러한 시각으로 행동주의 자본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 행동주의 자본과 이들이 운용했던 매우 공격적 성향의 펀드들로 인해 만들어졌다.

당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들은 분식회계 등 부적절한 회계 정황이 있거나 부당 내부거래, 혹은 오너나 경영진의 횡령·배임 의혹이 짙은 재벌 기업들을 골라 조용히 지분을 매집했다.

또 정부의 정책적 보호 아래 잉여금 규모를 키우고 수익성을 높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가에 무신경하거나 현저히 낮은 배당을 해온 상장 공기업의 지분을 사들였다.

이들은 일정 수준 지분을 매집한 후 다른 주주들로부터 의결권을 위임받는 순서로 투자를 이어 갔다. 이후 어김없이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소각 같은 단순한 요구를 하거나 회계장부 열람과 이사·감사 선임 요구 같은 사실상의 경영 참여 선언도 했다.

때로는 오너 일가 등 최대 주주와 경영진의 비위 의혹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회사 측에 징계·수사 의뢰를 요구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임시 주주총회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행동주의 펀드와 자본은 ‘최대 주주와 경영진의 부적절한 행위나 무능한 경영으로 훼손된 기업 가치와 주주 권익, 저평가된 주가’를 이슈로 꺼내들었다. 이를 통해 지분 경쟁 혹은 경영권 분쟁 구조를 유도했다.

이런 전략은 단기간에 주가를 급등시켜 일반 주주 배당 확대 결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결국 막대한 돈 보따리를 챙겨 떠나는 결말을 보여줬다. SK를 공격했던 소버린은 9000억원대의 차익을, KT&G를 겨냥했던 칼 아이칸은 1500억원대의 차익을 보며 철수했다.

하지만 KCGI가 사들인 한진칼 지분 취득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특히 토종 행동주의 펀드라는 점에서 자본 유출에 대한 우려도 불식시켰다.

더욱이 여러 차례 갑질 논란으로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쌓인 사이 KCGI가 한진그룹에 경영 투명화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하고 나서면서 재벌 기업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도 이끌어 냈다.

현재 국내 토종 행동주의 성격의 자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주로 사모펀드들이다. 2009년만 해도 110개 정도이던 PEF는 2018년 상반기 기준 444개로 4배 넘게 늘어났다.

또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라임자산운용·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 등 중소형 자산 운용사 중 적극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곳들 역시 행동주의 펀드를 만들어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 권익 확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cwy@hankyung.com



[커버스토리=2019 한경비즈니스 기업 지배구조 랭킹 기사 인덱스]

-지배구조 랭킹 1위 ‘KT&G’…두산·미래에셋·한화·한국투자 ‘톱5’
-점점 줄어드는 총수 일가 등기이사 등재…‘책임 경영’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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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6호(2019.01.07 ~ 2019.01.1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