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1209호 (2019년 01월 30일)

‘좌절과 환희’ 60년을 이어온 한국 자본시장 역사

[커버스토리=자본시장법 10년…다시 그리는 ‘한국판 골드만삭스’의 꿈]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3저 호황’·‘경제 위기’ 거치며 1572조원 규모 성장


1956년 서울 명동에 설립된 대한증권거래소.

[한경비즈니스 = 이홍표 기자] 한국에서 최초로 주식 형태의 증권이 발행됐던 시기를 따지면 조선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현대적 형태의 증권거래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당시 재무부의 주도로 설립된 대한증권거래소다. 그해 3월 3일 증권거래소 서울시장(당시 명동 소재)에서 처음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개장일에 상장된 종목은 조흥·저축·상업·흥업은행 등 4개 은행과 경성방직·대한해운공사·대한조선공사 등 8개 기업 등 총 12개였다. 건국 국채 3종도 함께 거래됐는데 당시 주식 투자가 생소하다 보니 초기 증권시장에서 주식과 국채의 거래 비율은 반반 정도였다.

초창기 상장사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증시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아직까지 증시에 남아 있는 기업은 유수홀딩스(대한해운공사)·한진중공업(조선공사)·경방(경성방직) 등 세 곳뿐이다.

당시 주식거래는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거래소에 모인 중개인들이 호가를 내고 거래소 직원이 격탁(거래 체결 등을 알리는 데 사용한 물건)을 두드려 가격을 결정했다. 주식 매매 주문은 전화를 통해 증권사 본·지점을 경유한 뒤 거래소로 주문이 전달됐다. 고객은 주문 후 거래가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스마트폰 등으로 주가를 실시간 조회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주가를 칠판에 직접 적었다. 종목별 거래 상황은 매매계약이 체결될 때마다 거래소 방송을 통해 공지됐다.

구멍가게 수준이던 주식시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뒤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정부는 증권시장을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 조달 수단으로 키우기 위해 적극적인 증시 육성 정책을 펼쳤다.


‘3저 호황’을 이끈 플라자 합의에 참석한 각국 재무장관들.

‘ 국민주’ 시대 연 80년대

그 결정판은 1972년 이뤄진 ‘기업공개 촉진법’이었다. 일정 요건이 되는 기업의 상장을 의무화한 이 법이 시행되면서 상장 러시가 시작됐다. 1970년 48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1978년 356개사가 됐다. 주식거래 대금 역시 이 기간에 429억원에서 1조7415억원으로 40.6배 불어났다. 당시 증시를 주도한 것은 중동 건설 붐을 탔던 건설주다. 하지만 오일쇼크와 경제성장 둔화 속에 건설주가 1년 새 70% 이상 폭락하는 이른바 ‘건설주 파동’을 겪기도 했다.

증권 거래 업무도 이 시기에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8년 기존 격탁 매매 방식이 폐지되고 육각형 모양의 단상(포스트)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포스트 매매’가 등장했다.

증권거래소는 1973년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한다. 칠판을 대신한 전자식 시세 게시판이 등장했고 증권사들도 여의도로 둥지를 옮기면서 여의도가 한국 자본시장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된다.

1980년대에는 포항제철(현 포스코)·한국전력·국민은행·전기통신공사(현 KT) 등 국가 기간산업이나 공공성이 높은 기업들의 주식이 국민주 형태로 보급되면서 대중화 시대를 맞는다. 온라인 거래의 기틀도 이때 닦였다. 1983년 2월 증권 온라인 시스템이 가동에 들어갔고 1986년부터 기존까지 전화 통화를 통해 이뤄지던 매매를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1981년 88올림픽 개최 결정이 이뤄지고 정부의 경기 부양책이 발동되며 증시가 서서히 상승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코리아펀드’ 설립 계획이 발표돼 시장이 달아올랐다. 코리아펀드는 한국에서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펀드였다. 외국인의 자금을 모아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것으로 증시 상승의 원동력이 됐다.

1985년 이뤄진 ‘플라자 합의’는 한국 경제와 증시에 도약의 계기가 됐다. 선진국 간 무역수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가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여 각 국가의 통화가치를 재조정하기로 했다. 내용은 ‘달러 가치의 하락, 엔화의 가치 상승’이었다. 이에 따라 수출 경쟁력이 생긴 한국 상품이 대거 수출되기 시작했다. 100선에 머무르던 코스피지수도 이 시기부터 급등하기 시작한다.


한국 증시를 이끌어 온 삼성전자.

‘삼성전자·포스코·현대차’가 이끈 90년대

낮은 달러 가치, 낮은 금리, 낮은 유가는 한국 경제를 고속 성장하게 만든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12.8%, 수출 증가율은 26.4%에 달했다. 이른바 ‘3저 호황’이다. 주식시장 또한 풍부한 유동성으로 주가가 상승해 1989년 3월 31일 주가지수는 1000고지(1003.31)를 밟게 된다.

투자자들의 폭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소액의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주식시장으로 모여들었고 1989년에는 ‘개미군단’이라는 신조어가 처음 등장했다,

코스피지수 1000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장의 과열은 결국 1989년 주가 하락으로 현실화된다. 주식에 투자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으로 주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주식 투자에 가세하며 버블이 형성됐다. 결국 주식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고 1985년부터 1989년까지 과도하게 발행된 주식 공급은 주가를 폭락시켰다.

결국 정부는 1989년 말 ‘12·12 증시 부양책’을 내놓았다.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부양책으로 평가된다. 주가가 하락하자 정부는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게 된다. 투자신탁회사가 주식을 무제한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매입 대금은 한국은행의 통화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다. 과도한 주식 공급으로 주가가 하락하자 이를 투신사의 매수로 받아내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은 훗날 투신사의 부실을 불러오고 깡통 계좌를 양산하는 등 부작용이 더 컸다.

호황에 따른 과소비 풍조와 낮아진 저축률, 1989년 하반기부터 확대된 노사분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또 수출 부진과 과도하게 오른 부동산 경기를 잡기 위한 정부의 1989년 통화 긴축정책이 한몫하면서 1992년까지 주가가 하락을 지속했다. 주가가 바닥을 친 1992년까지 주가는 전고점 대비 54% 하락했다.

1992년 1월 3일은 외국인에게 한국 증시를 개방한 날이다. 당시 외국인의 투자 한도는 일반 기업은 10%, 공공기업은 8%였다. 1998년 핵심 기간산업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의 외국인 취득 한도가 폐지되면서 한국 증시는 본격적으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90년대에는 상장법인의 해외 상장도 이어졌다. 1994년 포항제철과 한전이 미국 증권시장 공모를 통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2년간은 이른바 ‘신3저 시대’였다. 엔화 가치가 재상승해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커졌고 때마침 유가와 금리도 낮아져 한국 증권시장은 다시 호황을 맡게 된다. 특히 미국의 컴퓨터 업체들은 엔화가 비싸지자 한국의 기업에서 부품 수입을 늘려 삼성전자·금성일렉트론·현대전자 등이 크게 성장한다. 수출 관련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블루칩’이 각광 받고 ‘삼성전자·포스코·현대차’가 빅3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1995년 들어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수출 물량은 늘었지만 상품의 가격이 하락해 반도체·철강·화학 등 수출 주력 제품의 무역수지가 줄어들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1995년 4월 도급 순위 30위인 유원건설이 부도가 나면서 건설업계의 연쇄 부도가 시작됐다. 하도급 전문 업체까지 합하면 당시 쓰러진 건설 회사만 900여 개에 달한다.

1996년엔 신설 투신사가 영업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서울에 3개의 투신사, 지방에 5개의 투신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관투자가를 육성하기 위해 증권회사가 투신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개방돼 새로운 투신사가 시장에 진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경쟁이 활성화되고 펀드 수탁액이 증가하면서 증시도 잠깐 살아난다.


세계 13위 규모로 커진 한국 증시

한국 증시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금융회사의 방만한 대출 관행 등의 후유증으로 굴지의 기업들이 잇달아 쓰러졌다. 코스피지수도 280까지 추락했다. 이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당시의 굵직한 기업인 한보·삼미·한신공영·진로·대농·기아 등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하자 이 회사에 돈을 빌려 줬던 은행도 어려워지면서 은행주가 급락했다. 은행은 수지가 악화되자 기업에 대출을 깐깐하게 하거나 자금을 회수하는 등 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

특히 1997년 동남아 통화 위기를 계기로 한국 증시도 대폭락하게 된다. 외국의 투자 자금이 일시에 한국 증시에서 빠져나가면서 원화 가치가 바닥에 떨어지고 외채는 바닥이 난다.



2018년 1월 29일 처음으로 코스피 지수 2600을 돌파했던 당시의 전광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성과가 나타나면서 주가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벤처기업 투자 바람이 불면서 코스닥 열풍이 불었다. 6개월 사이 주가가 70배나 올랐던 새롬기술 등 급등 종목이 속출했다. 또 ‘바이코리아펀드’가 발매 3개월 만에 10조원의 투자 자금을 모집했고 뮤추얼펀드도 등장하면서 ‘펀드 열풍’이 불었다. 펀드에 투자된 자금은 주식시장에 들어갔고 주가 상승의 동력이 됐다. 하지만 2000년 들어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줬다. 코스닥지수 최고치는 2000년 3월 기록한 2834. 현재 코스닥지수는 당시의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한국 증시는 2003년부터 대세 상승기에 접어든다. 주가지수는 2007년 4월 1500선을 넘어섰고 그해 10월 2000선을 돌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1000선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현재 2100선까지 회복된 상태다. 2018년 말 기준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1572조원으로 전 세계 13위 규모로 성장했다.

[돋보기]  백 할머니, 광화문 곰, 목포 세발낙지…전설의 ‘슈퍼 개미’들

한국 증시 역사를 이야기할 때면 항상 회자되는 인물들이 있다. 주식 투자를 통해 종잣돈을 수백~수천 배로 불린 이른바 ‘슈퍼 개미’다. 지금도 주식 대박을 꿈꾸는 많은 투자자들에게 ‘전설’로 각인되고 있다.

슈퍼 개미의 원조는 ‘백 할머니’로 불렸던 고 백희엽 씨다. 그는 6·25전쟁 때 무일푼으로 월남해 페니실린·군복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1950년대 후반 건국채권에 투자해 거액을 벌어들이면서 ‘큰손’으로 떠올랐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주식에 투자한 백 할머니는 우량주를 2~3년씩 보유하는 장기 투자 원칙을 고수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천문학적 액수인 300억~400억원 정도를 굴린 것으로 알려졌다.

‘광화문 곰’으로 불렸던 고 고성일 씨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초반 하루 전체 주식거래 규모 100억원 가운데 약 30%가 그의 계좌에서 나왔을 정도로 증권가를 휘어잡았다. 저평가된 주식을 대거 사들이는 이른바 ‘물량떼기’가 주특기였다. 그의 별칭은 손해를 보고도 끈질기게 주식을 사 모으는 투자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그는 사양길로 접어든 건설주를 집중적으로 매입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주식시장에서 손을 뗐다.

1980년대 활동했던 ‘헨리 정’이라는 투자자도 입에 오르내린다. 국내 증시에서 이른바 ‘씨말리기’라는 작전 수법을 처음 선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호재가 있는 특정 종목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유통 주식 수를 줄인 뒤 주가를 올리는 수법을 구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선물시장에서 슈퍼 개미들이 주로 활약했다. ‘압구정 미꾸라지’로 불렸던 윤강로(현 KR선물 회장) 씨가 대표적이다. 윤 회장은 선물시장에서 위험을 잘 피해 간다고 해서 미꾸라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1998년부터 선물 투자를 시작해 종잣돈 8000만원을 1300억원으로 불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대신증권 목포지점 영업부장을 지낸 ‘목포 세발낙지’ 장기철 씨,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출신인 ‘슈퍼 메기’ 선경래 씨, 전북 전주의 큰손 투자자로 알려진 ‘전주투신’ 박기원 씨 등이 ‘재야 고수’로 이름을 떨쳤다.  hawlling@hankyu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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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9호(2019.01.28 ~ 2019.02.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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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9-01-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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