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 브랜드 M&A로 삼키고도 식탐 끝없어…명품 공룡 LVMH와 닮은 꼴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해가 지지 않는 자동차 제국 ‘폭스바겐’
‘폭스바겐과 루이비통.’ 언뜻 보기에 두 회사는 큰 관련이 없다. 폭스바겐은 자동차 회사, 루이비통은 패션 브랜드다. 폭스바겐은 일반 대중을 겨냥한 양산차이고 루이비통은 제품 가격이 비싼 명품 브랜드다. 하지만 두 회사는 의외로 닮았다. 이들의 지주회사인 폭스바겐AG와 LVMH그룹은 각각 해당 업계의 ‘공룡’으로 통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기업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폭스바겐AG를 살펴보자. 폭스바겐AG는 총 12개의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핵심 브랜드인 폭스바겐을 비롯해 아우디·벤틀리·부가티·람보르기니·세아트·스코다·스카니아 그리고 최근 지분 인수를 마무리한 포르쉐와 만까지 ‘자동차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브랜드가 포진해 있다. 모터사이클 제조사인 두카티도 삼켰다. 이처럼 폭스바겐AG는 자동차와 관련된 회사라면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폭스바겐AG의 먹어치우는 습성은 LVMH그룹과 닮았다. 루이비통 모엣 헤네시(LVMH)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사는 패션부터 주류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다. 이 회사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공격적인 M&A를 거듭한 결과 지방시·크리스찬디올·구찌·펜디·도나카란 등 명품 패션 브랜드와 고급 시계 브랜드인 태그호이어 등 60개에 달하는 명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시계 브랜드에는 제니스·위블로 등도 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스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에르메스 가족들의 반발로 한 발짝 물러선 상황이다. 그 대신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불가리를 인수했다. 이 회사의 시작은 고급 주류 브랜드인 모엣 헤네시다. 이 때문에 샴페인 모에샹동과 돔페리뇽, 뵈브 클리코 등 주류 브랜드도 갖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도 그렇다. 겔랑과 겐조, 메이크업 포에버, 베네피트, 아쿠아 디 파르마 등이 포진해 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LVMH그룹은 아직도 에르메스를 포함한 7~8개 브랜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폭스바겐AG 역시 인수할 만한 먹잇감을 찾아다니고 있다.

폭스바겐그룹이 아우디 이후 가장 먼저 인수한 메이커인 스코다와 세아트는 각각 체코와 스페인의 국민 브랜드다. 이 두 브랜드 인수엔 카를 한이란 인물의 역할이 컸다. 1982년부터 약 12년 동안 폭스바겐을 이끌었던 그는 샐러리맨 성공 신화를 쓴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미스터 폭스바겐’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미국 판매법인을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하며 결국 회장에까지 올랐다. 그가 회장에 오르자 내세운 전략은 미국 이외의 곳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전문가였지만 그가 회장에 올라섰을 땐 일본 메이커들이 미국에서 주류로 자리 잡아 유럽을 전략 시장으로 삼았다. 또 다수의 모델을 통해 생산량을 극대화한다는 목표 아래 세아트와 스코다를 차례로 인수했다. 독일이 아닌 지역에서 생산 시설을 확충한다는 목적에도 부합했다.


갈증 해소 ‘스코다’, 소화불량 ‘세아트’
1894년에 설립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스코다는 현재 폭스바겐그룹에 인수된 후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회사는 동유럽이 붕괴된 후 1991년 3월 폭스바겐과 조인트벤처 파트너십을 맺고 지분을 교환(폭스바겐이 스코다 지분 31% 확보)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3년 뒤인 1994년 12월 폭스바겐은 스코다의 지분을 60.3%까지 늘려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폭스바겐그룹의 넷째 브랜드로 편입한 것이다. 지분율을 1995년 70%로 늘린 뒤 2000년 12월 체코 정부로부터 남은 30% 지분을 인수하면서 100%를 확보했다.

당시 스코다에 눈독을 들인 건 폭스바겐뿐만이 아니었다. 르노·피아트·제너럴모터스(GM) 등이 스코다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체코 정부는 조건을 걸었다. 브랜드명을 스코다로 유지해야 하며 인력을 감축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조건을 수용한 건 폭스바겐이었다. 여기엔 폭스바겐의 영리한 셈법이 숨어 있었다. 당시 스코다 종업원의 시간당 임금은 7마르크였다. 폭스바겐(70마르크)의 10% 수준이었다. 인건비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공장 설비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의 손으로 해결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스코다는 폭스바겐에 비해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로 시장을 공략해 나갔다. 또 폭스바겐의 섀시·엔진 등 즉각적인 구별이 힘든 부품부터 먼저 공유했고 그 덕분에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과거 공산주의 시절 생산되던 모델을 현대적으로 변경한 최초의 회사가 됐다. 스코다는 주력 모델인 중형 세단 ‘옥타비아’를 바탕으로 연간 판매량을 1991년 17만 대에서 2013년 92만 대까지 끌어올리며 유럽 중저가 시장을 장악했다.

승승장구하는 스코다와 달리 세아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1919년 피아트의 스페인 지사로 설립돼 1950년 독립 회사가 된 세아트는 스코다보다 먼저 폭스바겐그룹에 인수됐다. 독립 후에도 세아트는 한참 동안 피아트의 라이선스 모델만 생산했다. 1982년 폭스바겐과 협력 계약을 체결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고 1986년 스페인 정부는 세아트의 지분 75%를 폭스바겐그룹에 넘겼다. 1990년에는 세아트의 폭스바겐 지분율이 99.99%까지 늘었다. 1991년 세아트는 폭스바겐그룹에 편입된 후 첫째 모델인 4도어 세단 ‘톨레도’를 출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품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아트는 1992년부터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고 1993년엔 폭스바겐그룹 적자의 93%를 차지할 정도로 경영 부담으로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1993년 당시 종업원이 2만 명 규모에 달했던 세아트는 추가로 4000명을 고용하는 등 방만 경영을 일삼았다. 결국 당시 폭스바겐그룹 회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회장실 직속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한편 ‘세아트 재건팀’을 만들어 회사 살리기에 나섰다. 그룹 판매망에 세아트 판매망을 통합했고 1993년 말 ‘이비자’, ‘코르도바’ 등 소형 해치백과 왜건으로 전략 차종을 변경했다.

이후 세아트는 훗날 폭스바겐그룹 디자인 총괄이자 세계적인 디자이너 반열에 오르는 발터 드 실바를 맞아들인다. 1998년 피에히 회장이 피아트에서 일하던 실바를 스카우트해 온 것이다. 실바의 손길을 거친 ‘레온(1999년)’과 ‘이비자(2002년)’ 등은 오늘날 세아트의 주력 모델이 됐다. 하지만 실바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자국 경기 침체와 맞물려 2005~2006년에도 적자를 기록하는 등 세아트의 성장은 더디게 진행됐다. 폭스바겐그룹은 2015년까지 세아트가 흑자를 달성하지 못하면 브랜드 폐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2018년까지 글로벌 판매 목표를 80만 대로 설정했다. 2013년 생산량은 46만 대에 그쳤다.

두 브랜드를 인수한 카를 한의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M&A를 통해 다양한 차종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지금 폭스바겐의 기틀을 닦았지만 당시 무리한 투자로 경영 위기를 자초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결국 그는 1993년 폭스바겐 당기 순손실이 12억 달러를 기록한 뒤 이사회 결정을 통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폭스바겐 회장은 페르디난트 피에히로 교체됐다.

다사다난했던 스코다와 세아트에 비하면 벤틀리와 부가티는 폭스바겐그룹에 인수된 후 비교적 평탄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벤틀리와 부가티는 1998년에 폭스바겐 품에 들어왔다. 1912년 설립된 벤틀리는 1920년대 프랑스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우승컵을 3회나 거머쥐며 명성을 얻었지만 경영난으로 1931년 롤스로이스에 인수됐다. 이후 롤스로이스모터스의 소유주인 비커스그룹이 1997년 롤스로이스 자동차 부문 매각을 결정했을 때 피에히 회장은 BMW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끝내 롤스로이스는 BMW그룹, 벤틀리는 폭스바겐그룹으로 옮겨갔다.

이탈리아 출신의 에토레 부가티가 1909년 프랑스에 자신의 이름을 따 설립한 부가티는 최고 시속 400km의 비현실적인 속도로 달리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로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 이 회사는 1947년 에토레 부가티가 사망한 후 생산이 중단되며 사라졌다가 1989년 이탈리아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가 ‘부가티 아우토모빌리’를 설립하면서 살아나는 듯했지만 결국 이 역시 7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부가티의 브랜드를 벤틀리 비데킹 포르쉐 사장이 사들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이득이 없다고 판단해 반환해 버렸다. 이때 피에히 회장이 움직였다. 그는 사방으로 염가에 팔려나간 부가티의 상표권을 다시 사들였고 1998년 5월 로마노 아르티올리로부터 핵심 기술도 가져왔다. 이후 두 회사는 최고급 차라는 명성에 맞는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판매량 상승을 물론 폭스바겐그룹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트럭도 제국화, ‘스카니아’에 이어 ‘만’까지
폭스바겐그룹의 포트폴리오는 최고급 차와 저가 브랜드에 그치지 않았다. 상용차인 트럭에까지 손을 뻗었다. 스카니아는 스웨덴 회사다. 스카니아라는 사명은 1891년 회사가 설립된 스웨덴 남쪽의 스코네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임러AG·볼보·이베코에 이어 생산량 세계 4위 업체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해가 지지 않는 자동차 제국 ‘폭스바겐’
이 회사 역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1911년 바비스와 합병된 후 1969년에는 스웨덴의 국민차 브랜드 중 하나인 사브와 합병했다. 하지만 1990년 GM과 인베스터AB가 이 회사의 지분을 50 대 50 소유하면서 사브스카니아그룹에서 분리됐다. 하지만 또 다른 스웨덴 국민차 브랜드이자 세계 2위 트럭 브랜드인 볼보에 인수됐다. 1999년 볼보가 600억 크로네(69억2594만 달러)을 투입해 지분 60%(의결권 49%)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병은 하지 못했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경쟁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합병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2년 일본 도요타가 트럭 자회사인 히노를 통해 스카니아 지분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불발됐다. 2003년 볼보가 스카니아 지분 45%를 매각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또다시 도요타가 인수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폭스바겐그룹은 이미 2000년에 전략적 투자라는 목적으로 스카니아 지분 18.7%와 의결권 34%를 확보했다. 실질적인 스카니아 경영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결국 2008년 스카니아는 폭스바겐그룹의 품에 들어갔다.

만SE는 독일 트럭 회사다. 뿌리를 찾으려면 역사를 256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758년 설립된 중공업회사 ‘세인트안토니’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디젤엔진을 세계 최초로 개발, 상용화한 것도 이 업체다. 견실하게 성장해 온 만은 2003년에 도요타와 함께 스카니아 인수 후보자로 거론됐으며 2006년 실제로 스카니아 지분을 11.5% 인수했다.

하지만 폭스바겐그룹의 입장은 느긋했다. 이미 만SE 지분을 매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그룹은 지속적인 매수 끝에 2011년 만SE 지분 30.47%를 확보했다. 독일에서 M&A의 법적 요건은 30%다. 폭스바겐그룹은 만이 보유한 스카니아 지분까지 보유한 셈이 돼 양사 모두에 영향력을 확대하게 됐다. 폭스바겐은 2013년 만SE 지분을 추가로 25% 더 인수해 스카니아와 만SE, 폭스바겐 소형 트럭사업부를 통합할 계획까지 세웠다. 지난 2월 폭스바겐그룹은 스카니아 지분(현재 46% 지분 보유)을 추가로 매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스카니아 임원진은 제시한 입찰액이 낮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폭스바겐그룹의 몸집 불리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