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경영 실패 겹치며 M&A 매물로, 포드 협상 결렬되자 공개 매각 급선회

(서울=연합뉴스) 김병만 기자 =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 2번째)가 자민련 박태준 의원과 함께 경기 광명시 소하리 기아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진 념 회장(왼쪽)의 안내로 자동차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1997.11.12 (끝)
(서울=연합뉴스) 김병만 기자 =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 2번째)가 자민련 박태준 의원과 함께 경기 광명시 소하리 기아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진 념 회장(왼쪽)의 안내로 자동차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1997.11.12 (끝)
김선홍 기아차 회장은 1995년 누적되는 적자에 따른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콩코드 후속 모델로 중형 세단 ‘크레도스’를 내놓은 것. 연구비 5100억 원을 투입해 개발한 야심작이었다. 김 회장은 자신만만했다. 성능이나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경쟁 차를 압도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기아차는 이 차의 마케팅 전략으로 ‘핸들링이 절묘한 차’를 강조했다. 당시 소비자들을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내용이었다. 게다가 크레도스는 가격도 비쌌다. 당시 배기량 1800cc 모델의 가격이 1150만 원이었는데, 동급 경쟁 차인 대우 뉴프린스는 985만 원, 현대 쏘나타2는 950만 원이었다.

‘제품이 좋으면 가격이 비싸도 팔린다’는 설득력 있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주로 프리미엄 브랜드에 해당된다. 기아차는 기술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지만 프리미엄 브랜드는 아니었다. 제품과 마케팅 전략의 실패는 회사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최고경영자(CEO)의 결단은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기아차는 그렇게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렸다.


수천 억 쏟아부은 신차 개발 프로젝트
기아산업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매년 200억~250억 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차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설비투자 비용을 주로 증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증자로 조달한 자금은 전체 자금 조달의 60%가 넘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대주주가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지분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기아산업은 1983년 유상증자(총 250억 원)를 단행하고 일본의 마쓰다(20억 원 출자, 지분 8%)와 이토추상사(5억 원 출자, 지분 2%)로부터 자본금을 확충했다. 이들이 보유한 지분은 보통주임에도 불구하고 자본 제휴 시 무의결권 주식으로 합의해 경영권 행사를 할 수 없었다.

1986년 포드도 유상증자에 참여해 10%의 지분(110억 원 출자)을 소유했다. 1987년부터 승용차 생산을 재개할 수 있게 돼 프라이드와 콩코드 생산 결정과 함께 기아(생산)-마쓰다(제품 개발)-포드(미국 내 판매) 간의 협력을 추진하며 해외 업체가 약 20% 지분을 보유하도록 했다. 증자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기아산업은 10만 대 규모의 아산만 공장 건설에 착공했고 1986년 대한중기를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해 자동차 부품 부문을 강화했다. 1989년 완공된 아산만 공장은 지금의 화성공장이다.

1990년 김선홍 사장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기아산업의 사명을 기아차로 변경했다. 이때 대한중기도 기아특수강으로 변경했다. 김 회장은 ‘기술의 기아’라는 모토를 내걸고 대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1992년 독자 개발한 전륜구동 플랫폼을 이용한 승용차 ‘세피아’에 이어 1993년 도심형 사륜구동 승용차 ‘스포티지’를 독자 개발, 생산했다. 개발비는 세피아가 9000억 원, 스포티지가 4400억 원 투입됐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난 금액이다. 참고로 ‘에쿠스’와 ‘제네시스’는 각각 5000억 원의 개발비가 들었고 YF와 LF쏘나타는 4500억 원이 들었다. 당시 세피아 경쟁 차종인 대우차 ‘씨에로’의 개발비는 450억 원이었다.

문제는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한 차량들의 판매가 저조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무리하게 시설 투자를 한 기아특수강으로 인해 자금난이 가중됐다. 기아차는 1994년 13년 만에 순손실 696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기아차 직원들은 보너스는커녕 월급도 한 직급씩 낮춰 받을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지분 매집 나선 삼성…최후 승자는 현대
기아차는 1990년 중반부터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됐다. 특히 1995년을 기점으로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하루에 주식이 20만~30만 주씩 대량 거래되기도 했다. 기아차의 총 주식 수는 7200만 주였다. 인수설이 대두된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 판매 부진으로 경영 상황이 악화된 때문도 있지만 대주주 지분이 적은 구조인 점도 한몫했다. 지분의 7.5%를 보유한 마쓰다의 경영 상태가 일본 자동차 업체 중에서 가장 어려워 지분 매각 가능성도 컸다. 기아차가 높은 기술력을 보유해 M&A 매물로서 매력적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마침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적대적 인수에 대한 법적인 제재도 완화된 상황이었다. 해당 기업을 상장할 때 당시의 대주주를 제외하고 발행 주식의 10%를 초과해 보유할 수 없었지만 이런 규제들이 폐지됐다. 공개 매수를 통해 합병하는 사례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소액주주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를 장려하는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었다.


삼성생명 중심으로 10% 넘는 지분 확보
인수설의 가장 첫 문장에는 삼성그룹이 있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995년 6월 1일자에 “경영난에 빠진 기아차가 삼성그룹에 매수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삼성이 인수 1순위로 거론된 이유는 1993년 삼성생명이 기아차의 지분을 대규모로 매집했기 때문이다. 1993년 3분기 말 기준으로 삼성생명은 ‘단순 투자 목적’으로 기아차 지분을 8%까지 늘렸다. 삼성화재 등 다른 계열사까지 합쳐 기아차 지분이 10%를 넘어섰다. 최대 주주인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율(7.73%)을 넘는 수치였다. 당시 증권거래법상으로 보험과 은행은 회사당 10%까지, 증권사는 5%까지 상장 주식을 매입할 수 있었지만 주총 때 의결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결국 다음해 삼성생명은 기아차의 반발과 여론에 떠밀려 6~7% 수준으로 기아차의 지분율을 낮췄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지분 매집 나선 삼성…최후 승자는 현대
삼성은 1995년 부산 신호공단에 56억 달러(당시 금액 4조4800억 원)를 투자하며 자동차 산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하지만 후발 주자라는 이유로 기아차 인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가능성은 사실로 드러났다. 기아차가 매물로 나오자 삼성이 입찰에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에는 실패했다. 승자는 현대차였다.

1997년 10월 기아차는 정부와 채권단에 의해 법정 관리가 결정됐다. 동시에 김선홍 회장도 물러났다. 자동차 내수 경기의 급격한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아시아자동차와 기아특수강, 건설회사 기산의 경영 악화로 빚어진 결과였다. 과다한 차입 경영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된 이유도 있었다. 1996년 말 기아차의 자기자본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아시아차는 대형 상용차와 경상용차 투자에 실패했다. 기아특수강 역시 무리한 투자가 패인이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1조 원을 투자하며 특수강의 제강 능력을 기존의 4배(19만 톤→72만 톤)까지 늘렸지만 가동률은 50%를 밑돌 정도로 경영 상황이 악화됐다. 기아특수강은 1993년부터 법정 관리를 받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아산만 공장 등 기아그룹의 공사를 도맡았던 기산은 기아차의 종업원 명의로 12.74%를 보유하고 있어 관계회사로 분류됐다. 1997년 1월 공정거래위원회 지시로 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 당시 도산 위기였던 기산이 그룹사로 편입된 후 기아차에 기산의 지급보증 요구가 늘어나 자금난이 가속화됐다. 1997년 말 기준으로 기아차의 차입금은 5조1000억 원에 달했다. 1997년 매출이 6조4000억 원, 영업이익이 1670억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과도한 수준이었다.


현대차·기아차 사령탑에 오른 정몽구 회장
법정 관리 결정 후 법정 관리인으로 임명된 진념 회장은 기아차를 포드에 수의계약으로 매각하려고 했지만 부채 탕감액 등에 대한 입장 차로 불발됐다. 결국 현대차가 1998년 10월 공개 입찰을 통해 대우와 삼성을 따돌리고 기아차·아시아차를 낙찰 받았다. 현대차가 감자 후 증자를 통해 1조2000억 원을 투입하고 채권단으로부터 2조5000억 원의 출자 전환과 7조1000억 원의 부채 탕감을 받는 조건이었다.


기아차 인수가 결정된 후 정몽구(MK)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아가 자동차 사업에 대한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당시 MK는 현대그룹 회장이었지만 자동차 계열사는 현대정공과 현대차써비스만 총괄했다.


기아차 인수가 결정된 후 정몽구(MK)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아가 자동차 사업에 대한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당시 MK는 현대그룹 회장이었지만 자동차 계열사는 현대정공과 현대차써비스만 총괄했다. 현대차는 당시 정세영 현대차 명예회장의 아들 정몽규 회장이 맡고 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MK가 현대차 경영에 참여하고 기아차 정상화 작업도 주도하도록 했다. 1998년 12월 현대그룹은 조직을 자동차·전자·건설·중화학·금융 서비스 등 5개 소그룹으로 분할하고 자동차 부문을 단일 법인으로 합병해 일원화한다고 발표했다. MK가 현대차·기아차 회장에 취임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9년 3월 동생 정세영을 불러 “몽구가 장자인데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나”라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에게 자동차 사업 경영권을 완전히 넘겨주라는 뜻이었다. 정세영은 “잘못된 것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세영 일가는 현대차 소유 지분과 현대산업개발 지분을 맞바꾸며 건설사를 계열 분리했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