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밴 신화로 크라이슬러 전성기 열어…다임러와 결별 거치며 다시 흔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오일쇼크 넘어 전설이 된 아이아코카
1978년 11월 2일 미국 일간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1면에 두 가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크라이슬러 최악의 손실을 입다’와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에 합류하다’. 포드 전성기의 주역인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 사장에 취임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이 회사는 3분기에 1억6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침몰해 가고 있었다. 방향키를 잡은 아이아코카는 세계 최초의 미니밴인 ‘캐러밴’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크라이슬러를 ‘순풍에 돛 단 배’로 부활시켰다.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인 1900년대 초반 설립된 크라이슬러는 자동차 제조사 중 처음으로 풍동실험을 시행하고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유선형 디자인의 차량을 내놓았다. 파워 스티어링 시스템, 파워 윈도 등도 이 회사가 처음으로 상용화했다. 기술력과 디자인 모두 앞서가며 성장해 갔다. 닷지와 아메리칸모터스를 인수하며 포드·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경쟁하는 ‘빅 3’로 떠올랐다. 하지만 크라이슬러가 달려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오일쇼크와 일본 제조사들의 공세, 경영전략 실패 등이 겹치면서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다임러벤츠, 사모 펀드, 피아트그룹 등 회사의 주인도 수차례 바뀌었다. 크라이슬러는 미국 빅 3 중 가장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조사다.


인수·합병으로 미국 ‘빅 3’ 성장
크라이슬러의 공식 설립 연도는 1925년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이 회사의 역사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너선 맥스웰과 벤저민 브리스코가 설립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모터 컴퍼니’다. 맥스웰은 4년 후인 1913년 ‘맥스웰컴퍼니’라는 이름으로 홀로서기를 했고 1920년 한 인물을 영입했다. GM의 초대 부사장이었던 월터 P 크라이슬러다. 크라이슬러는 1922년 자동차 제조사 차머스모터카 인수를 진두지휘한 후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크라이슬러70’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사명을 크라이슬러로 바꿨다.

크라이슬러는 이때부터 성장 가도를 밟기 시작했다. 1928년 닷지브러더스를 인수하면서 GM과 포드 다음가는 미국 3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났다. 1950년대에도 크고 작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한 크라이슬러는 1960년대 들어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1963년 프랑스 ‘심카’를 인수해 사명을 크라이슬러-프랑스로 바꿨다. 1967년에는 영국 ‘루터스모터스’, 스페인의 ‘바레이로스 디젤’을 사들여 각각 크라이슬러-유나이티드킹덤, 크라이슬러-에스파냐로 변경했다.

1971년에는 일본 미쓰비시의 지분 15%를 사들이면서 합작 사업도 벌였다. 미쓰비시의 미국 판매를 크라이슬러 판매망을 통해 진행했다. 유럽과 일본을 아우르는 글로벌 생산·판매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1934년 차 한 대를 내놓아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부드러운 유선형 디자인의 ‘에어플로’다. 이 회사는 차량을 개발할 때 강한 바람이 부는 터널에서 공기 흐름을 실험했다. 이른바 ‘풍동실험’이다. 공기저항이 최소화되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이 실험의 목적이다. 이때 당시 자동차 디자인은 각진 박스 형태였다. 에어플로가 시장의 주목을 받자 다른 업체들도 잇따라 차량 디자인을 유선형으로 전환했다. 게임의 규칙을 바꾼 것이다.

1955년 등장한 대형 세단 C300은 오늘날(300C)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명차다. 이 차량의 심장인 최고 출력 300마력짜리 ‘V8 헤미’ 엔진 역시 자동차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품이다. C300의 숫자는 300마력을 뜻하는 말이다. 강한 출력과 존재감 강한 디자인은 미국 자동차의 상징인 ‘머슬카’를 대표하는 차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기술과 디자인 혁신을 통해 미국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크라이슬러도 위기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전 세계에 몰아친 오일쇼크는 회사의 기반을 흔들었다. 현지 업체 인수·합병(M&A)을 통해 진출한 유럽 시장은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유럽 3사를 모두 프랑스 푸조에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상황을 호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크라이슬러는 1920년 맥스웰이 그랬던 것처럼 인물 한 명을 영입한다.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네.” 1978년 7월 13일 오후 3시 미국 디트로이트 인근 디어본의 포드 본사 회장실. 헨리 포드 회장이 아이아코카 사장에게 이같이 통보했다. “이게 회사를 위한 최선의 길일세.”

아이아코카는 포드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포드의 대표작인 머스탱을 개발해 ‘머스탱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아이아코카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판단해 그를 해고했다.


포드에서 쫓겨난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아코카가 포드에서 쫓겨난 건 크라이슬러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다. 포드를 떠난 지 4개월 만인 1978년 11월 크라이슬러에 입사한 아이아코카는 회사 경영에 대한 전권을 쥐고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당시 크라이슬러 내에는 무려 35명의 부사장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들 부사장들 간의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판매 부진과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 원칙 없는 자금 집행은 사내 금고를 바닥나게 했다. 1978년 GM은 미국에서 540만 대를 팔았고 포드는 260만 대로 그 뒤를 이었다. 크라이슬러는 포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0만 대를 팔았다. 게다가 크라이슬러 차량을 구매한 소비자들 중 3분의 2가 제품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대로라면 크라이슬러에 미래는 없었다.

아이아코카는 3년 동안 35명의 부사장 중 33명을 해고했다. 조직의 곪은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낸 것이다. 한 달에 부사장 한 명씩 짐을 싸자 조직에 긴장감이 돌았다. 인력 조정과 함께 제품 혁신에도 나섰다. 1984년 출시한 7인승 미니밴 ‘캐러밴’이 대표적이다. 왜건과 밴의 장점을 섞은 차량으로 왜건보다 널찍한 실내 공간, 일반 밴보다 작고 실용적인 크기가 특징이었다. 캐러밴은 ‘미니밴’이라는 세그먼트를 만들며 블루오션을 장악했다. 도요타 시에나, 혼다 오디세이, 기아차 카니발 등이 캐러밴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차량이다. 아이아코카의 제품 혁신으로 1980년대 크라이슬러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1980년 미국 생산 대수(미국 내수, 수출 합산)는 75만8000대까지 줄어들며 부진했지만 1988년엔 172만 대로 저점의 2배를 훌쩍 넘을 정도로 호조를 나타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오일쇼크 넘어 전설이 된 아이아코카
1980년대는 크라이슬러에 행운이 따르던 시기였다. 아이아코카의 경영과 함께 회사의 캐시카우 역할을 담당하는 효자가 집안에 들어왔다. 1987년 인수한 미국에서 넷째로 큰 제조사, 아메리칸모터스다. 1954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프’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지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으로 개발됐다. 당시 미 국방부는 ‘최고 시속 80km, 차체 무게 590kg, 적재량 0.25톤, 승차 정원 3명’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윌리스 오버랜드의 ‘윌리스MB’가 계약을 따냈다. 특유의 각진 디자인과 오프로드 주행 성능으로 종전 후 민간용으로도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오늘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원조로 매년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6개 자동차 회사만 살아남는다”
크라이슬러는 M&A와 함께 다른 업체와의 합작을 통한 시장 확대도 노렸다. 미쓰비시와의 20년 인연이 그것이다. 1971년 미쓰비시의 지분 15%를 취득해 협력 체제를 구축한 뒤 미쓰비시에 미국의 크라이슬러 판매망을 이용하도록 했다. 이 판매망은 1981년 미쓰비시가 독자 판매망을 구축할 때까지 유지됐다. 미쓰비시가 4기통 엔진을 크라이슬러에 공급하는 등 기술 협력도 진행했다. 현재 현대차가 크라이슬러, 미쓰비시에 엔진 블록을 수출하고 있다. 이는 현대차가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제조 기술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는 1988년 미쓰비시의 기업공개(IPO)를 계기로 지분율을 20%까지 늘렸다. 두 회사의 관계는 20년 넘게 이어졌고 1993년 크라이슬러가 미쓰비시 지분을 매각하면서 종료됐다.

미쓰비시와 협력이 종료된 후 크라이슬러는 다른 협력자를 찾아 나섰다. 1990년대에는 기업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의 M&A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1995년 다임러 벤츠의 수장 자리에 오른 위르겐 슈렘프 회장이 말한 “미래에는 전 세계에서 6개 자동차 회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미국 빅 3 중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크라이슬러에는 신경 쓰이는 예언이었다. 그리고 슈렘프 회장 취임 3년 뒤인 1998년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전격 합병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단숨에 글로벌 자동차 강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슈렘프의 예언은 틀렸고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실적은 악화됐다. 크라이슬러는 또다시 세찬 바람에 흔들렸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