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T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공업 역사 바꿔, 유럽·일본 브랜드 잇달아 인수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초에 한 대’…자동차 대중화 시대 연 포드
“차는 귀족의 장난감이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에서 포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자동차 산업사를 이야기할 때도 포드를 제외하는 건 불가능하다. 창업자 헨리 포드는 20세기 미국을 넘어 세계 자동차 산업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대량생산을 통한 자동차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민들도 탈 수 있는 저렴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경영 철학이었다. 모델 T에서 머스탱까지 이어지는 포드의 대표작들이 그 결과물이었다.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가 미국 시장의 패권을 두고 경쟁할 때 자동차 산업은 융성했다. 헨리 포드의 고집은 회사를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았지만 그 고집 때문에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기도 했다.

포드는 초창기 링컨과 머큐리로 브랜드를 확장하고 애스턴마틴·재규어·랜드로버·마쓰다 등을 연이어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다. 미국·유럽·일본을 아우르는 거대한 자동차 제국의 완성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은 제국을 사상누각으로 만들었다. 이때 영입된 보잉 출신의 앨런 멀럴리 최고경영자(CEO)는 누각 위에 올라 칼을 뽑아들었다. 사들였던 브랜드를 모두 다시 매각한 그는 조직을 포드와 링컨 두 브랜드로 단순화했다. 멀럴리 CEO의 판단은 적절했고 포드는 단단해졌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을 때 GM과 크라이슬러는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정부에 손을 벌렸다. 포드는 미국 빅3 중 구제금융을 받지 않은 유일한 회사였다.

헨리 포드는 1863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인근 소도시인 그린필드의 농가에서 아일랜드계 이민 2세로 태어났다. 1879년 열여섯 살의 포드는 ‘미시간 차량회사’라는 자그마한 기계 제작소에 수습공으로 들어가 내연기관 제작을 처음 배웠다. 그는 발명가 에디슨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1891년 엔지니어로 에디슨 전기회사에 입사한 것. 능력을 인정받아 선임 엔지니어로 일하는 한편 집 뒤쪽 작업장에서 엔진 연구와 자동차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1895년 타이어를 사용한 사륜구동 자동차 ‘쿼드리사이클’을 개발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초에 한 대’…자동차 대중화 시대 연 포드
‘대중을 위한 차’…포드 시스템의 탄생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든 건 그로부터 8년 뒤다. 1903년 40세 때 동업자와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를 설립하고 부사장 겸 선임 엔지니어 직책을 맡았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창업 기업인 혼성 주주제(회사의 일정 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방법)를 표방했다. 1908년까지 포드자동차는 알파벳을 딴 모델 A,B,K를 연이어 생산했다. 하지만 대중이 구입하기에는 값이 비싼 데다 기존 자동차 회사들과의 경쟁 심화로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포드는 2500달러에 팔았던 고급 세단 K의 실패를 계기로 ‘대중이 탈 수 있는 저렴한 차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부자들의 장난감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꿔야만 승산이 있다고 봤다. 이것이 825달러짜리 신차 모델 T를 출시한 배경이다. 당시 자동차 평균 판매가격 2000달러의 절반도 안 되는 값이었다. 그 후엔 가격이 더 떨어져 300달러 미만에 판매되기도 했다. 포드는 이때 현대식 생산 공정 혁신의 대명사인 포드 시스템을 도입하며 자동차 산업뿐만 아니라 전체 공업 역사를 새로 썼다. 대량생산을 통한 생산 단가 절감을 고심하던 그는 1913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최초의 조립 공정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가내수공업 방식 생산이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된 결정적 계기였다.

모델 T의 인기는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1923년 모델 T의 연간 생산 대수는 201만 대에 달했다. 16초에 한 대꼴로 자동차를 생산한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본격적인 대량생산 시대를 맞이했다. 모델 T는 1927년 단종될 때까지 1500만 대라는 천문학적인 생산량을 기록했다. 포드는 이렇게 누구나 탈 수 있는 자동차를 탄생시키며 ‘자동차 대중화’의 꿈을 이뤘다.

포드는 차 값을 내렸지만 이에 반비례해 임금을 올렸다. 1914년부터 공장에서 하루 8시간 일하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5달러로 책정했다. 많은 근로자들은 ‘포드맨’이 되기 위해 장사진을 쳤고 포드는 우수한 인력을 뽑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미국 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하는 대가로 받은 금액은 2.38달러였다. 그 덕분에 포드는 중산층을 확대시켰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고집불통 포드…모델 T의 저주
모델 T에 만족한 포드는 이 차량의 단일 생산을 고수했다. 1908년에 설계한 뒤 거의 변하지 않는 T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차로 여겨졌다. 판매량이 하향 곡선을 그리자 포드자동차 딜러들은 ‘새 모델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포드는 자신이 개발한 T의 인기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1917년부터 1923년까지 광고비를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모델 T의 시대였던 1910~1920년대 포드는 충분히 값싼 자동차에만 몰입하면서 시장 변화를 외면하는 실수를 범했다. 1920년대까지 미국 1위 자동차 제조사 자리를 유지하던 포드는 1920년대 말, GM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차례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모델 T는 1927년 5월 31일 1500만7033번째를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됐다.

이후 포드는 모델 A를 개발해 내놓았지만 판매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독선적인 포드의 경영 방식은 1924년까지 미국 자동차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회사를 키웠지만 결국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37년 포드는 크라이슬러에 2위 자리도 내주고 3위로 내려앉았다.

자신의 아들인 에드셀 포드조차 신뢰하지 않은 포드는 82세까지 경영권을 놓지 않다가 결국 1945년 이사회에서 손자인 포드 2세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내와 함께 고향인 그린필드로 돌아온 포드는 2년 후 눈을 감았다. 포드의 장례식 날 미국의 모든 자동차 조립 라인은 1분간 멈춰 섰다. 그 순간 700만 명의 노동자들은 포드를 추모했다. 포드의 시신이 묘지에 안장되는 동안 디트로이트의 모든 자가용 운전자들도 차를 세웠다. 미국 경제학자 존 K 갈브레이스는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포드는 고집불통이었다. 처음엔 그런 고집이 사업에 큰 도움을 줬지만 훗날 그만큼의 해를 입혔다. 성공은 그에게 조언과 충고에 대해 벽을 쌓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천재성이라고 마음속에 그리면서 그걸 믿었다.”

헨리 포드에 이어 포드의 경영권을 쥔 포드 2세는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포드를 이끌며 침체된 회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960년까지 사장으로 재임한 후 회장 자리에 있었다. 그는 1956년 포드를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하지만 포드 일가는 여전히 주식의 40%를 소유한 오너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포드를 대표한 인물로 포드 2세 등 포드가 출신보다, 또 최초의 CEO이자 국방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로버트 맥나마라보다 리 아이아코카를 꼽는 이들이 더 많다. 그가 개발한 스포츠카 머스탱 때문이다.

머스탱은 헨리 포드의 경영 철학을 이어 받은 ‘대중을 위한 스포츠카’였다. 1964년 출시된 후 첫해 40만 대가 팔려나갔고 지난해까지 누적 판매량이 1000만 대에 달한다. ‘미국에서 팔린 스포츠카 2대 중 1대는 머스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머스탱은 스포츠카로 부활한 모델 T였다. 이 차 덕분에 포드는 화려하게 재기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초에 한 대’…자동차 대중화 시대 연 포드
자동차 제국의 불안한 팽창
1945년 포드의 영업 사원으로 입사한 아이아코카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사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포드 2세와의 관계에 균열이 갔고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기세등등한 사장과 이를 경계하는 회장 간의 라이벌 의식이 문제였다. 결국 1978년 포드 2세는 그를 해고했다. 영원한 포드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아코카에겐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회사를 떠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크라이슬러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초의 미니밴 ‘그랜드보이저’를 개발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포드 2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복수의 펀치였다.

포드는 생산 혁신, 제품 혁신을 통해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20세기 산업과 소비문화의 틀을 새로 짰다. 자동차 만드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브랜드를 관리하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1922년 포드는 800만 달러에 ‘링컨 모터 컴퍼니’를 인수했다. 포드가 처음으로 인수한 브랜드로 현재까지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서 운영 중이다. 머스탱의 성공으로 넉넉한 실탄을 장전한 포드는 이 밖에 많은 브랜드를 인수하거나 새로 설립했다.

링컨과 포드 사이에 브랜드 포지셔닝한 머큐리는 1939년 포드가 자체 설립했다. 이후 1958년에도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의 이름을 딴 ‘에드셀(Edsel)’ 브랜드도 발표했다. 하지만 에드셀은 27개월 만에 브랜드를 접었고 1985년 발표한 머큐르(Merkur)도 4년 만에 에드셀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포드는 인수와 제휴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71년 일본 마쓰다와 처음 제휴 관계를 맺었고 1979년 포드가 히로시마에 보유한 부동산과 마쓰다 지분 25%를 교환하면서 자본 제휴를 했다. 포드는 1996년 경영 악화를 겪던 마쓰다의 경영권까지 넘겨받았다. 이후 포드는 1989년 영국 재규어를 시작으로 1994년 영국 애스턴마틴, 1999년 스웨덴 볼보, 2000년 영국 랜드로버를 각각 인수했다. 포드의 몸집은 커졌고 영국·스웨덴·일본을 아우르는 포드 지도가 모양새를 갖춰 갔다.

아이아코카 이후 여러 명의 전문 경영인이 포드를 거쳐 갔다. 해럴드 폴링(1990~1993년), 알렉스 트로트만(1993~1998년), 잭 내서(1999~2001년)가 지휘봉을 잡았다. 영국의 프리미엄 브랜드들을 하나 둘 인수할 당시 포드의 상황은 안정적이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누적 순이익은 56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중 60%를 차지하는 순이익 330억 달러가 1998년부터 2000년에 집중됐다. 하지만 이익을 내지 못하는 부실한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포드의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여기에 잭 내서의 무리한 애프터 마켓 사업 확장은 회사를 적자의 늪에 빠뜨렸다. 포드는 2001년 2분기부터 2002년 1분기까지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1999년 최고 37달러까지 올랐던 포드의 주가는 2002년 8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포드 2세의 아들인 빌 포드가 경영 전면에 나서며 회사를 챙겼지만 회사의 어려움을 가중됐다.

난관에 봉착한 빌 포드는 구원투수 한 명을 영입해 온다. 날카로운 메스를 대고 포드를 분해 결합한 인물, 앨런 멀럴리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