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계 스타 CEO 출신 멀럴리 선제적 구조조정…‘원 포드’ 발판 글로벌 확장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금융 위기 비켜 간 포드, 중국 시장 정조준
2005년 항공 업계가 들썩였다. 만년 2위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이 수주 실적에서 1위 업체인 에어버스를 앞섰기 때문이다. 역전의 주인공은 보잉787 드림라이너다. 이 항공기는 동체와 날개를 알루미늄이 아닌 탄소 복합 소재로 만들어 무게를 줄였고 연료비도 함께 절약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1년 3월 미국 자동차 시장이 들썩였다. 만년 2위 자동차 제조사인 포드(21만2777대)가 제너럴모터스(GM, 20만6621대)를 제치고 월간 기준 판매 1위 자리에 올라섰다. 1998년 이후 13년 만에 맛본 1위였다. 이 두 사건의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앨런 멀럴리다. 보잉에서 37년간 일하며 경영능력을 검증받은 그는 무리한 인수·합병(M&A)에 따른 재정 부담과 판매 부진으로 적자를 기록하던 포드의 운전대를 잡았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품질 향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포드의 파워트레인과 디자인 경쟁력 강화를 통해 미국 자동차 명가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창업주 헨리 포드의 증손자인 빌 포드 회장은 경영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멀럴리와 같은 인물을 과감히 최고경영자(CEO)로 등용하면서 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포드는 미국의 빅 3 중 유일하게 창업주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자동차 제조사이자 2008년 미국 전역을 휩쓴 경기 침체의 광풍 속에서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지 않은 회사였다.


위기 자초한 ‘풀 서비스 업체’ 전략
포드는 1999년 두 명의 인물을 경영 전면에 내세웠다. 1월 1일자로 잭 내서 포드 자동차 부문 사장을 포드 사장 겸 CEO 자리에 앉혔다. 같은 해 3월 PAG 총괄에 BMW 출신의 볼프강 라이츨레를 영입해 앉혔다. PAG(Premier Automotive Group)는 포드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묶어 만든 조직이다.

내서는 1947년 레바논에서 태어났으며 1968년 포드 호주법인의 재무분석가로 입사한 후 포드 호주법인 사장, 유럽 포드 회장 겸 자동차 부문 부사장, 제품개발담당 부사장 등을 거쳤다. 미국보다 변방에서 경력을 쌓아 온 그는 관료주의에 물든 디트로이트 본사 조직을 쇄신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이와 함께 독일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BMW를 이끌어 온 라이츨레가 PAG를 성장시킬 적임자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포드는 1989년 영국 재규어를 시작으로 1994년 영국 애스턴마틴, 1999년 스웨덴 볼보, 2000년 영국 랜드로버를 각각 인수했다. 라이츨레는 1998년 65만 대 규모인 PAG의 판매량을 2004년까지 100만 대로 확대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내서는 이와 함께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세계 최고의 자동차 풀 서비스 업체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도 내놓았다. 그가 제시한 ‘트랜스포메이션 앤드 그로스(Transformation & Growth)’ 전략의 핵심은 자동차 판매 이후의 시장인 애프터 마켓 사업 확장과 고급차 부문 강화였다. 애프터 마켓 매출액은 1997년 3억 달러에서 2002년 10억 달러까지 늘릴 방침이었다. 2만 달러짜리 자동차가 생애주기 동안 정비·주유·보험을 통해 6만8000달러의 매출을 발생시킨다는 논리다. 이를 위해 그는 1999년 4월 영국 내 2000개 서비스센터를 운영 중인 스코틀랜드 자동차 정비 체인 ‘퀵-핏(Kwik-Fit)’을 16억 달러에 인수했다. 렌터카 사업 부문인 허츠(Hertz)의 잔여 지분 18%도 모두 사들였다.

하지만 내서의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2001년 유럽과 미국 경기의 동반 침체와 미국 시장의 경쟁 심화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악화된 경영 환경은 무리한 투자와 맞물렸고 실적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포드의 영업이익은 1999년 72억 달러 흑자에서 2000년 35억 달러로 줄어들더니 2001년에는 55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1년 10월 말 내서는 물러났다. 1999년 1월 취임한 뒤 34개월 만이다. 창업주 헨리 포드의 증손자이자 이사회 회장이었던 윌리엄 클레이 포드 2세, 즉 빌 포드가 전면에 나섰다.

빌 포드는 조직의 체계를 다잡기 시작했다. 이미 2000년 5월 영국 런던 동북부의 다겐햄 공장을 폐쇄해 1900명을 감원하는 등 유럽 지역 구조조정에 들어간 포드는 2000년 6월 부품 계열사인 비스테온을 분리했다. 2001년 8월에는 사무직 5000명을 감원하는 내용의 구조조정 안을 발표했고 2002년 6월 이를 완료했다. 이와 함께 2002년 1월, 엔진 공장과 3개 트럭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1만 9000명의 파트타임 근로자 해고 등을 포함한 장기 구조조정안도 발표했다. 2002년 8월에는 퀵-핏을 다시 매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체질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9년 최고 37달러까지 기록했던 주가는 2002년 8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포드·링컨 브랜드 남기고 모조리 매각
GM과 크라이슬러 등 전통의 경쟁자는 물론 도요타·혼다·닛산 등 일본 빅 3가 미국 시장을 파고들었다. 현대차도 미국 시장에 상륙해 판매량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비대하고 약한 포드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포드는 특히 픽업트럭 시장의 축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250만 대였던 시장 규모가 2006년 230만 대 수준으로 감소했다. F 시리즈로 픽업트럭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해 온 포드가 심각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빌 포드에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2006년 9월 포드는 앨런 멀럴리를 영입할 것이라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에서 37년간 재직했던 항공 산업계의 스타 최고경영자(CEO)였다. 보잉 777과 787 드림라이너 개발을 주도하며 보잉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빌 포드가 그를 눈여겨본 것은 9·11 사태 이후 적자에 허덕이던 보잉에서 부사장으로 일할 때다. 당시 멀럴리는 민항기 사업부문의 전체 고용자 9만4000명 중 30%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안을 내놓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유럽 에어버스와의 수주 경쟁에서 밀리던 보잉의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노사문제도 깔끔하게 해결한 멀럴리는 포드가 탐낼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멀럴리가 자동차 업계와 무관한 경력을 갖고 있다며 그의 영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멀럴리는 2006년 10월 1일 포드로 배지를 바꿔 달았다. 그는 ‘뉴 웨이 포워드’ 계획을 추진하게 됐다. 2007년 1분기까지 연봉직 직원의 3분의 1인 1만 4000명을 감축하고 기존에 폐쇄하기로 했던 14개 공장 이외에 2개 공장을 추가로 폐쇄해 북미 지역 생산능력을 2008년 말까지 2005년 대비 26% 감소한 360만 대로 축소하기로 했다.

포드와 링컨을 제외한 다른 브랜드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2007년 애스턴마틴을 프로드라이브에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랜드로버와 재규어를 인도 자동차 회사 타타그룹에 넘겼다. 2010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볼보를 중국 지리자동차에 팔았고 자체 브랜드인 머큐리를 폐지했다. 이 밖에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마쓰다의 지분도 대부분 매각했다. 포드는 1996년 경영난에 빠진 마쓰다의 지분 33.4%를 인수하며 경영권까지 행사했지만 2008년 20%를 매각했고 2010년 8%를 추가로 내놓았다. 현재 포드는 마쓰다 지분 2.1%만 갖고 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금융 위기 비켜 간 포드, 중국 시장 정조준
브랜드 매각으로 실탄을 확보한 멀럴리는 포드 정상화를 위한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회사 로고를 비롯한 미국 내 모든 자산을 담보로 채권단으로부터 235억 달러를 빌렸다. 포드는 이 자금으로 핵심 사업에 투자하면서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회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경쟁 업체인 GM과 크라이슬러가 2008년 금융 위기로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던 당시 포드 역시 하루 적자가 8300만 달러(936억 원)에 달하는 위기를 맞았다. 주가는 1.01달러까지 추락했다. 포드의 신용 등급은 정크본드 수준인 ‘Ba1’이었다. 하지만 위기를 예견한 듯한 멀럴리의 선제적인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확 바꾼 포드는 자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갈 준비가 돼 있었다.


멀럴리, 포드 떠나 구글 이사회 합류
2014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국제오토쇼(NAIAS)’, 빌 포드와 앨런 멀럴리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포드는 전통적으로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의 발표회를 열어 왔다. 이날 빌 포드와 멀럴리는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무게를 기존 모델에 비해 317kg이나 줄인 ‘올 뉴 F-150’ 픽업트럭을 소개했다. 이 차량은 포드가 엔진 배기량을 줄이면서 출력은 높인 다운사이징 기술을 적용한 2.7리터짜리 ‘에코부스트 엔진’을 탑재했다. 발표회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은 새로운 소재와 기술로 무장한 신차에 놀랐다. 빌 포드가 다시 한 번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올해는 작년보다 두 배 많은 23종의 신차를 내놓겠습니다. 중국에 공장 2개를 신설해 생산량도 늘리겠습니다.”

2007년 655만5000대에 달했던 포드의 판매량은 2008년 553만2000대, 2009년 481만7000대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2010년 552만4000대, 2011년 565만4000대로 다시 상승세를 탔다. 지난해에는 633만 대로 금융 위기 이전 실적을 회복했다. 주가도 2008년 이후 4년 만에 12달러를 기록했고 최근엔 17.36달러(2014년 8월 19일 종가 기준)까지 상승했다.

금융 위기 이후 포드가 전사적으로 추진한 ‘원 포드(one Ford)’ 전략도 부활의 발판이 됐다. 포드는 과거에 각국 법인과 연구 조직이 제각기 움직여 차량 개발과 생산이 비효율적이었다. 원 포드 전략은 모든 조직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방대했던 모델과 플랫폼(차체)을 통합하는 것이 골자였다. 비용은 절감됐고 차량의 품질은 개선됐다. 연료 효율성을 높인 에코부스트 엔진의 적용 차종을 늘리는 한편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도 꾸준히 늘리며 친환경 시대도 착실하게 준비했다.

같은 해 7월 1일 포드 부활의 주역인 멀럴리는 CEO에서 물러났다. 그는 2006년부터 8년간 포드의 선장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멀럴리는 포드를 떠난 지 8일 만인 7월 9일 구글 이사회 멤버로 합류했다. 구글은 운전자 조작 없이도 스스로 목적지까지 움직이는 자율 주행 자동차를 연구 중이다. 업계에선 멀럴리가 구글의 자동차 사업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세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빌 포드 회장은 후임으로 마크 필즈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새 CEO로 임명했다. 북미사업부 대표를 역임하던 필즈 COO는 25년간 포드에서 근무한 ‘포드맨’으로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북미사업부를 흑자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포드는 GM에 이은 미국의 둘째 자동차 제조사다. 하지만 글로벌에선 빅 5에서 밀렸다. 포드는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판매 확대로 회사 규모를 키울 방침이다. 새로운 국면을 맞은 포드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