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역사 지닌 프랑스 자존심…경기 침체 못 버티고 둥펑차에 지분 매각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재도약 위해 중국 자본에 손 내민 푸조
“프랑스의 자존심 푸조, 중국에 손을 벌리다.”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 푸조-시트로엥 오토모빌(PSA) 이사회가 2014년 2월 18일 중국 둥펑자동차와 프랑스 정부에 회사 지분을 14%씩 매각하는 증자안을 승인하자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이 긴급히 이 소식을 타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경쟁자인 르노자동차는 독일 나치군 협력 요구에 응했지만 푸조 가문은 직원들에게 생산 시설을 파괴하는 사보타주를 허락하면서까지 나치에 끝까지 저항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라며 “200년 역사의 푸조가 대형 트럭을 만드는 신생 기업 둥펑자동차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크다”고 전했다.

PSA도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2013년 유럽 시장 판매량은 131만 대로, 전년 대비 8.4% 감소했다. 유럽 시장 의존도가 60%에 달하는 만큼 내상이 깊었다. 중국 둥펑의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대규모 구조조정과 경영난이 불가피했다.


1810년 창업…벤츠 다음으로 오랜 역사
프랑스 국민 여론도 좋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 정부가 나섰다. PSA가 중국 기업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증자에 참여해 각각 똑같은 지분을 갖기로 한 것이다. 현재 PSA의 지분 14%는 둥펑에 있다. 둥펑은 PSA 이사회에 2명의 이사를 참여시켰다. 이사회는 티에리 푸조 회장 대신 프랑스 최대 자동자 제조회사 르노의 2인자인 카를로스 타바레스를 PSA의 새 회장으로 임명했다.

자동차 100년, 철강 업체로 그보다 더 이전 100년의 역사를 가진 푸조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 기업이다. 그 자체로 프랑스 산업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초창기부터 유럽 자동차 산업의 맨 앞자리를 차지해 온 푸조는 마케팅의 귀재로 불리는 시트로엥과 1975년 합병한 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위기를 헤치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위기 역시 끊임없이 PSA를 되찾아 오며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푸조의 설립은 18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0년 장 피에르 푸조가 프랑스 벨포트에 철강 공장을 세운 것이 오늘날 푸조의 토대가 됐다. 장 피에르 푸조는 각종 톱날과 커피 그라인더, 재봉틀 등을 생산했다. 장 피에르 푸조의 손자인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는 영국 유학 중 눈여겨본 자전거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871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1882년 그랑 비(Grand bi)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랑 비는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가 작은 형태였다.

자전거 사업으로 회사를 키운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1889년 증기기관 차량 전문가인 레옹 세르폴레의 도움을 받아 1889년 푸조의 첫 자동차인 ‘세르폴레 푸조’를 개발했다. 이 삼륜차는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됐다. 하지만 판매 실적은 저조했다. 아르망 푸조는 독일의 고틀리프 다임러가 발명한 가솔린엔진을 탑재한 사륜 자동차를 개발했다. 1891년 출시된 타입3는 시장의 반응도 좋았다. 1892년 29대, 1894년에는 40대로 판매량이 늘었다. 이 차량은 제품의 내구성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브레스트 사이클 대회’에 감독 자격으로 참여했다. 타입3는 총 1500마일(2000km)을 139시간 만에 완주하며 품질을 인정받았다. 1894년에는 타입7으로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 대회인 ‘파리-루앙 트라이얼’에 참가해 127km를 달려 총 102대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하기도 했다.

1896년 푸조 자동차(Peugeot Automobiles)를 설립했다. 1886년에 설립된 벤츠의 뒤를 이어 유럽에서 설립된 둘째 자동차 회사다. 이때부터 푸조는 엔진 독자 개발에 나섰고 1899년 내놓은 타입15은 300대가 팔렸다. 프랑스 전체 판매량의 25%를 차지하는 수치다.

1912년에는 에토레 부가티가 개발한 855CC 4기통 엔진을 탑재한 소형차 ‘베베’를 출시했다. 세계 최초로 실린더 한 개에 네 개의 밸브와 캠샤프트를 갖춘 DOHC 엔진이었다. 유럽의 랠리와 그랑프리,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레이스를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보이며 성능과 내구성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에토레 부가티는 프랑스의 슈퍼카 브랜드 부가티의 창립자다.

1931년에는 세계 최초로 독립식 서스펜션을 장착한 소형차 201을 내놓았다. 이는 푸조 특유의 가운데 ‘0’을 넣는 작명법이 처음 적용된 차이기도 하다. 1934년에는 최초의 하드 톱 컨버터블 모델인 401 이클립스를 출시했다. 201의 넷째 모델인 푸조 204는 1969~1971년에 걸쳐 3년간 프랑스에서 베스트 셀링 카 자리에 올랐다. 1970년 푸조의 연간 생산량은 50만 대, 르노에 뒤를 이어 프랑스 2위 업체로 성장했다.


‘마케팅의 귀재’ 시트로엥 인수
1919년 설립된 시트로엥 역시 창업주 앙드레 시트로엥의 이름을 딴 브랜드다. 시트로엥이 회사를 알리는 방법은 특이했다. 창의력을 바탕으로 고정관념을 깨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에펠탑에 전구 25만 개로 설치해 만든 ‘시트로엥(CITROEN)’이라는 글자는 역사상 최초의 옥외 광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1년 신차 ‘B2’의 단단함을 알리기 위해 세계 최초로 사하라사막을 횡단했다. 1925년에는 ‘B12’에 코끼리를 올려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차량의 안전성을 알리기도 했다.

시트로엥은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스티어링 휠을 돌리고 나면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셀프센터링이 시트로엥의 대표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시트로엥은 1974년 석유파동으로 경영난에 처했다. 결국 시트로엥은 두 손을 들었고 프랑스 정부는 푸조의 손에 쥐여 줬다. 시트로엥은 푸조에 인수·합병(M&A)됐다. 시트로엥의 마세라티는 아르헨티나 출신 레이싱 드라이버 데 토마스에게 매각됐다.

푸조는 시트로엥 인수 후 회사 이름을 푸조-시트로엥 자동차(PSA)로 바꿨다. 푸조는 1978년 미국 크라이슬러로부터 프랑스·영국·스페인에 있는 생산 공장도 사들였다. 경영 악화로 해외 사업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크라이슬러와 시장 확대가 필요한 푸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푸조는 이들 회사를 ‘탈보’로 바꿨다. 같은 해 심카도 PSA의 울타리로 가져왔다. 심카는 1935년 설립된 프랑스 자동차 회사다. 이 같은 M&A로 PSA의 생산량은 프랑스 내에서만 200만 대, 스페인과 영국을 합해 250만 대에 달했다.

PSA는 한층 커진 덩치를 무기로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1958년 설립된 미국 판매 법인에 힘을 실어 줬고 1984년 중국 둥펑자동차와 합자회사 둥펑 푸조-시트로엥을 설립해 현지 시장에도 진출했다. 기술제휴도 활발했다. 1960년대부터 또 다른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와 합작회사를 설립해 가솔린엔진과 변속기를 함께 개발했다. 1970년대엔 피아트와 밴의 디자인과 생산 기술을 공유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재도약 위해 중국 자본에 손 내민 푸조
활발한 M&A와 기술제휴에도 불구하고 PSA는 부침을 겪었다. 1983년 이후 33% 이상을 유지하던 PSA의 내수 점유율은 1993년 29.7%까지 떨어졌다. 유럽연합(EU) 출범 후 시장이 통합되면서 경쟁 업체들이 프랑스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쟁 업체인 르노가 선전한 것도 부진의 요인이었다.

푸조는 1990~ 1993년 사이에 출시된 모델 중 새로운 차종이 4개에 불과할 정도로 노후화가 심각했다. 주력 차종인 푸조 205는 1983년 출시 이후 풀 체인지(완전 변경) 없이 판매되고 있었다. 시트로엥 AX 역시 1986년 이후 변화가 없었다.

내수 점유율 하락과 서유럽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 부진까지 겹치자 PSA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해외 사업을 정리했다. 1991년 일본 소형차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미국에서 철수했고 이어 1997년 중국과 인도 시장에서도 발을 뺐다.


푸조·둥펑·프랑스 정부…불안한 동거
위기의 터널을 지나자 전성기가 찾아왔다. 1999년 PSA는 폭스바겐에 이은 서유럽 2위 제조사 자리를 탈환했다. 서유럽 판매량이 1999년 215만 대에서 2001년 254만 대로 급증하면서 같은 기간 두 회사 간의 점유율 격차도 6.6% 포인트에서 4.4% 포인트로 좁혀졌다. PSA의 글로벌 판매량은 1999년 252만 대에서 2001년 313만 대를 기록했다. 첫 300만 대 돌파였다.

이는 PSA가 갖고 있는 디젤엔진 기술력이 디젤차 판매 증가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2001년 서유럽의 디젤차 점유율은 전체의 36%를 차지했다. 특히 프랑스는 56%에 달할 정도로 디젤차의 비중이 높았다. 소음이 적고 성능과 연비가 좋은 커먼레일 기술을 가진 PSA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솔린엔진 기술에 강점을 보여 온 르노는 다시 PSA에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조직 개편도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동안 PSA는 푸조와 시트로엥 두 개의 조직을 별도로 운영해 왔다.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경영진은 제품 개발·구매·생산을 일원화해 관리하는 총괄본부 개념의 푸조-시트로엥 오토모빌 S.A(PSA S.A)를 설치했다. 기존 푸조와 시트로엥에는 판매와 서비스 부문만 남겨 놓았다. 중복되는 업무가 사라지고 연구·개발(R&D), 제품 전략, 부품 구매 등이 함께 진행되자 비용 절감, 제품 개발 기간 단축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PSA의 영업이익은 2002년 26억 유로로 정점을 찍은 뒤 다시 하향 곡선을 그렸다. 2009년에는 6억9000만 유로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유럽을 강타한 경기 침체의 쓰나미에 내부 디자인과 소재의 고급화라는 감성 품질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이 부진을 부추겼다.

결국 PSA는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손을 벌렸다. 2014년 2월 둥펑과 프랑스 정부의 투자를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업자인 푸조 가문은 지분 25%를 보유하고 있고 의결권은 38%를 행사하고 있었다. 둥펑과 프랑스 정부가 각각 8억 유로(1조1720억 원)를 투입해 증자에 참여함으로써 푸조·둥펑과 프랑스 정부가 각각 14%씩 지분을 나눠 가졌다. 푸조 가문은 이사회 멤버를 4명에서 2명으로 줄였다. 지분 참여를 하는 세 주체가 2명씩 똑같이 이사회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계약에서 푸조·둥펑과 프랑스 정부 등 3자는 앞으로 10년간 각자 지분을 늘릴 수 없도록 했다. 10년간 지분 경쟁보다 회사를 살리는 데 집중하자는 뜻이다. 각각의 목표는 뚜렷하다. 푸조 가문은 다시 절대적인 소유주의 위치로 복귀하고 싶을 것이다. 둥펑은 유럽 시장 확대의 핵심 기지 마련을 위해 PSA 인수를 추진할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내 9만 명, 연관 산업까지 20만 명에 달하는 일자리 보전을 위해 지분을 내려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랜 역사만큼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PSA, 또다시 격동의 10년이 시작됐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