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각 위기 때 독자 노선 선회, 노조·주주 손잡고 독일 프리미엄 차 1위 올라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벤츠 넘어선 BMW…크반트家의 결단
“BMW를 다임러 벤츠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회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1959년 12월 9일 독일 뮌헨의 BMW 본사, 주주총회가 열린 강당에서 BMW의 한 직원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총회에 참석한 노조 조합원들과 주주들도 박수로 이를 지지했다. 이날 주주총회에선 BMW의 다임러 벤츠 매각 여부를 안건에 부친 상태였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BMW의 이사회가 제안한 회생 방안이었다. 노조와 소액주주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하며 BMW의 독자 생존을 주장했다. 중년의 남성이 말없이 이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BMW의 대주주 중 한 사람인 헤르베르트 크반트였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저는 이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임러 벤츠 매각을 찬성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BMW의 직원분들과 주주들의 애사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생각을 바꿨습니다. BMW가 매각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당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매각을 백지화한 헤르베르트 크반트는 그의 이복동생 하랄트 크반트와 사재를 털어 BMW 지분을 30%에서 50%까지 늘렸다. 노조는 생산성과 품질 향상으로 화답했다. 소비자들은 타면 탈수록 재미있는 BMW를 찾기 시작했다. BMW의 판매량은 급증했다.


1959년 경영난으로 벤츠에 매각 위기
헤르베르트 크반트가 결단을 내린 지 47년 뒤인 2006년. BMW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디를 제치고 독일 프리미엄 3사 중 1위 자리에 올랐다. 벤츠에 대한 멋진 복수였다. 비행기 엔진 제조사에서 모터사이클 회사로 변신한 뒤 또다시 자동차로 영역을 확대한 BMW는 현재 최고급 세단 롤스로이스와 영국의 국민차 미니 등을 거느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13년 독일 엔지니어인 칼 라프가 뮌헨 지역에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인 ‘라프 모토렌 베르케(라프 엔진 제작소)’를 설립해 독일 공군에 엔진을 납품했다. 이보다 앞선 1910년 또 다른 독일 엔지니어인 구스타브 오토가 항공기 엔진 제작을 시작했다. 1916년 칼 라프는 경영난을 겪고 있던 구스타브 오토의 회사를 흡수 합병했다. 이 회사는 이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Bayerische Motoren Werke:바이에른에 있는 엔진 공장)’, BMW로 사명을 변경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로 칼 라프 밑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요제프 포프였다. 그가 경영권을 장악하고 사명까지 변경하자 라프는 회사를 떠났다. 창업자는 없었지만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막스 프리츠라는 솜씨 좋은 엔지니어가 경쟁력 높은 항공기 엔진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막스 프리츠는 이후 모터사이클 부문에서도 역량을 발휘하며 BMW의 성장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BMW의 로고는 바이에른 주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알프스의 눈을 나타내는 흰색이 바탕이다. 원을 4등분해 색상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프로펠러를 상징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 사업을 확장한 BMW의 역사를 담았다.

BMW는 제1차 세계대전 때 12기통 전투기 엔진을 납품했고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독일이 패전한 뒤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항공기 엔진을 포함한 무기류를 3년간 만들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벤츠 넘어선 BMW…크반트家의 결단
BMW는 하늘에서 땅으로 눈을 돌렸다. 생존을 위해 1923년 모터사이클, 1928년 자동차 사업에 차례로 뛰어들었다. BMW가 처음 내놓은 모터사이클 R32는 막스 프리츠가 개발했다. 1923년 프랑스 파리모터쇼와 독일 베를린 모터쇼가 데뷔 무대였다.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BMW의 노하우는 모터사이클 부문에서 빛을 발했다. 실린더가 횡 방향으로 놓여 서로를 마주보며 피스톤 운동을 하는 수평대향 2기통 엔진(일명 복서엔진)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다. 1925년까지 ‘브리티시 식스 데이즈 오프로드 챔피언십’을 비롯한 100여 회의 모터사이클 경주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는 판매 실적으로 이어졌다. BMW는 1938년까지 누적 생산 대수 10만 대를 기록하는 등 성장 곡선을 이어 갔다.


나치 협력 고백한 1200쪽 보고서
자동차 사업 진출은 1928년 1000만 마르크에 독일 자동차 회사 딕시(Dixi)를 인수·합병(M&A)하면서 이뤄졌다. 딕시는 1896년 독일 튀링겐 주의 아이제나흐에 설립됐다. 하지만 창업자인 하인리히 에어하르트는 1903년 엔지니어인 윌리 섹에게 경영권을 넘겼고 이듬해인 1904년 처음으로 자동차 ‘딕시’를 출시했다. 1909년에는 최고 출력 14마력의 4기통 엔진이 탑재된 소형차 R8을 650대 생산하기도 했다. 이후 1921년 철도 차량 제조사인 고타왜건파브릭에 인수된 딕시는 1927년 영국 자동차 회사 오스틴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2인승 자동차 ‘오스틴 세븐’을 생산했다. 이듬해 BMW에 둥지를 튼 딕시는 1939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BMW 자동차 제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중 1936년 출시된 2인승 레이싱카 BMW 328은 당대의 명차로 인정받고 있다. 강철로 만든 프레임(차체의 기본 틀)과 리어 액슬(후방 차축), 앞바퀴에 달린 독립식 서스펜션(충격 완충장치)은 당시 BMW가 가진 모든 기술이 집약됐다.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총 172회의 자동차 경주에 출전해 141차례 우승했다. 가장 대표적인 레이싱 경주는 1000마일(1600km)을 달리는 이탈리아의 밀레 밀리아였다. BMW는 1938년 328로 평균 속도 시속 166km의 기록으로 우승하며 내구성과 성능을 인정받았다. BMW가 자동차로 이름을 알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비행기와 비행기 엔진 제조로 돌아선 BMW는 독일의 패전으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1948년 법정 관리에 들어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은행가 한스 칼 폰 만골트-레이볼트가 BMW를 인수했다. 1951년 자동차 사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모터사이클과 항공기 엔진에 의존해 사업을 꾸려가던 BMW는 1959년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했다. 다임러 벤츠에 매각해야 한다는 이사회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헤르베르트 크반트와 하랄트 크반트가 지분 확보에 나서지 않았다면 BMW 직원들의 우려대로 다임러의 자동차 생산 하청 기지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크반트 가문은 현재까지 BMW 지배 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 크반트가의 역사는 그들의 아버지 귄터 크반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밧줄 업체와 처가의 섬유 업체를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한 귄터에게 제 1·2차 세계대전은 큰 기회였다. 군수품을 납품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으로 기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했다(이후 크반트가는 2011년 나치 정권에 협력한 사실을 고백하는 12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잘못을 인정했다). 1954년 귄터가 사망할 때 그가 거느리고 있던 계열사는 배터리 제조사 AFA를 포함해 총 200여 개였다. 귄터와 BMW는 모두 히틀러와 관련이 있다. 귄터의 둘째 부인 마그다는 그와 이혼한 뒤 히틀러의 심복인 요제프 괴벨스와 결혼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벤츠 넘어선 BMW…크반트家의 결단
BMW의 부활을 이끈 ‘하네만의 법칙’
헤르베르트는 귄터의 첫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드니 그릴’을 BMW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 망막 질환을 앓아 9세 이후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감각만은 살아 있었다. 사람의 신장 모양을 닮아 키드니 그릴이라고 불린 이 라디에이터 그릴은 1933년 신형 303 시리즈에 처음 달렸다. 이후 1955년 소형차 이세타와 1959년 출시된 BMW 700에서 키드니 그릴이 사라지자 헤르베르트는 이를 되살릴 것을 지시했다.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키드니 그릴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1982년 헤르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BMW의 경영권은 그의 셋째 부인인 요하나와 두 남매에게 상속됐다. 요하나는 1950년부터 비서로 일하다가 1960년 결혼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헤르베르트에게 요하나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헤르베르트에게 경영 관련 정보를 읽어 주면서 자연스레 이 분야에 눈을 뜬 요하나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감독이사회 이사를 맡았다. 맏딸인 주자네는 BMW와 화학회사 알타나의 지분을 상속받았고 독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여성이다. BMW에서 수습 직원으로 일할 때 만난 동료 엔지니어 얀 클라텐과 1990년 결혼했다. 아들 슈테판은 2005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BMW가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1961년, 1500 모델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둔 BMW로 아우토 유니온(오늘날의 아우디)에서 한 사람이 이직해 왔다. 헤르베르트가 영입해 온 마케팅의 귀재, 파울 하네만이었다. 판매이사를 맡은 그는 마케팅과 제품 개발에서 틈새 전략을 강조했다. 한 차량을 시리즈로 개발해 차종을 늘리면 모델의 이미지를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판매로 이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네만이 쓴 전략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4도어 신형 모델을 출시한 1년 뒤에 컨버터블을 내놓는다. 또다시 1년 뒤에는 강한 엔진을 장착한 고성능 모델을 출시한다. 이 같은 성능 개선, 차종 다양화를 7년 동안 유지하면 계속해서 언론과 소비자의 눈과 귀를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하네만의 법칙’이다.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이 같은 전략으로 BMW는 상승 곡선을 탔다. 1963년 20년 만에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이익금을 배정했다. 하네만은 또 벤츠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도발적인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스터 BMW’라고 불렀다. 그가 사람들에게 심어준 BMW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이웃에게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면 메르세데스-벤츠를 탈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무언가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랑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 그는 BMW를 구매할 것이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