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커피 열풍’…디플레는 이미 시작됐다
한국은행이 2016년부터 3년 동안 적용할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정부에 제시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한국은행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정부와 협의해 물가 안정 목표를 설정한 후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한국 경제가 구조적인 디플레이션 상황으로 가는지 깊이 있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10월까지 물가 상승률 0.6% 그쳐
2013~2015년 한국은행이 정부와 협의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치는 2.5~3.5%였다. 하지만 실제 물가 상승률은 그보다 훨씬 낮았다. 2013년과 201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똑같이 1.3%였고 올 들어 10월까지 0.6%로 더 낮아졌다. 가격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 물가 상승률도 2013년부터 올해 10월까지 평균 1.9% 상승한 데 그치며 목표치 하단을 밑돌았다. 한국은행이 물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것이다. 물론 물가 안정 목표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스웨덴·이스라엘 등의 국가에서도 실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를 밑돌았고 2015년에는 이탈 정도가 더 커졌다.

물가 상승률이 이처럼 목표보다 낮아진 것은 우선 수요 측면에서 한국 경제가 잠재 능력 이하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분석(‘통화정책신용보고서’, 2015년 11월)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실제 국내총생산(GDP)이 잠재 GDP 이하로 성장하면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존재하는 가운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3% 포인트 낮아졌다. 게다가 공급 측면에서 국제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한데다 농산물 가격마저 떨어져 물가 상승률이 더 낮아졌다. 한국은행은 최근 3년간 국제 유가와 농산물 가격 하락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각각 0.3% 포인트, 0.1% 포인트 떨어뜨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행은 앞서 본 수요와 공급 요인 외에 물가의 장기 추세를 분석하면서 2012년 이후 물가 상승률 둔화는 구조적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동학(動學 : dynamics)’에 구조적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물가 하락 요인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제조업이 초과 공급 상태에 있다. 이미 기업들이 가동률을 낮춰 대응하고 있지만 수요가 이마저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계는 부실해져 더 이상 소비를 크게 늘릴 수 없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총수요 부양책에도 한계가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진국은 재정 및 통화정책 수단을 거의 소진했다.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하면서 경기를 부양한 결과 미국 등 선진국의 정부 부채가 GDP의 100%를 넘어섰다. 정책 금리는 거의 0%로 인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릴 여지가 없다. 그래서 양적 완화를 단행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내고 있지만 돈이 돌지 않고 있다. 오죽 하면 유럽중앙은행(ECB)이 은행으로부터 예치 받을 때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겠는가.

선국의 금융 위기에도 중국 등 일부 신흥 시장 국가들은 과잉투자로 고성장했지만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각 산업에 공급과잉으로 기업의 가동률이 낮아지고 이익이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1~2년 이내에 기업 부실이 크게 증가하고 이는 은행 부실로 이어져 구조조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

디플레이션 압력은 수요 증가보다 공급 감소로 해소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해야 하고 원자재뿐만 아니라 소비재 가격도 더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가 커피 열풍’…디플레는 이미 시작됐다
‘저가 커피 열풍’…디플레는 이미 시작됐다
고령층 연금 생활자는 물가 하락 원해
한국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제조업의 재고율지수(=재고지수÷출하지수)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본격화했던 2009년 이후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내수와 수출이 다 같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 그래도 수요가 충분하지 않으면 생산을 줄이게 되고 나아가 경쟁력 없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또한 인구 고령화는 구조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 일본에서 1990년 이후 65세 이상 인구가 크게 증가하면서 일본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하고 물가가 떨어졌다. 수명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하면 인구 고령화 비율이 높아진다(물론 두 개의 현상이 같이 나타날 수도 있다). 수명 증가로 한 나라의 인구가 고령화했을 때 그 나라 경제에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고령층의 주요 소득은 연금이나 금융자산이 대부분이고 물가가 하락해야 그들의 실질 구매력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은 긴축적 통화정책마저 선호할 수 있다.

한편 출산율이 감소해 고령사회가 되면 일하는 사람이 줄어 세금 수입이 감소하고 정부 부채가 늘기 때문에 정책 당국은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층은 대부분이 지출을 임금 소득에 의존하기 때문에 임금 상승을 위한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선호할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수명 증가에 의한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면서 거의 20여 년 동안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한국의 인구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2000년 고령화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 7%)에서 12년 만인 2012년 고령사회(14% 이상)에 진입했다. 프랑스 115년, 미국 65년은 물론 일본 24년에 비해 너무 빠르다.

이미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상점에서 1500원으로 생과일주스와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7000원에 맛있는 스테이크를 파는 음식점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강남역 지하상가에는 5000원짜리 옷이 즐비하다. 갈수록 이런 음식점이나 상가가 늘고 이를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과 정부는 물가 변화의 구조적인 요인을 철저히 분석한 후 앞으로 3년간 물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지난 3년처럼 실제보다 높은 물가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맞는 통화정책을 펼친다면 한국 경제는 헤어나기 쉽지 않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낮아진 물가 상승률에 맞게 기준 금리를 재조정하는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함께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까지 고려하면서 다가올 디플레이션을 막아야 한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