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⑭ ] 천재들의 상상력과 기술이 만들어낸 창의적 네트워크, ‘비트코인’의 힘

채굴은 ‘문제 풀이’아닌 ‘공증 과정’이다
(사진)컴퓨터들이 가득 차 있는 암호화폐 채굴장.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비트코인은 강했다’ 저자,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매커니즘캠퍼스 출강] “미친 짓에도 나름대로 조리가 있었다”는 명문장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온다. 비트코인이 미친 짓에 불과할지라도 미국 정부와 중국 정부의 박멸 의지를 꺾고 9년을 버텼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름대로의 조리는 있을 것이라는 궁금증을 가져볼 때도 됐다.

‘암호학’에서 출발한 비트코인

사회 전반적으로 이 신물질에 대한 이해 수준은 아주 낮다. 잘못 표현된 것이 공인된 지식인양 유포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오해는 ‘채굴’과 관련된 단편적 지식들이다. 얼마 전 한 미디어의 기자로부터 비트코인 수학 문제는 누가 출제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컴퓨터 암호학은 ‘함수’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비트코인 채굴도 암호함수를 역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군가 수학 문제 풀기 경연 대회라고 표현한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한 유아용 표현이었겠지만 그만 대중적 지식으로 굳어져 버렸다.

비트코인은 강건한 시스템이다. 비트코인의 강건성은 채굴로 불리는 작업 때문이다. 따라서 채굴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트코인 원리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셈이기도 하니 조금 어렵더라도 이 설명 틀에서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 채굴자는 수학 문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수학 문제라고 알고 있는 ‘함수 값 찾기’는 무작위적인 확률 게임일 뿐이다. 현관의 자동문처럼 숫자 4자리로 이뤄진 암호를 푸는 과정과 유사하다. 컴퓨터는 최대 1만 번을 시도해 암호를 찾을 수 있다. 1초에 몇 차례 무작위 시도를 할 수 있는지는 컴퓨터의 물리적 파워에 좌우된다. 채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컴퓨터는 수학을 잘할 필요는 없지만 경쟁자보다 더 많은 시도를 해야만 승산이 있다. 한 번의 게임이라면 운이 좌우할 수 있지만 반복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에 결국 컴퓨터 파워에 비례해 승리하고 보상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비트코인을 얻는다.

2017년 6월 기준 비트코인 시스템 전체가 1초에 수행하는 암호 풀이 횟수는 50경(5quintillion)이다. 5뒤에 0이 18번이나 붙는 엄청난 숫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분에 한 번씩만 정답이 나올 만큼 난이도가 높다. 보통의 개인 컴퓨터가 우연히 정답을 맞힐 확률은 거의 없다.

비트코인 채굴자는 자신의 컴퓨터가 암호 풀이를 초당 얼마나 시도하는 능력이 있는지(이를 해시 레이트라고 부른다)와 그 과정에서 얼마의 전기요금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고려한다.
비트코인 채굴은 전기를 소모하는 과정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올라갈수록 채굴 경쟁이 치열해진다. 트랙잭션(거래)당 비자카드 시스템이 소모하는 전기의 5000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결제 수단으로서의 비트코인에 미래가 없다고 단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런 오해를 피하려면 비트코인의 역사성을 이해해야 한다. 채굴 혹은 마이닝이라는 어휘 때문에 이 작업이 새로운 비트코인을 얻는 과정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작업은 채굴자들에게 비트코인을 주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채굴의 주요 목적은 거래의 공증(notary)이다. 1994년 컴퓨터 암호학자인 닉 사보가 ‘스마트 계약’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사용한 용어이기도 하다. 당사자들 간의 거래나 계약이 네트워크에서 사람이나 중앙 청산 기관의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계약이나 거래가 공증돼야 한다.

그는 공공이 계약을 공증할 수만 있다면 당사자들 간의 비밀을 유지하면서도 계약이 자동으로 실행되는 ‘스마트 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트코인은 사보의 이론적인 아이디어 이후 14년이 지나서야 이룬 학문적 결실이다. 사보가 사용한 용어들까지도 비트코인에 녹아들어 있어 사보는 베일에 싸인 비트코인 설계자 사토시 나카모토로 의심받고 있다.

대중을 공증 작업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그래서 채굴자들은 공증 작업에 자신의 컴퓨터 파워를 제공하는 대가로 새로운 비트코인과 수수료로 보상 받는다. 이런 유인책을 보고 다수가 참여하고 다수가 공증 작업에 참여할수록 시스템의 안정성은 높다. 이 작업이 전기를 소모하게 설계된 이유는 비용을 들여야만 채굴의 독점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증 작업을 누군가 독점한다면 공공에 의한 확인이라는 개념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독점자가 시스템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할 수 있다. 엄청난 비용을 투입해야만 독점적 지위에 올라갈 수 있는데 그러면 자신이 투입한 비용을 회수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다소 무리가 있는 단순화이긴 하지만 비트코인은 사보의 이론에 채굴이라는 작업 확인 과정을 덧붙여 완성한 시스템이고 천재들의 상상이 이론적으로 보완돼 구체화되기까지 최소한 14년이나 걸린 과학적 협업이다.

비트코인은 정부의 화폐 독점에 노골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중국 같이 강력한 정부들마저 공존을 모색하는 길 외에는 딱히 다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채굴이라는 무대 뒤편의 구조가 경제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짜임새 있으면서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돋보기] 과학자 집단이 이룬 협업의 결실, 비트코인
“오, 신이여. 이것이 우리가 기다려 온 바로 그것이군요”
채굴은 ‘문제 풀이’아닌 ‘공증 과정’이다
(사진) 비트코인의 개념 정립에 큰 역할을 한 암호학자 닉 사보

상업용 웹브라우저와 넷스케이프의 창안자이자 투자자인 마크 안드레센은 비트코인을 처음 보고 “오, 신이여. 이것이 우리가 기다려 온 바로 그것이군요”라고 말했다. 중앙 서버의 도움 없이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는 전자적인 화폐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증명 이후 30년을 기다려 얻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할 피니는 사토시 나카모토에게서 최초로 비트코인을 건네받은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는 당시 암호학계로부터 존경받는 유명한 개발자였다. 할 피니는 2004년 비트코인과 유사한 이머니(e-money)를 개발해 공개한 바 있다.

비트코인은 작업 증명(proof of work)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1997년 영국의 암호학자 아담 백의 논문에 소개된 기법이다. 아담 백 역시 해시 캐시(hash cash)라는 암호화폐를 개발했다. 이 밖에 웨이 다이의 비머니(b-money)와 닉 사보의 비트골드(bit-gold)가 비트코인 설계에 부분적으로 차용됐다고 추론된다.

암호화폐 최초의 상업적 결실은 다비드 차움이 1990년 개발을 주도한 디지캐시(DigiCash)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대와 캘리포니아대의 교수를 역임한 차움은 1983년 출판된 자신의 논문을 기초로 스스로 개발한 암호화폐를 정부들과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상용화하려고 회사를 설립했다. 네덜란드 정부와 도이체방크·크레디트스위스 등과 계약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 비자카드로부터도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회사는 1000만 달러가 넘는 투자를 받았지만 결국 1998년에 파산했다.

씨티은행도 1990년대 암호법에 기초한 새로운 달러 창출에 관심을 갖고 발을 담근 적이 있다. 씨티이캐시(Citi’s e-cash)로 불리던 프로젝트는 비트코인이나 디지캐시처럼 아예 새로운 전자 통화를 만드는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미국 재무부로부터 실험적 운영을 승인받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온라인 뱅킹과 신용카드 기반의 온라인 결제가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중앙은행들과 금융 기업들은 암호 기반 결제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었고 지원하던 프로젝트에서 발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