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자산으로서의 가치’ 지니며 현재까지 이어져…‘채굴업’도 최초로 탄생
비트코인보다 10년 앞섰던 리니지의 아이템 거래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디지털 문화의 확산이 빨랐다. 이 때문에 암호화폐 현상의 전조가 되는 다양한 사회 실험이 있었다. 리니지의 아이템 거래, 싸이월드의 도토리와 OK캐시백이 대표적이다. 2025년까지 비트코인 가격이 25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한 벤처 캐피털리스트 팀 드레이퍼 DFJ 설립자는 가상화폐의 가능성을 이미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온라인 게임에서 봤다고 말한 바 있다.

드레이퍼 설립자가 말한 게임은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다. 20년 된 리니지는 아직도 엔씨소프트 매출의 40%를 차지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게임 산업의 속도를 역행하고 있는 리니지의 고객 충성도는 리니지 세계 안에서 축적된 ‘자산의 가치’와 관련이 크다. 실제로 리니지의 유명한 무기 아이템들은 수천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회사는 공식적으로는 아이템들의 장외거래를 부정한다. 하지만 아이템을 갑자기 늘려 가격을 폭락시키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리니지는 비트코인보다 10년이나 앞섰던 가상화폐 현상이었던 셈이다. 리니지의 아이템들이 고가인 이유는 좋은 무기를 얻기 위해 사냥이나 대결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포커나 화투에서 사용되는 게임머니와 달리 리니지의 아이템은 우연적 요소보다 시간과 땀의 대가라는 것은 법원도 인정해 줬다.

‘아이템 획득’은 시간과 땀의 대가

남들이 시간을 투입해 만든 수준 높은 장비들을 구입해 게임을 즐기려는 수요는 있기 마련이다. 이 수요를 충족시킬 시장은 리니지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고 비트코인 채굴과 비슷한 산업을 촉진했다. 아이템 획득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한 장소에 컴퓨터를 모아 놓고 자동화된 프로그램을 24시간 돌렸다. 이를 마이닝팜이라고 불렀다. 사람 대신 자동화된 프로그램들이 게임 속에 들어가 사냥을 했는데 이를 오토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온라인 게임 회사는 오토프로그램을 사용한 계정을 차단하거나 몰수할 수 있다는 약관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아이템 마이닝은 산업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계정을 차단당하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자산을 잃어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당연히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법원은 오토프로그램과 같이 게임 생태계를 위협하는 행위를 차단하고자 하는 회사의 약관이 정당하다고 봤다. 결국 2011년 아예 법으로 아이템 마이닝 산업을 불법화했다. 게임물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프로그램이나 장치의 유통을 금지하는 조항을 게임산업법에 삽입했다. 게임을 공정하게 즐기게 하기 위해 또 다른 도구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시장을 법으로 금지한 셈이다.

사실 이런 결과는 게임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막는 측면이 있다. 공정한 게임 생태계 보호를 정부에 맡기면 계약 자치의 원칙과 이를 지탱하는 객관성을 포기하게 된다.

게임물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장치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스타크래프트를 경쟁자보다 잘하기 위한 게이머들의 욕망 때문에 키보드와 마우스가 개량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법의 논리에 충실하자면 이런 개량조차 금지해야 한다.

게임 공간을 모니터 내부로 제한하지 않고 크게 본다면 남보다 더 나은 도구를 얻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번 돈으로 아이템을 구입하는 것이 반드시 불공정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공정성 판단을 정부나 법원에 맡기면 정부나 법원의 전지적인 지력과 선한 의도를 전제해야 한다. 이런 전제는 정부의 재량권을 키워 사적자치의 영역을 축소시킨다.

암호화폐 생태계는 처음부터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출발했다. 비트코인의 채굴은 오토프로그램을 활용한 마이닝팜과 유사하다. 하지만 비트코인 채굴에는 반칙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히려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한 경쟁이 시스템을 강건하게 지탱해 준다. 성능이 월등한 전용 칩을 사용하거나 공짜 전기를 찾아낸다면 그건 반칙이 아니라 경쟁력인데 이런 우위는 급속히 확산돼 우위는 결국 사라진다.

외부의 공정한 심판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시스템 내부의 논리만으로 공정한 계약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스마트 콘트랙트의 철학적 배경이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아이템이 스마트 콘트랙트에 기초했다면 코드가 허용하는 한 오토프로그램을 활용한 아이템 획득이나 거래가 모두 가능하다. 이때 게임에 대한 참여자들의 신뢰는 오히려 증대될 수 있다. 중앙 서버를 장악한 회사가 아이템을 무한 생산해 가격을 폭락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의 코드를 활용한 해킹 사건이 발생하면서 스마트 콘트랙트 역시 정부나 법원의 간섭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해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코드를 설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난감한 일은 따로 있다. 일반인이 계약의 내용과 코드가 일치한다는 걸 이해한 후 계약 상대방이 코드의 허점을 이용하지 않을 것까지 미리 알아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계약과 코드의 일치 여부 그리고 코드의 강건성까지 검증해 줄 제삼의 기관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스마트 콘트랙트의 확산은 요원하다.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의 계약을 위해 신뢰할 만한 기업이나 기관에 스마트 콘트랙트 코드의 감리를 의뢰하는 셈이다. 이런 감리 회사와 이용자 사이에서의 법적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도 전통적인 법률 시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돋보기]‘진명황의 집행검 소송’과 스마트 콘트랙트

2013년 60대 여성이 리니지 최고의 무기인 진명황의 집행검을 되돌려 달라는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진명황의 집행검은 당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대에 거래되는 리니지 최고의 아이템으로 이와 관련한 소송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민법 제109조의 착오로 인한 의사표시를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인챈트(무기의 등급을 올리는 작업)의 결과로 사라진 아이템을 돌려받기 위해 애초에 자신의 인챈트가 착오에 의한 법률행위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착각해 계약했으니 무효라는 논리다.

당시 법원은 사건 전후 원고의 행위를 고려해 원고의 착오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는 스마트 콘트랙트와 관련한 소송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리니지 게이머는 오랜 기간 반복된 행위를 하는 게임 공간에서 널리 알려진 조작을 착오라고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스마트 콘트랙트는 다르다. 코드가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표준적 코드로부터 변경된 부분이나 예측하지 못한 코드의 허점을 둘러싸고 의사표시의 하자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면 계약의 내용과 코드 간의 연결 관계를 빠짐없이 명문화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4호(2018.08.06 ~ 2018.08.1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