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주류 금융 편입되면 비트코인의 본질 변질될 수도…거대 자금의 ‘가격조작’ 가능
비트코인 ETF 도입을 ‘결사반대’하는 비트코이너들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미국 증권감독위원회(SEC)가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의 승인을 거부하고 있다. 2017년 3월, 3년 가까이 끌어오던 윙클보스 형제의 ETF 신청을 거부한 이후 올 8월까지 9차례나 관련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

이쯤 되면 SEC의 의도가 명확하다고 봐야 하지만 암호화폐 커뮤니티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제안에 대한 심사 기한이 다가올 때마다 기대감을 북돋우는 관측이 흘러나오지만 어김없이 승인이 거절되고 나서도 SEC 내부에서 재평가를 진행 중이라는 식으로 희망의 불씨를 이어 가려고 한다. 비트코인 커뮤니티는 SEC의 ETF 승인이 비트코인은 물론 암호화폐의 주류화를 향한 획기적인 분기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신뢰받는 비트코인 전문가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 씨는 이런 믿음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는 “비트코인 ETF는 매우 나쁜 생각”이라고 일축했다.

ETF는 미국 금융 감독 기관이 비트코인을 금과 같은 합법적인 자산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므로 비트코인에 대한 시각이 크게 나아져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하지만 안토노풀로스 씨는 이것이 나쁜 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제도권 금융의 가격 조작과 신뢰의 중앙화에 따른 비트코인의 변질이다. 하나가 현실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철학적이다.

선물 도입 후 가격 빠진 비트코인

금융권의 거대 자금은 미성숙한 암호화폐 생태계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다. 일본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 박사도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2017년과 같은 가격 상승은 또다시 일어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선물시장 때문이다. 2017년 가을의 비트코인 가격 상승은 미국 시카고선물거래소에서 비트코인 선물거래가 개시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지만 막상 선물거래가 개시되고 나서는 3분 1로 폭락했다. 미국의 주류 금융권이 암호화폐를 취급하자마자 가격이 떨어졌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규제 위협 등 다양한 요소가 폭락에 영향을 미쳤지만 노구치 박사는 비트코인 공매도가 주원인이라고 본다. 선물시장을 통해 대량으로 비트코인을 팔아 가격을 떨어뜨리는 식의 공격적 투자를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 금융권에서 운용되는 각종 연기금 펀드의 규모에 비하면 암호화폐 시장은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가격 조작에 암호화폐 시장이 취약하다는 점은 SEC의 ETF 승인 거절 사유에도 명시돼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트코인이 금융 상품화될수록 투자자들은 통제권을 대리인에게 위임하는데 이 자체가 비트코인 철학에 어긋난다. 비트코인은 무신뢰 기반이다. 신뢰 없이도 거래나 계약이 가능하다는 철학적 지향점이다.

하지만 ETF와 같은 상품들은 투자자들이 운용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다. 이는 단지 가치의 문제만이 아니다. 금을 맡아 보관하고 있다는 보관 증서가 달러의 기원이 됐듯이 은행들은 예금액을 초과해 대출할 수 있고 이런 방식을 통해 상업은행도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확장은 신용의 내재적 속성이다. 누구라도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면 신용을 창출하는 식으로 통화량 증가에 가담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허가 받은 금융 기업들에만 신용 확장 기능을 허용하는데 금융 기업들이 비트코인을 취급한다는 것은 결국 비트코인이 파생통화 창출의 도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트코인을 만들고 옹호해 온 이들은 국가와 결탁한 금융 기업들이 신용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종이돈의 가치를 파괴해 왔고 그 결과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신용 위기라고 비판해 왔다. 영원히 기념하게 될지도 모를 비트코인의 첫째 블록에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영어로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 영국의 재무장관이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2009년 1월 3일자 영국 신문의 헤드라인을 말이다. 정부와 금융 기업들 때문에 야기된 방만한 화폐제도에 대한 저항이 바로 비트코인이 발명된 이유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SEC가 파란불을 켜면 미국의 금융 기업들은 암호화폐를 근거로 다양한 금융 상품들을 창안할 것이다. 이렇게 금융공학과 비트코인이 만나면 그 결과는 금융 공룡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금융 공룡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큰 물방울에 끌려 더 큰 물방울을 만드는 것이 신뢰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힘의 분산과 발언권의 평등이라는 희망을 뒤로하고 정보기술(IT) 공룡들을 탄생시키는 현실로 다가왔듯이 암호화폐도 결국 금융 기업에 더 거대해질 수 있는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는 비트코인 철학의 배신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금융 기업들이 암호화폐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이는 정부에는 좋은 일이다. 금융 기업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정부는 암호화폐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EC가 비트코인 ETF를 승인하지 않는 이유도 정부가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안토노풀로스 씨는 언젠가는 ETF가 승인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결국 비트코인의 속성을 파악한 금융 기업들이 속성을 활용해 사업 기회를 찾아낸다면 정부 역시 자신감을 갖고 ETF를 승인할 수 있을 것이다. ETF의 승인은 주류화의 원인이 되기보다 주류화의 결과물로 주어질 가능성이 더 높지만 비트코인의 철학적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로서는 반길 만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돋보기] 비트코인의 틈을 채워 ‘주류화’하려는 백트(Bakkt)

비트코인 가격의 역사에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반복되는 현상이 있다. 2016년 일본중의원에서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인정하는 법안이 통과됐을 때 비트코인 가격은 오르지 않았다. 2017년 7월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가 비트코인의 선물 상품을 허가했을 때도 비트코인의 가격은 오히려 소폭 떨어졌다. 하지만 결국 2017년 4월 일본에서 비트코인이 결제 수단의 하나로 쓰이게 되자 한 달 동안 가격이 두 배나 뛰었다. 2017년 가을의 폭등도 시카고상품거래소가 비트코인 선물 상품을 개시하기 직전에 시작됐다.

8월 초 뉴욕증권거래소를 포함한 23개의 대형 글로벌 거래소를 보유하는 인터컨티넨탈익스체인지(ICE)가 마이크로소프트·스타벅스·보스턴컨설팅그룹(BCG) 등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과 손잡고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 ‘백트(Bakkt)’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 동부의 금융 기업들이 암호화폐 거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므로 전문가들은 ETF 승인에 버금가는 뉴스라고 평가했지만 가격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미국 포천지는 이 뉴스를 중심으로 ICE의 제프리 스프레처 회장 부부와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세계 최대의 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회사가 비트코인 거래 시장을 만들기 위해 체계적으로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스프레처 회장 부부는 지난 5년간 암호화폐에 대한 전략을 모색해 왔다. 이들은 비트코인이 국제적인 결제와 금융거래에 활용될 수 있다고 봤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상장되기를 원하는 뉴욕 증권시장을 통해 이들이 접한 정보는 놀라운 것이다. 전통적인 금융권들이 암호화폐 투자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잠재된 위험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비트코인 지갑의 빈번한 해킹, 자금 세탁 등 범죄와의 연계, 늦은 거래 속도 등이다. 하지만 스프레처 회장 부부에게는 이런 것은 괴상한 발명품의 치명적인 단점이 아니라 무한한 기회다. 비트코인과 암호화폐가 가진 신뢰의 문제를 자신들이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거래의 보장과 금융 기법을 활용한 가격의 고정과 결제 속도의 향상이 핵심이다. 백트는 미국의 전통 금융 기업들과 기관투자가들이 암호화폐를 믿고 거래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으로 은행들과 신용카드 회사들도 암호화폐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그 결실이 백트의 출범이다. 스프레처 회장의 부인 켈리 뢰플러 씨는 백트의 초대 최고경영자(CEO)다. 본격적인 서비스는 11월 무렵 시작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8호(2018.09.03 ~ 2018.09.0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