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기관투자가의 암호화폐 시장 진입 본격화…비트코인의 가치 더욱 커질 것]
피델리티가 시작한 ‘암호 자산 보관 서비스’의 의미는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2017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암호화폐 광풍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을 블록체인에서 송금해 본 이들은 드물다. 투자자들은 대체로 거래소에 암호 자산을 맡긴다. 거래소는 블록체인이 아닌 중앙 서버 방식이라 해킹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직접 암호화폐 지갑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개인 키를 생성하고 관리하기가 번거롭고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관투자가들을 대신해 비트코인을 구입하고 개인 키를 보관해 주는 커스터디(custody) 서비스가 시도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모회사인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는 스타벅스와 함께 백트(Bakkt)를 설립했다.

계획상으로는 11월까지 커스터디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해 관심을 끌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여러 차례 연기됐다.

이 가운데 피델리티디지털자산서비스(FDAS)가 제한된 고객들에 한해 비트코인의 커스터디 서비스를 이미 시작했다고 3월 7일 밝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회사는 미국 자산 규모 5위의 금융 기업 피델리티가 설립했다. 피델리티의 애비게일 존슨 최고경영자(CEO)는 월가의 대표적인 비트코인 옹호론자이기도 하다.

코인데스크는 3월 13일 IBM이 슬그머니 커스터디 서비스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보도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투자회사 셔틀홀딩스는 3월 중으로 커스터디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인데 이 회사는 고객들의 개인 키를 IBM의 클라우드에 보관할 계획이다.

암호화폐의 개인 키는 일반적으로 네트워크로부터 분리된 물리적 지갑(종이나 전용기기)에 보관한다. 이를 차가운 지갑(cold wallet)이라고 한다. 반면 셔틀 홀딩스는 디지털 형태의 개인 키를 클라우드라는 뜨거운 지갑(hot wallet)에 보관할 계획이다.

뜨거운 지갑은 차가운 지갑과 달리 언제든지 네트워크 접근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IBM이 제공하는 보안성을 믿지 않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계획이다.

자산 규모가 6억 달러가 넘는 스위스의 온라인 뱅크 그룹인 스위스코트(Swissquote)도 커스터디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이들은 핵무기도 뚫을 수 없게 설계된 군사용 지하 벙커에 물리적 지갑과 서버를 보관할 계획이다.

굴지의 금융회사들이 비트코인 보관 대행 비즈니스에 관심을 가지는 현상은 금융의 발달 과정을 고려할 때 전당포나 창고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일단 비트코인 가격을 단순한 거품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를 내재한 스테이블 코인
한 발짝 더 나아가자면 비트코인의 커스터디 서비스는 달러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의 개발과 상반된 방향으로 금융회사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비트코인 커스터디 서비스를 준비하는 금융 기업들은 달러와 일대일로 교환되는 스테이블 코인이 비트코인의 존재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라는 논리에 그다지 수긍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이 그렇게 유용한 기술이라면 정부가 나서 달러나 원화로 교환되는 코인을 만들어 블록체인에서 유통하려고 할 텐데 달러 고정형 코인이 블록체인에 올라오면 가격이 불안정한 비트코인은 퇴출될 것으로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논리를 배경으로 몇몇 정부는 물론 다양한 금융 기업들이 스테이블 코인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스테이블 코인의 지속성 여부는 아직 실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류 경제학적 분석틀을 적용하면 스테이블 코인의 이론적 토대는 취약한 편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를 근거로 발행된다. 총 발행량이 대행 은행의 달러 보증금과 연계될 뿐 은행에서 일일이 소유권을 추적해 계좌를 변경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의 유통은 온라인 뱅킹을 통한 송금과 다르다.

만약 스테이블 코인의 거래를 금융권이 일일이 확인하고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면 기존의 온라인 뱅킹을 활용한 계좌 이체와 다를 바가 없다. 은행 서버에 접속할 필요 없이 지갑에서 지갑으로 이전하고 암호화된 지갑에 저장할 수 있어야 스테이블 코인도 블록체인 위에서 스마트 콘트랙트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문제는 스테이블 코인이 공신력을 얻어 널리 쓰이게 되면서 발생한다. 지구촌 시민들이 스테이블 코인을 달러와 동일하게 여긴다면 유통과 관련 없이 이를 보유하고자 할 것이다. 블록체인은 국경과 상관없기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을 구입하는데 마찰이 없다.

달러를 확보하는 가장 손쉽고 저렴한 방법이 된다. 지구촌 시민들 누구나 달러를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개별 국가의 화폐 주권이 무너지기 때문에 각국 정부가 통화정책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달러가 블록체인에 올라와 비트코인과 같은 무정부적인 암호화폐를 밀어낼 것이라고 예견하는 이들은 국제 통화 시스템의 근본적인 혁신을 전제하는 셈이다. 그것도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불러오고 있는 혁신보다 더 파괴적인 변화를 말이다.

또한 보관용으로 잠식되기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는 주체는 예치된 달러보다 더 많은 코인을 발행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트리핀 딜레마를 연상시키는 난제를 유발하므로 결국 고정된 가치를 지켜낼 수 없는 날이 온다.

이를 눈치 챈 투기 세력이 스테이블 코인을 일시에 청구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코인을 평가절하해야만 한다. 이런 모순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의 가격도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동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게 된다.

비트코인 보관 서비스는 금을 보관해 주면서 시작한 은행업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은행은 금 보관증을 발행하면서 신용을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맡기는 이에게 보관료를 물리는 대신 이자를 줬다.

신용의 파생은 신용의 역학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신용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무게의 금 보관증도 가격이 달랐다. 여기에는 보관업자가 파산할 수 있다는 위험도 포함돼 있다. 이런 조정 능력 때문에 국가가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제도보다 더 유연하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다.

비트코인이라는 하나의 문명사적 충격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금융 시스템은 기나긴 발달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연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지구촌 시민들은 단순해 보이는 화폐가 사실은 양립하기 어려운 모순된 가치들을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하는 인류의 번뇌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돋보기 -트리핀 딜레마, 기축통화의 가치와 유통력의 모순
트리핀 딜레마는 예일대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데서 유래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구사회는 자유무역의 회복만이 전쟁을 막고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는 방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의 국방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국제무역 질서를 구축했다. 금에 고정된 달러를 국제무역의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운 시스템이었다. 전 세계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무역 적자를 쌓아야 하는데 미국이 적자를 누적할수록 달러는 가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러 가치는 고정돼야 했으므로 달러는 고평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모순이다. 트리핀의 예견대로 독일과 같은 무역 흑자국들이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려고 하자 미국은 버티지 못하고 달러의 금 태환을 영구적으로 중지했다. 트리핀 딜레마는 기축통화 제도가 발권의 이익만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만성적인 무역 적자와 국내 산업의 공동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은 기축통화를 패권 국가의 특권이자 무기로 간주하지만 경제학에서는 기축통화국의 부담에도 주목한다. 이는 독일이나 중국이 기회가 있을 때조차 자국 화폐를 기축통화로 삼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경험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기축통화 패권에 도전하는 비트코인을 미국이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직관적인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증거에 어긋나고 있다. 미국은 연방정부나 중앙은행(Fed) 차원에서 비트코인 자체를 막으려고 시도한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6호(2019.03.18 ~ 2019.03.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