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동 KAIST 경영대 교수의 ‘선진 한국의 꿈과 현실’

“앞으로 한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선진국 진입을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는 무엇일까.”

KAIST 경영대의 ‘선진 한국의 꿈과 현실’ 수업에서 김경동 교수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화두를 제시했다. 이 수업은 MBA 강좌 중 인기가 높은 인문학 수업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변화와 현주소를 짚어보고 심도 있는 사고와 교양의 영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위의 질문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이룩한 지금 아직도 선진국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한국의 현주소에 대해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는데 필수 단계인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한 노력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시대적 요청을 포함한다.

‘한국은 현재 선진국인가’란 질문을 한국인 각계각층에 던지면 10%만이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많은 이가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라고 답한다. 한국인은 스스로 한국에 대해 긍정적이기보다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더 잘 되려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고 평가한다.

미래 지향적 성찰을 위해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을 우선 진단해 보자.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중에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뤘고 권위주의적 체제에서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세계 역사에 기념비적인 성과를 이뤘다.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전환했고 세계 15위의 경제 대국, 국가 브랜드 가치 세계 9위로 성장했다.
[MBA 명강의 지상 중계] ‘달려도 계속 제자리’ 한국 사회의 딜레마
총체적 아노미 상태… 급격한 사회변동 후유증
긍정적 평가도 많지만 여러 부정적인 단면도 혼재해 있다. 선진 한국이란 화두를 둘러싼 현실 진단에서 주요 3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러닝머신론’이다. 달려도 계속 제자리걸음에 머무르는 중진국의 함정을 의미한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7년째 2만 달러대에 머무르면서 나온 문제점이다. 선진국의 경제 모델을 쫓아갈 때는 고도성장했지만 중진국에 도달한 이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현재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한 23개국은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전환하는데 평균 8년이 걸렸다. 하지만 현재 상태라면 한국은 10~15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저성장의 이유는 5가지로 요약된다. 잠재성장률 하락(3%대), 내수·수출 간 불균형, 소득분배 악화, 중산층의 감소,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가 그것이다.

둘째, ‘샌드위치론’이다. 선진국은 고효율로 후발국은 저비용으로 한국을 압박하는데 한국의 사정은 ‘고비용·저효율’의 늪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주춤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1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회장 취임 20주년을 맞아 “일본은 앞서가고 중국은 쫓아오는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다”면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참 고생을 많이 할 위치에 있는 게 우리 한반도”라고 하면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후 소위 ‘샌드위치론’은 그 당시 정부 각료들에게 불쾌감을 줬지만, 특히 많은 기업인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어필해 공감을 얻었다.

셋째, 한국 경제가 ‘조로증(早老症)’에 걸렸다는 지적이다. 빨리 늙는 희귀병에 빗댄 이 비판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한때 고속 성장의 모범으로 농업사회가 산업국가로 탈바꿈했던 한국이 너무 빨리 나이를 먹어 중년이 되어 버린 위기 속에 침몰 중”이란 논평에 잘 함축돼 있다. 이와 함께 파이낸셜타임스는 “정치적 리더십만 제대로 갖추면 충분히 발전 지속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기준에서 자동차 사고 1위, 자살률 1위, 외채 3위 등 부정적 지표와 함께 ‘부패 공화국’, ‘전투적 노동자 천국’, ‘도덕 불감증’, ‘국제적 리더십 부족’, ‘외국인에 대한 폐쇄성’ 등 부정적 평가가 선진 한국으로의 도약을 가로막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러한 한국의 현주소와 문제점의 원인을 한국 사회변동에서 찾는다. 1960년대 시작한 공업화·도시화, 고도 경제개발의 결과다. 생활수준 향상, 가치관, 생활 양식, 사회적 관계 등에서 매우 복합적인 변화가 급격히 일어남으로써 지난 반세기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1997년, 2008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실업 폭증, 가계 붕괴, 가족 해체, 노숙자 증가, 중산층 위축,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저소득층에게 가혹한 현실 등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변질됐으며 권리 주장, 이익 추구, 집단 이기주의 등을 앞세울 뿐 공동선에 대한 관심은 소홀해졌다. 김 교수는 “한국 사회는 이 때문에 고독한 사회로 변질됐고 자살, 묻지 마 범죄 등 사회병리, 고독사 등이 만연해졌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날로 확대되는 글로벌화 가운데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선진국에서도 나타나는 여러 사회병리 현상의 해법을 동방사상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질서의 교란은 심각한 수준이다. 황금만능, 출세 지향 사회 속에서 부와 지위로만 인간을 평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신적 가치를 경시하고 도덕성이 마비됐다. 사회적 기초 질서를 무시하고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무시한다. 김 교수는 한국 사회를 “총체적 무규범(anomie)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는 “제일 심각한 한국 사회의 문제는 책임 의식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기업·시민사회 모든 제도 영역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의 부재가 공통 현상이다. 특권층일수록 책임과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권리와 이익을 추구하고 서로 네 탓만 하는 사회의 불신 속에 냉소주의가 확산, 심화되고 있다.


선진국 아닌 ‘선진 문화 사회’ 꿈꾼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떼한민국’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이해 관계 대결과 폭력·불법 집단행동이 과도하고 빈번하게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의 예방은커녕 제도적 해결 방법도 미숙하고 합리적 접근은 실종됐다. 한국에서는 대화를 통한 갈등 해결을 보기 힘들다. 갈등이 발생하면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기 싸움만 만연한다. 국가적으로 무수한 에너지가 낭비되고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진 한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은 절대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이 아니고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다.

김 교수는 날로 확대되는 글로벌화 가운데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의 선진국에서도 나타나는 여러 사회병리 현상의 해법을 동방사상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방황하는 세계 문명의 해법으로 선진국이 아닌 ‘선진 문화 사회(Advanced Cultured Society)’의 개념을 제시한다.

경제력만으로 가늠하는 선진국 개념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선진 문화 사회는 생태 환경 친화적, 인간주의적, 문화적 교양으로 정화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 교수는 “21세기 동서 문명의 화쟁(신라의 고승 원효의 중심 사상으로, 여러 대립적인 이론들을 조화하려는 불교사상)으로 신문명 창조에 적극 기여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선진 문화 사회와 관련해 왜 동방사상일까. 김 교수는 문명 비평가 마이클 노박의 말로 답을 대체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나은 정부 형태이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공정한 경제체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우리가 직면한 질문은 ‘우리가 과연 어떤 도덕률(morals)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야말로 미래를 겨냥한 쟁점인 것이다.”

김 교수는 “서구 문명에 세계가 의존해 발전해 왔지만 이제는 도덕적인 모범 사회를 건설하는데 동양의 사회 정서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진 문화 사회의 핵심 원리로 유교에 뿌리를 둔 새로운 육덕 ‘인의예악지신(仁義禮樂智信)’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 이미지와 발전 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고 그는 본다.


서구 문명은 한계… 동양사상서 길 찾아
사회가 성립되고 바로 서는 기초는 ‘인의(仁義)’다. 사회의 정서적 기초는 ‘인’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사회질서의 기초는 ‘의’로서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다. 사회를 바로 세우는 질서인 인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원리가 예악(禮樂)이다. 정연한 질서 속에 하나 되는 화해가 있고 모두가 하나 된 화해 속에 정연한 질서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예악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정보사회의 사회적 자본으로 지신(智信)을 꼽았다. 시비를 가리는 지식과 슬기로운 판단의 기초 지혜인 ‘지’와 불신의 시대에 등불로 사회를 지탱하는 자원 ‘신’이 요구된다.

선진 문화 사회는 유연한(flexible) 사회다.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자원의 양적 증가와 질적 개선을 추구한다. 사회 구성원의 삶의 기회 확충과 공정한 배분의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성·창의성·자발성·협동성이 필수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성원들의 참여를 개방함으로써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또한 갈등·폭력을 피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선진 문화 사회는 분권적 다원적 공동체주의적 집합주의(Decentralized Plural Communitarian Collectivism)가 조직 원리다. 이는 불평등 정도가 크지 않고 중간 계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형태다. 조직체에서 위계 서열적 계층이 대폭 줄어든 모습니다.

선진 문화 사회는 자발적 복지사회(Voluntary Welfare Society)다. 국가의 집권적인 힘만으로 공동체 복리를 추구하기는 벅차기 때문에 오히려 시민사회의 자발적 부문이 가진 무한정의 가용 자원을 활용하고 협조를 얻는 것이 실질적이고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와 시민 사회사회는 진정한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교양 문화의 힘을 쌓아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선진 사회가 돼야 미래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선진 한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사회가 에너지를 손실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선진 문화 사회를 위한 구체적 전략으로 김 교수는 “국가·시민사회·기업 모두가 참여하되 시민이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추진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러한 협치(協治)를 해본 경험이 없지만 21세기 통치 원리는 시민사회에 동참하고 협력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돋보기 |‘선진 한국의 꿈과 현실’ 수업은…
미래 지향적 청사진을 그릴 때 일반 개념으로서 선진 사회의 기본 요건을 경제·정치·생태환경·복지·도덕성·문화·교육 등에서 점검한다. 궁극적으로 서방의 선진 사회 모형을 수용하되 동방의 유교적 공동체 이상의 원리를 재해석한 공자의 ‘대동사회’와 ‘인의예악지신(仁義禮樂智信)’의 새로운 육덕(六德)에 기초한 성숙한 문화적 교양으로 정화한 ‘선진 문화 사회’를 이념형으로 제시한다.
[MBA 명강의 지상 중계] ‘달려도 계속 제자리’ 한국 사회의 딜레마
김경동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 사회학 석사, 코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KAIST 경영대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한국사회학회 회장이며 최근 탄소문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사회발전론’, ‘선진한국, 과연 실패작인가? 김경동의 문명론적 성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