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피해액 3000억 육박…외상 매출 채권 담보대출 허점 파고들어

[비즈니스 포커스] 한 편의 영화 같은 ‘대출 사기’ 전모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무려 5년이 넘게 1조8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사기꾼들이 마음대로 넣었다 뺐다 하는 데도 은행과 대기업은 아무도 몰랐다. 3000억 원을 벌어들인 사기꾼들은 ‘협회’까지 만들며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했다. 이를 막아야 할 대기업 부장은 오히려 사기에 발 벗고 나섰고 벌을 줘야 할 금융 당국의 팀장은 사기꾼들에게 ‘도망치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두뇌 게임이 벌어지는 스릴러 장르를 넘어 씁쓸한 블랙 코미디까지 혼합된 ‘명작’이다.

지난 3월 19일 서울지방경찰청은 KT ENS 협력업체 대출 사기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김희철 전 KT ENS 부장과 KT ENS 협력 업체인 중앙티앤씨의 서정기 대표 등 15명을 검거했고 이 중 8명을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사기 대출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대표 김모 씨 등 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해외로 달아난 핵심 용의자 전주엽 엔에스쏘울 대표는 인터폴에 적색 수배했다.


5년간 463차례나 부정 대출
이들은 2008년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463차례에 걸쳐 KT ENS에 휴대전화 등을 납품했다는 내용의 허위 매출 채권을 담보로 16개 은행과 저축은행에서 1조8335억 원을 부정 대출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가운데 2894억 원은 갚지 않았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은 구속된 서정기 대표와 도망친 전주엽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 대표가 처음 사기 대출의 구조를 만들고 넓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판을 키웠다. 제2금융권 출신으로 알려진 전 대표는 여러 금융 기법을 동원해 사기 대출의 구조를 보다 치밀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는 충주농업고 출신으로 10여 년 전 휴대전화 관련 업계에 몸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마케팅과 전략 방면에서 경험과 수완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한다.

서 대표가 시작한 사기 수법은 외상 매출 채권 담보대출(이하 외담대)이 핵심이다. 외담대는 납품 업체(주로 중소기업)로부터 물품을 구매한 기업(주로 원청 업체이자 대기업)이 물품 구매 대금을 어음으로 지급하면 납품 업체가 이 어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제도다. 후일 외상 매출 채권 만기가 돌아오면 구매 기업이 이 대출금을 대신 상환한다.

외담대는 일반 전자 어음과 비교할 때 전자 문서로 작성되고 전자 방식으로 유통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일반 전자 어음은 만기일까지 갚지 않으면 부도 처리되지만 외담대는 대출금 연체로 처리된다. 즉 대출금을 지속적으로 상환하면 꾸준히 외담대를 유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서 대표 등이 5년간 463차례나 외담대를 통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이유다.


전자세금계산서 발행 의무 없는 SPC 활용
물론 하나의 중소기업이 1조8335억 원에 달하는 돈을 5년간 대출 및 상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서 대표는 자신의 회사인 중앙티앤씨를 포함해 컬트모바일·아이지일렉콤·다모텍 등 8곳의 동종 업체 대표들을 끌어 모은다. ‘판’을 키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기를 시작한 이들은 2012년 서 대표를 회장으로 ‘한국스마트산업협회’를 결성하기까지 한다.

물론 대기업이 이 수법을 모를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실제로 2007년 일찌감치 김희철 전 부장이 이를 발견했다. 김 전 부장은 서 대표 등이 휴대전화 주변 기기를 납품하고 매출 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는 과정에서 세금 계산서의 납품 단가가 부풀려진 사실을 알아채고 이에 항의했다.

하지만 서 대표는 그해 8~12월 3차례에 걸쳐 김 전 부장에게 4600만 원을 전달하면서 이를 눈감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유착 관계를 맺은 김 전 부장은 사기에 아예 발 벗고 나섰다. 아예 KT ENS에 납품하지도 않은 휴대전화 단말기와 내비게이션에 대한 허위 매출 채권 양도승낙서를 직접 만들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전주엽 대표는 이 같은 사기 수법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제2금융권 출신인 그는 원래 컬트모바일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서 대표에게 인정 받아 급성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는 SPC를 적극 활용했다. 자본금이 수십 억 원 수준인 협력 업체들이 거액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SPC를 통해 쪼개서 대출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KT ENS에 납품한 것처럼 꾸민 가짜 매출 채권을 SPC에 모두 양도했고 SPC는 양수받은 매출 채권을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아갔다. 매출채권이 SPC에 모두 양도됐기 때문에 협력 업체들은 은행의 검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외담대는 전자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외담대를 유동화할 목적으로 설립된 SPC는 페이퍼 컴퍼니로서 전자 세금 계산서를 발행할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이번 KT ENS 협력 업체들이 세운 SPC도 가짜 수기 세금 계산서를 만들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의 자본시장조사1국 김모 팀장(현재 직위해제)이 연루됐다는 의혹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 SPC를 통한 외담대의 맹점을 정확히 짚어야만 이 같은 사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성공한 사업가를 자처했던 전주엽 대표

1억짜리 시계만 수십 개…‘전설’에서 ‘사기꾼’으로
[비즈니스 포커스] 한 편의 영화 같은 ‘대출 사기’ 전모는
지난 2월 KT ENS 협력업체 사기 대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는 발칵 뒤집혔다. 이유는 디시인사이드 내의 한 게시판인 ‘시계 갤러리’의 유명 인물인 닉네임 ‘산타(구)’가 사건의 핵심 인물인 전주엽 대표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디시인사이드 시계 갤러리는 국내 시계 마니아들이 많이 가장 많이 찾은 인터넷 게시판 중 하나다.

전 대표는 이 게시판에서 2007년부터 활동했다. 오프라인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 등 초고가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1억~2억 원을 훌쩍 넘기는 희소 모델을 직접 착용한 뒤 ‘인증 샷’을 게시하며 일부 유저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했다. 또 가끔 오프라인 모임이 있을 때는 고가의 만년필이나 지갑 등을 참석자들에게 선물하며 ‘대인’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전 대표는 이 게시판에서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했다. 워낙 고가의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들이는 그에 대해 일부 유저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2013년 8월께 자신의 ‘성공 스토리(?)’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는 “2008년 창업했으며 모 통신사 자회사에 납품 계약을 하고 창업 첫해에 30여 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전 직장(제조업체)에서는 상무였으며 퇴직금을 주식으로 받았는데 이 주식이 2008년보다 20배가 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08년 창업 이후 회사가 20배가 넘게 성장해 매출 400여 억 원에 직원 250명의 중견기업이 됐다”고 소개했으며 “2012년에는 모 그룹사에서 회사를 매입한다고 한다고까지 했고 그 무렵 회사의 매각 가치는 1000억 원대를 돌파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거짓 성공 스토리에 많은 네티즌들은 “존경한다”, “멋있게 산다”고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전 대표는 2013년 12월 15일을 마지막으로 게시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글에서는 그는 또 ‘브레게’ 시계를 직접 착용하고 찍은 사진을 올리며 게시판의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호인’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 남태평양의 소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진 전 대표는 인터폴에 ‘적색 수배’가 내려진 상태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인터넷 게시판의 전설은 결국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했다.


이홍표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