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이후 새로운 시장의 주인공 탄생, 후발 주자에겐 절호의 역전 기회
지난 9월 어느 날 오후,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까르푸 전자제품 매장. 고객들의 눈에 가장 잘 뜨이는 전면 중앙에 중국 기업 스카이워스의 초고화질(UHD) TV 여러 대가 진열돼 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역시 중국 업체인 창홍·하이센스·TCL의 TV들이 줄지어 전시돼 있다. 세계 TV 시장의 1위인 삼성전자 TV는 가장 뒤쪽에 몇 대 놓여 있고 2위인 LG전자 TV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다. 매장에서 TV를 둘러보던 한 중국 소비자는 무슨 이유로 돈을 더 주고 삼성전자 TV를 사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단일 국가로서 세계 최대의 TV 시장인 중국에서 한국의 제품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트랜지스터 기업 중 반도체 시장 생존자 ‘0’이런 모습이 데자뷔와 같이 왠지 낯설지만은 않다. 10여 년 전 이와 유사한 모습이 목격됐다. 중국 전자제품 매장의 전면부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평면 TV들로 채워졌다. 세계 TV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의 제품들은 그 뒷전에 놓여 있다. 중국의 소비자들은 왜 돈을 더 주고 일본 TV를 사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아직까지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세계 대부분의 시장에서 선두권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두 회사가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들인 시간의 3분의 1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중국의 추격은 코밑까지 따라왔다. 10여 년 전 일본의 소니·파나소닉·샤프·도시바 등이 걸었던 길을 삼성과 LG가 걷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어느 시장에서나 영원한 절대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를 리처드 포스터는 저서 ‘이노베이션’에서 ‘이중 S자 곡선’으로 설명한다. 이 곡선은 X축과 Y축으로 구성된 그래프다. X축은 투입된 노동력과 자원, Y축은 그 성과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이노베이션을 통해 전자적 신호를 변형하는 진공관이 탄생했다. 그리고 진공관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트랜지스터라는 새로운 제품이 나타났고 진공관 시장은 이것으로 대체된다. 이런 모양이 마치 두 개의 S자 형태로 보여져 ‘이중 S자 곡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새로운 이노베이션에 의해 시장의 주인공이 바뀐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는 유사한 전자 소자 산업이다. 그러나 1955년에 진공관 시장의 상위 3사와 트랜지스터 시장의 상위 3사는 동일한 회사가 단 한곳도 없었다. 즉, 새로운 시장에서의 주인공은 기존 시장에서의 주인공과 다르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10여 년이 흐른 후 트랜지스터는 반도체라는 새로운 제품에 의해 대체됐다. 그리고 트랜지스터 시장의 기업 중 한곳도 반도체 시장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 S 대기업에 입사했다. 근무한 지 1년여 만에 첫째 해외 출장을 갔다. 그때가 1980년대 후반이다. 출장지는 일본이었다. 그 당시 일본 출장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맥주였다. 필자에게 일본 현지에서의 음식은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맥주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당시 내 입맛을 사로잡은 맥주는 아사히맥주의 슈퍼드라이였다.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는 톡 쏘는 듯하면서도 깔끔한 맛이었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아사히는 일본 맥주 시장에서 4위에 불과했다. 슈퍼드라이의 선풍적인 인기를 필두로 현재는 일본 맥주 시장의 1위다. 당시의 1위는 기린맥주였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드라이맥주의 맛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린은 자신의 주 제품인 라거맥주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라거맥주는 점유율이 높았고 드라이맥주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고 적절한 변화의 타이밍은 지나가 버렸다. 잘되고 있는 기존 사업이 오히려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하는 데 방해물이 된 것이다.
코닥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다. 하지만 역시 세계 1위를 점유하는 필름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상은 디지털로 변모함에도 코닥의 포커스는 여전히 필름이었다. 나중에 디지털 기술의 위협에 당황하며 그때서야 무리하게 신사업을 전개하다가 2012년 파산하고 만다. 선두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핵심 사업과 역량이 이런 순간에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
뒤늦게 무리한 신사업 추진하다 파산한 코닥
이에 따라 새로운 변화는 선두 기업에는 위협으로, 후발 기업에는 기회로 작동될 수 있다. 그래서 선두 기업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후발 기업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변화의 조짐에 민감해져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크게 세 가지 상황에서 발생한다.
첫째는 기술 경제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는 한국의 전자 산업이 일본을 따라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반대로 노키아와 코닥에는 몰락의 요인이 됐다. 이들 기업은 기존 사업에 많이 투자했고 큰 이득을 봤기 때문에 기존에 안주하려고 했다. 그래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알면서도 후발 기업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둘째는 경기의 순환이다. 경기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불황기는 시장 점유가 큰 선두 기업들에 위협이 된다. 그만큼 손실의 폭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시장에서 퇴출되기도 한다. 그만큼 후발 기업들에는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또한 호황이 지속되거나 불황이 지속되면 새로운 트렌드가 발생한다. 아사히맥주는 이러한 트렌드의 변화를 잘 읽어 성공했다. 슈퍼드라이 출시 당시 일본에서는 지속적 호황에 따라 육류 소비가 증가했다. 그래서 소비자의 입맛이 육류의 느끼함을 상쇄할 수 있는 깔끔한 맛의 맥주를 선호하게 됐다. 아사히맥주는 이러한 소비자의 변화된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전력투구한 것이다.
셋째는 정부의 정책이나 규제의 변화 등이다. 정부는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많은 정책적 대안을 만들어 낸다. 정책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이를 활용해 기업의 규모를 키우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국도 미래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대표 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고 있다. 그 분야는 바이오 나노, 로봇, 차세대 반도체, 그린 카, 신·재생 그린 에너지 등이다.
위와 같은 변화는 후발 기업에는 선두 기업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에 따라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또한 선두 기업으로서는 후발 기업의 전략을 이해함으로써 후발 기업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 모색이 가능해 질 것이다. 후발 기업이 선두 기업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전략은 크게 네 가지다.
새로운 유통 경로를 구축하라
첫째는 신제품 전략이다. 한때 MP3의 세계 최강자는 한국의 기업이었다. 한국 기업이 생산한 제품은 작지만 저장 용량이 컸고 음질이나 디자인도 매우 좋았다. 그래서 세계시장을 석권했고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팟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그 위치를 잃고 만다. 그런데 아이팟이 성공하게 된 것은 사이즈나 저장 용량, 디자인이 한국 기업의 제품보다 월등해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팟은 기존에 한국 제품이 가지고 있지 못한 새로운 가치를 고객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객이 원하는 곡을 원하는 시간에 다운 받을 수 있는 아이튠 기능이다. 즉, 신제품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두 기업의 제품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더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가 반드시 ‘기술적’ 혁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새로운 경로 전략이다. 새로운 경로를 구축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아마존이다. 책을 구매하는 기존의 채널은 서점이다. 이를 온라인으로 판매 채널을 바꾸면서 부동의 미국 서점 시장의 1위 반스앤드노블을 따돌리고 단숨에 시장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했다. 최근에는 TV 홈쇼핑이 마케팅 채널로 부각되면서 의류나 화장품 분야에서 이를 전담 유통 채널로 활용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비타민 음료인 비타500도 새로운 경로를 구축해 성공한 사례다. 약국에서 유통되는 기존의 의약품 시장이 아니라 슈퍼마켓·편의점 등 일반 유통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기존의 경쟁 제품을 따돌릴 수 있었다. 또한 신흥 시장을 개척해 성공 모델을 만들고 이를 다시 자국 시장이나 선진 시장으로 역도입하는 것도 경로 전략의 일환이다.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로 유명한 미국의 레비 스트라우스는 중국 시장에서 개발해 성공한 ‘데니즌’이라는 브랜드를 미국으로 다시 들여와 중저가 선풍을 일으켰다.
셋째는 새로운 판매 방식의 도입이다. 일본의 종합 잡화 마트는 경쟁이 치열하다. 돈키호테는 타 기업에 비해 이 시장에 늦게 진입한 후발 기업이다. 그러나 시장 진입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업계 1위에 올라섰다. 단순 순위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괄목할 만하다. 2012년 매출을 보면 2위 기업의 5배 수준이다. 이런 성공의 배경을 살펴보면 독특한 판매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야간 시장 고객에게 집중했다. ‘열대우림형 압축 진열법’이라는 방식으로 심야 고객들의 발길을 잡을 수 있는 점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지역별 특성에 따라 폐점 시간을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천차만별로 운영하도록 했다. 이러한 판매 방식을 통해 돈키호테는 일본 유통 업계에서 나이트 마켓을 처음 개척한 선도 기업으로 포지셔닝돼 있다. 넷째는 새로운 조직 문화의 구축을 들 수 있다. 카카오톡은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따돌리고 가장 많은 가입자를 보유한 선두 기업이 됐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카카오톡이 경쟁자 대비 보다 수평적이며 유연한 조직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시장 대응 속도를 엄청나게 높였다. 핵심 아이디어 하나만 담아 서비스를 빨리 내놓고 나머지는 고객의 반응을 살피며 보완했다. 그리고 조직도 스피드를 올릴 수 있도록 유연하게 구성했다. 또한 자율적인 토론과 논의를 통해 의사 결정이 이뤄지도록 했다. 제품이나 경로 또는 판매 방식과 같은 눈에 보이는 요소 못지않게 조직의 문화 또한 선두 기업을 따라잡을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선두 기업은 현재의 위상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 지금 자신이 돈 벌고 있는 사업, 잘하고 있는 역량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후발 기업은 어떻게든 선두 기업을 따라잡고자 한다. 이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기회는 늘 열려 있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선두 기업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살피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후발 기업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살피고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선두 기업이든, 후발 기업이든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고 한국 전체의 산업 경쟁력을 높일 것이다.
강성호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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