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 소재 생산능력 확보에 집중…‘원샷법’도 적극 활용 중
‘한 손엔 축배를 한 손엔 칼을' 체질개선 나선 화학사들
(사진) 대전 신성동에 있는 한화케미칼 중앙연구소 직원들. 이 연구소는 한화케미칼의 신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 이명지 기자]국내 화학사들이 축배를 들기가 무섭게 사업 재편에 들어갔다. 향후 다가올 불황과 화학사들을 둘러싼 시장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업군들이 불황으로 신음하고 있는 와중에 화학사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롯데케미칼과 SK이노베이션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냈고 LG화학 또한 5년 만에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마진 확대’가 최대 실적 이끌어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58.1% 증가한 2조5478억원을 기록했다고 지난 1월 2일 밝혔다. 이는 사상 최대였던 2015년의 영업이익 1조6111억원을 앞지른 수치다.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12.9% 증가한 13조2235억원, 순이익은 1조7962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81.3% 늘어났다.

이에 따라 롯데케미칼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40년 만에 국내 화학 산업의 맏형으로 불리는 LG화학의 영업이익을 앞질렀다. 롯데케미칼은 호실적의 원인을 “유가 강세에 따른 수요 촉진과 함께 달러가 강세를 보였고 에틸렌 수급 상황이 타이트해 높은 수익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한 손엔 축배를 한 손엔 칼을' 체질개선 나선 화학사들
(사진) LG화학의 여수공장 전경. /한국경제신문

LG화학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9919억원, 매출액은 20조6953억원으로 나타났다. 영업이익에서는 롯데케미칼에 뒤처졌지만 2011년 이후 5년 만에 최대치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호조를 이어 갔다.

SK이노베이션 또한 지난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인 3조 2286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보다 18.3% 감소한 39조5205억원이었다. SK이노베이션의 호실적에는 화학 부문이 크게 기여했다. 화학 사업은 매출 7조6865억원, 영업이익 9187억원을 올렸다.

한화케미칼은 2월 23일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있다. 전반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한화케미칼 또한 좋은 실적을 낸 것으로 보인다.

업계의 호황과 함께 대기업들은 화학 계열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은 롯데다. 롯데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화학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롯데케미칼은 2015년 삼성그룹의 화학 계열사를 인수하는 3조원 규모의 ‘빅딜’로 종합 화학 기업으로 거듭났다. 안정적인 원료 공급을 위해 지난해 12월 여수 에틸렌 공장의 연간 20만 톤 추가 증설을 발표했고 2018년에는 연간 120만 톤의 증설 능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 2017년 하반기 증설 완료 예정인 말레이시아 타이탄 공장 에틸렌 추가 증설이 완료되면 2018년 연말에 연간 450만 톤 규모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유통으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롯데지만 화학 계열사의 몸집을 키우며 중·장거리 먹거리를 발굴하고 있다.

화학업계의 ‘봄날’에는 저유가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평균 유가는 배럴당 42.7달러로 2004년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저유가 현상이 지속되며 원가는 낮아졌지만 제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견조해 스프레드(원료와 최종 제품의 가격 차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화학업계의 공급과잉이 해소되기 시작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세계 화학사들은 호황이었던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설비 증설을 활발히 시행했는데 이 시기가 지나자 공급과잉으로 난항을 겪었다. 그 후 화학사들은 신설 및 증설을 제한했고 2015년부터 그 효과가 나오
기 시작했다.
‘한 손엔 축배를 한 손엔 칼을' 체질개선 나선 화학사들
◆화학사들 ‘호황은 일시적일 뿐’

여유를 부릴 만도 하지만 화학 기업들은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의 호황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른바 ‘알래스카의 여름’이라는 것이다.

남정근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화학 산업은 6~7년간의 사이클을 갖고 불황과 호황이 반복돼 왔지만 최근엔 그 주기가 무너졌다”며 “올 하반기부터 불황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고 분석했다.

북미 및 중국 기업들의 증설과 세계경제의 저성장은 화학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대 실적에 마냥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생각이다.

따라서 화학 기업들은 체질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핵심은 ‘고부가가치 사업’이다. 고부가 제품은 기술 차별화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업체들만 생산할 수 있고 범용 제품에 비해 수익성이 높은 제품을 말한다. 공급과잉의 우려가 적어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정적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LG화학은 향후 범용 제품들의 경쟁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기초 소재 분야의 사업 구조를 고부가 석유화학 제품으로 고도화하고 기존 사업은 원가 경쟁력 및 시장 지배력 강화로 수익성을 극대화하기로 했다.

LG화학은 메탈로센계 폴리올레핀(PO), 고기능 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ABS) 및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 차세대 고흡수성 수지(SAP), 친환경 합성고무 등 고부가 제품의 매출을 현재 3조원 규모에서 2020년까지 7조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LG화학은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메탈로센계 촉매 및 공정 기술’을 기반으로 고부가 PO 제품을 대폭 늘려간다. LG화학 측은 “메탈로센계 촉매 및 공정 기술을 활용하면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등 기존 제품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기존 범용 라인을 메탈로센계 제품 전용 라인으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 증설에 나선다. 또 현재 30% 수준인 폴리올레핀 제품의 고부가 비율을 2020년까지 60%로 두 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 역시 고부가가치 사업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시작은 인수·합병(M&A)이다. SK이노베이션의 화학 부문 자회사 SK종합화학은 지난 2월 2일 미국 1위 화학 기업인 다우케미칼의 에틸렌 아크릴산 사업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거래 금액은 3억7000만 달러다.

고부가 화학제품인 기능성 접착 수지의 하나인 에틸렌 아크릴산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아 소수 글로벌 메이저 화학 기업들만 진출해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이번 인수로 기존 제품과의 시너지를 통해 고부가가치 포장재 사업에서의 포트폴리오 확대를 추진할 수 있게 된다.

한화케미칼은 대표적 고부가 특화 제품인 에틸렌비닐아세테이트(EVA)와 전선용 W&C(와이어앤드케이블, 전선용 복합수지)의 비중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오고 있다. EVA는 주로 접착제, 신발 밑창, 태양전지 시트 등에 사용되며 W&C는 초고압선 절연체 용도로 사용된다. 모두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소수의 화학회사만이 생산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범용 제품인 폴리염화비닐(PVC)의 물성을 개선한 고부가 PVC ‘CPVC(염소화 PVC)’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기존에는 전량 수입되던 제품이었다. 일반 PVC가 건축 자재용으로 주로 쓰이는 데 비해 CPVC는 열과 압력에 견디는 성질이 탁월해 소방용·산업용 특수 배관 원료로 주로 쓰인다.
‘한 손엔 축배를 한 손엔 칼을' 체질개선 나선 화학사들
(사진) 화학계 고부가 제품의 하나인 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ABS). /LG화학 제공

◆원샷법 통해 자체 구조조정 나서기도

사업 구조를 바꾸기 위해 법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LG화학과 한화케미칼은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 일명 ‘원샷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원샷법은 공급과잉 업종 기업이 사업 재편을 쉽게 하도록 규제를 한 번에 풀어주는 법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월 21일 LG화학의 폴리스티렌(PS) 설비 전환에 대해 원샷법 적용 사업 재편 계획을 승인했다. LG화학은 여수에 있던 PS 관련 설비를 고부가가치 제품인 ABS 설비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의 사업 재편 계획안을 제출했다.

LG화학 측은 기존 PS의 수요처인 장난감과 용기 시황 악화와 함께 PS는 중국 화학 업체의 공격적 설비 증설로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됐다고 파악했다. 원샷법 적용 후 LG화학의 PS 국내 생산량은 연간 10만 톤에서 5만 톤으로 절반 정도 축소되며 ABS 국내 생산량은 연간 85만 톤에서 88만 톤으로 증가한다.

한화케미칼은 원샷법의 1호 수혜자다. 지난해 9월 한화케미칼이 제출한 사업 재편 계획이 승인되면서 한화케미칼은 울산 가성 소다 공장 설비와 부지를 신속히 매각할 수 있게 됐다.
한화케미칼은 가성 소다가 과잉공급 상태라고 파악했고 매각을 통해 생산량을 20만 톤 감소시킬 계획이다. 이를 통한 이익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등 신규 수익원 창출에 투입한다.

한화케미칼 관계자는 “원샷법 적용으로 공급과잉에 적절히 대처하고 고부가 제품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정부 또한 국내 화학사들의 고부가가치 원료 생산을 장려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화학업계 경쟁력 강화 방안에는 한국 화학 산업의 공급과잉을 문제 삼고 선제적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는 국내 석유화학 33개 품목 중 4개 품목(12%)이 공급과잉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 4개 품목은 테레프탈산(TPA)·PS·합성고무(BR SBR)·PVC다.

이를 기반으로 정부는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량을 늘리는 구조조정 방안을 화학 기업들에 주문하고 있다. 업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내부적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사업 개편을 진행하고 있지만 강압적인 구조조정에는 난색을 표하는 것이다.

남정근 연구원은 “2015년 삼성이 화학 관련 계열사를 한화와 롯데에 매각한 것처럼 정부가 나서기 전 기업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구조조정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밝혔다. 화학 기업들 또한 무리하게 칼을 대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 손엔 축배를 한 손엔 칼을' 체질개선 나선 화학사들
(사진) 한화케미칼 관계자(오른쪽)가 지난해 8월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민원실에 기업활력법과 관련된 산업 재편 승인 심사를 신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알래스카의 여름’ 이후를 대비해야

국내 화학 업계를 둘러싼 세계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중국 화학 기업들의 성장이다. 당초 국내 화학 기업들의 수출량 절반을 책임지던 중국이 자급자족 비율을 차차 높이자 국내 기업들이 수출 활로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0년 TPA의 대중 수출량은 316만 톤이었지만 2015년에는 67만 톤으로 급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주의 또한 화학업계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27일 미 트럼프 정부는 LG화학과 애경화학이 생산한 가소제(DOTP)에 대한 반덤핑 여부를 조사한 후 예비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화학사들의 주가가 떨어지는 등 화학업계를 바라보는 불안한 심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고부가가치 사업으로의 전환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지만 당장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술 개발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고 성공 가능성 또한 예측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학사들은 연구·개발(R&D)과 M&A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