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3월 말 태광그룹의 세화미술관 개관 앞둬…서울 시내 기업 미술관 9곳
재능 있는 신인 작가 등 예술 인재 발굴의 창구…‘비자금 온상’ 이미지 벗기 주력
기업 미술관, ‘메세나 활동’의 중심축으로
(사진) 세화미술관이 자리한 서울 새문안로 흥국생명빌딩 앞. 이 곳에 세화재단의 대표 소장품인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해머링 맨 (Hammering Man)'이 전시돼 있다. /세화미술관 제공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3월 30일 서울 시내에 또 하나의 기업 미술관이 탄생한다. 태광그룹 세화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세화미술관이 그 주인공이다.

대개 기업 미술관 하면 미술품과 관련한 비리, 불법 상속과 증여 등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들은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천문학적 금액의 작품을 확보하며 국공립 미술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 또한 상업적 목적보다는 비영리 공공성에 보다 중점을 두고 기업의 사회공헌의 한 축으로써 미술관을 활용하고 있다.

재벌가의 자금 세탁소란 오명에서 브랜딩 이미지 제고까지…. 기업 미술관의 명과 암을 들여다봤다.
기업 미술관, ‘메세나 활동’의 중심축으로
(사진) 서울 주요 기업 미술관(1급 기준) 현황. /문화체육관광부

◆‘세화미술관’ 문 여는 태광그룹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말 펴낸 ‘2016 전국 문화 기반 시설’에 따르면 서울에 자리한 국내 사립 미술관 28곳 중 대기업이 직간접적으로 보유한 미술관은 총 8곳(1종 미술관 기준)이다.

삼성미술관리움(삼성)·아트센터나비(SK)·아트선재센터(대우)·금호미술관(금호아시아나)·성곡미술관(쌍용)·대림미술관(대림)·한미사진미술관(한미약품)·포스코미술관(포스코) 등이다.

여기에 올 3월 말 개관하는 태광그룹의 세화미술관까지 더하면 총 9개의 기업 미술관을 서울 시내에서 만날 수 있다.

새로 문을 여는 세화미술관은 태광그룹의 세화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한다. 오는 3월 30일 개관을 앞두고 지난 1월 31일 서울특별시 1종 미술관으로 최종 등록됐다.

세화미술관은 태광그룹 창업자 고(故) 이임용 선대 회장의 부인이자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의 모친인 고 이선애 태광그룹 전 상무(세화예술문화재단 초대이사장)의 숙원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은 세화예술문화재단(구 선화예술문화재단) 초대 이사장 재임 시절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기업의 사회공헌 뜻을 구현하기 위해 미술관 건립을 염원해 왔다.

세화미술관은 고인의 뜻을 기려 상업 목적보다 공익 목적에 중점을 두고 태광그룹의 ‘기업 메세나(예술이나 문화 활동에 대한 기업의 전반적인 지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역할을 담당할 계획이다.
기업 미술관, ‘메세나 활동’의 중심축으로
(사진) 서울 용산구에 자리한 삼성미술관 리움 전경. /한국경제신문

재계 1위 삼성 또한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의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란 철학을 받들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이 1982년 용인에 설립한 호암미술관과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한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다.

이 중에서도 리움은 기업 미술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리움은 작년 기준으로 총 1만5000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여타 미술관의 규모를 압도하는 것이다. 국립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본관)의 소장품은 7460점이다.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금강전도(국보 217호)’를 비롯해 조선시대 청화백자 매죽문 호 등 국보·보물급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박수근 화백의 ‘소와 유동’, 아니시 카푸어 작가의 ‘육각거울’ 등 국내외 세계적인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건축물 또한 리움의 자산이다.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 등 현 시대의 세계적 건축가 3인이 리움의 설계를 맡아 건축학도의 성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2015년엔 미술 전문가 20명이 참여한 한 설문 조사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전시 공간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미술관을 이끄는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또한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위에 올랐다. 리움이란 미술관 명칭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LEE, 李)가의 미술관(Museum)에서 따온 리움(Leeum)은 삼성이 미술관 건립에 어느 정도의 공을 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SK그룹의 대를 이은 미술 사랑도 유명하다. 최태원 SK 회장의 어머니인 박계희 여사는 현 아트센터 나비의 전신인 워커힐미술관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앤디 워홀의 국내 최초 개인전을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 메레 오펜하임 등 미술계 거장을 국내에 소개했다.

박 관장의 뒤를 최 회장의 배우자인 노소영 관장이 이으면서 아트센터 나비의 시대가 열렸다. 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노 관장은 순수예술보다 과학과 예술을 융합해 미술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는 로봇을 미디어 아트에 접목한 ‘B급 로봇 전시회’, 인공지능(AI)과 예술을 접목한 ‘아직도 인간이 필요한 이유 : AI와 휴머니티’ 등의 다양한 전시를 열고 있다.

이 밖에 대림문화재단이 2002년 개관한 대림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출발해 현재는 사진뿐만 아니라 디자인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학예사 11명 등 보조 인력만 49명으로 기업 미술관 중 최다 인력을 뽐낸다. 연 관람 인원 또한 46만866명으로 기업 미술관 중 으뜸이다.

◆비자금 창구 등 ‘오명’ 남기기도

전자·유통·건축·제약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거리가 먼 기업들이 미술관 운영에 너도나도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 측은 미술관 설립 목적에 ‘사회공헌’이 있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낸다.

선대 회장, 또는 최고경영자(CEO)의 뜻을 받들어 상업적 이윤 추구보다 공익 활동에 의미를 두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 자사 미술관이 한국 미술의 발전과 사회공헌을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인 ‘메세나 기관’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016 주요 기업·기업재단 사회공헌 백서’에 따르면 전년도(2015년) 기업의 분야별 사회공헌 지출에서 문화예술·체육 부문은 16.4%로 3위다. 취약 계층 지원(33.5%)과 교육·학교·학술(17.5%) 분야 다음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2006년 집계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전경련 측은 “그간 창의 인재의 중요성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기업에서 문화·예술을 수단으로 활용한 교육·치유 프로그램이 증가했다”고 이를 분석했다.

기업이 운영하는 주요 재단의 사회공헌 사업비 집행 규모를 봐도 미술관에 상당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선 2015년 기업 재단 62곳의 사업비 지출액이 총 3조3903억원으로 전년 대비 1.91% 증가했는데 문화 분야 재단 등이 기존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을 확대하면서 전체 사업비를 늘렸다고 분석했다.

특히 삼성문화재단은 리움·호암미술관 등 미술관 사업에 집행 규모를 늘리며 사업비 집행액이 가장 많은 상위 10개 재단의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재단은 해외 유명 미술관과의 상호 교류와 협력 관계를 통해 미술 사업의 전문화·국제화를 앞당기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기업 미술관의 사회공헌 이면에는 불법 비자금 및 불법 상속, 증여의 온상이라는 오명도 있다.

실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역대 그림 로비 및 비자금 의혹 사건에는 1999년 신동아그룹부터 2007년 쌍용그룹의 성곡미술관이 연루된 ‘신정아 스캔들’, 2007년 당시 김영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가 폭로한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 오리온그룹의 ‘서미갤러리’ 사건 등이 있다.

이는 미술품이 다른 소비재와 달리 상대적으로 고가이며 또 고정된 가격 없이 작품 가격이 쉽게 변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재벌 세탁소’로 사용된 사례(또는 의혹)다.

특히 미술품은 불과 2013년 이전만 해도 관세는 물론 양도소득세가 붙지 않았다. 양도소득세가 시행된 2013년 이후에도 부동산 등기부처럼 미술품의 권리관계를 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부가 마련되지 않는 이상 미술품의 양도소득세 부과는 사실상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한 통관 기록에 남는 해외 작품과 달리 국내 작품은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것이 많다. 이 때문에 미술품의 현재 소유자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도 미술품이 비자금의 통로로 오용될 소지를 남겨 놓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재경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는 2015년 쓴 ‘미술품 관련 돈세탁에 대한 법률적인 접근’ 보고서를 통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예술 애호라는 허울로 치장해 안전하게 묻어두기에는 미술품이 적절한 도구”라며 “특히 기업 미술관의 경우 작품 구입비를 부풀려 차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한 사례가 더러 있어 부정적인 시각부터 앞서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미술품이 기업 비자금 조성이나 세금 탈루의 수단으로 대중에게 인식된다면 사회 전체가 미술품 거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건전한 미술 시장의 형성과 경제 질서 확립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 미술관, ‘메세나 활동’의 중심축으로
(사진)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왼쪽),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한국경제신문

◆단순 ‘지원’ 넘어 ‘동반자’ 돼야

기업 미술관 안팎에서도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관장 스스로 전문성을 더하거나 신진 작가 발굴과 유명 작가의 작품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과거 ‘신정아 스캔들’로 이미지 실추를 겪었던 성곡미술관은 쌍용그룹 창업자인 고 김성곤 회장의 ‘인재 양성이 나라 발전의 밑거름’이란 지론 아래 젊은 작가를 지원하는 ‘내일의 작가상’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실제 2015년 열린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 시상식에서 성곡미술관의 ‘내일의 작가상’ 출신인 임흥순 작가가 국내 최초 은사자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삼성의 리움 또한 2004년 개관 이후 지난 10여 년간 매튜 바니를 비롯해 크리스찬 마클레이, 아니시 카푸어, 히로시 스기모토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단순 미술관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목적에서 더 나아가 경영 활동에서도 이익을 보고 있다. 특히 기업의 이미지 제고, 브랜드 제고에 톡톡한 효과를 봤다.

리움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배우자 만찬 장소로 선택되기도 했고 뉴욕타임스 등 유수의 해외 언론에 ‘가봐야 할 명소’로 소개되는 등 삼성이 세계적인 문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미술계에서도 기업 미술관에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이제는 문화·예술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이 사회적 공헌을 위해 문화·예술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된 지 오래”라며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사회공헌 성격에서 탈피해 기업과 예술이 실질적인 동반자로서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