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 돈의 미래]
비(非) 현금 이용 비율 86.7% “지폐 있는 경제성장 힘들어질 것”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정부 주도하의 ‘동전 없는 사회’가 시행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지만 국민 체감은 ‘제로(0)’에 가깝다.

사업에 대한 홍보가 미흡한 것은 물론 이미 신용카드, 직불카드, 모바일 결제 서비스 등 비(非)현금 지급수단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동전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불붙은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스칸디나비아 3국을 중심으로 동전을 넘어 지폐까지, 이른바 ‘현금 없는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실물화폐의 종말은 올 것인가. ‘돈의 미래’를 전망했다.
'동전 없는 사회'를 넘어 '현금 없는 사회'로
(사진)

#.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신의 눈앞에 한 걸인이 나타난다. 걸인은 당신에게 QR(2차원 바코드) 코드가 그려진 목걸이를 내민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고 모바일로 송금해 달라는 얘기다.

우스갯소리이거나 미래 사회 얘기가 아니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QR코드가 생활화됐다. 걸인의 사례는 단적인 예일 뿐 노점상에서 파는 과일부터 잡화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QR코드로 읽고 결제할 수 있다. 위조지폐 논란이 많은 중국에서는 국가가 아닌 상점, 즉 개인들이 현금 대신 전자 결제를 오히려 권장하고 있다.

먼 나라 스웨덴의 사례는 더 극적이다. 정부 차원에서 ‘현금 없는 사회’를 밟아 가고 있는 스웨덴에서는 2013년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강도가 들었지만 현금이 없어 빈손으로 나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실제 이 나라에서는 은행 지점의 현금 보유를 줄인 뒤 은행 강도 수가 2008년 110명에서 2011년 16명으로 줄며 3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기술 발전에 따라 현금보다 신용카드, 직불카드, 모바일 결제 서비스의 사용이 늘면서 현금을 대체하는 비현금 지급수단이 소비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에서 이용 비율이 가장 높은 지급수단은 신용카드다. 현금 이용 비율보다 약 4배 가까이 높다. 2016년 현금 이용률이 13.6%인 반면 신용카드(54.8%)와 체크·직불카드(16.2%) 이용률은 71.0%다.

여기에 계좌이체(15.2%)와 선불카드(0.3%) 및 전자화폐(0.2%)까지 더하면 비현금 지급수단 이용률은 86.7%까지 늘어난다. 국세·지방세·공공요금 등에 대한 카드 납부가 가능해지고 1만원 미만의 소액 결제도 카드로 계산할 정도로 카드 사용 소비 문화가 정착됐다는 분석이다.
'동전 없는 사회'를 넘어 '현금 없는 사회'로
◆현금 13.6% < 비현금 86.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비현금 이용 비율은 높게 나타났다. 마스타카드가 2013년 33개국 개인 소비자 지출 행태 조사를 통해 각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70%로 33개국 중 10위다.

이 회사는 비현금 결제 비율의 구간별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전 정도를 나눴는데 △비현금화 비율이 80% 이상인 국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에 진입한 국가(nearly cashless) △비현금화 비율이 60~80%인 국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전을 지속하는 시장과 정체기 시장이 공존하는 국가(tipping point) △40~60%인 국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로 전환 가능한 인프라를 구축 중인 국가(transitioning) △40% 이하는 현금 사용 전환을 시작하는 단계의 국가들로 결제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inception)다.

이 중 한국은 둘째 구간인 현금 없는 사회로의 진입 직전 단계에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1위는 벨기에로 93%이며 꼴찌(33위)는 이집트로 7%였다.

하지만 마스타카드의 평가에 비해 국내에서의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는 걸음마 단계다. 이제 막 그 전 단계인 ‘동전 없는 사회’로의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마저도 시행된 지 한 달, 관련 정책을 아는 이들이 소수에 그친다.

앞서 한국은행은 지난해 1월 ‘핀테크’로 촉발된 지급 결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까지 추진할 12개 중점 과제를 이르는 ‘지급 결제 비전 2020’을 선포했다.

‘동전 없는 사회’는 이 12개 중점 과제의 일환이다. 거스름돈 등 소액의 동전을 카드에 충전하거나 계좌 입금해 줌으로써 동전 사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지난 4월 20일부터 국내 주요 편의점·대형마트·백화점 등 유통업체가 시범 사업자로 선정돼 관련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한은은 이를 통해 동전 사용과 휴대에 따른 불편을 완화하고 유통과 관리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동전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상당하다. 한은이 매년 동전을 새로 만드는 데 연간(2012~2016년 평균) 500억원 이상 들어가고 찌그러지거나 부식돼 폐기한 동전 규모만 수십억원에 달한다.

한은은 2016년 동전 페기 규모는 17억400만원으로 3980만 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여기에 동전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구리·아연·니켈의 자원 낭비, 원자재 수입에 따른 외화 비용까지 포함하면 유통과 관리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더욱 늘어난다.

국민들의 동전 보유 필요성도 줄고 있다. 한은이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전국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동전 없는 사회 정책’을 찬성하는 의견이 50.8%로 반대(23.75)를 압도했다. 소지가 불편(62.7%)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한은은 ‘동전 없는 사회’ 시범 사업을 종합 평가한 뒤 사업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39;동전 없는 사회&#39;를 넘어 &#39;현금 없는 사회&#39;로
◆투명성 제고…노인 불편 부작용도

전문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동전을 넘어 지폐까지, 이른바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800년대 중반 영국에서 최초의 현대적 지폐를 도입한 이후 지폐 없는 경제성장을 생각할 수 없었듯이 앞으로는 지폐 있는 경제성장을 점점 더 생각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P2P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뱅킹, 블록체인 등 핀테크(fin-tech) 산업의 성장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이 밖에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가 투명성·효율성·안전성·간편성 측면에서 장점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금 없는 경제로 이행되면 세율 인상 없이도 약 20조~64조원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세율 인하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훈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거래의 투명성이 증가하면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정부 세입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부작용도 있다. 노인 등 비교적 현금 사용에 익숙한 이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고 개인 사생활을 침해해 금융실명제 초기처럼 거래 자체가 움츠러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성훈 부연구위원은 “여러 지급 결제수단 중 어떤 수단으로 거래할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인데 현금이 사라지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동전이 없어지면서 물건 가격이 1000원 단위로 책정돼 소비자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한은은 10원 단위도 적립할 수 있어 시범 사업이 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내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에는 공감대를 두고 있다. 단 정책 방향은 현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사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데 맞춰져 있다.

한은 금융결제국 관계자는 “현금 이용이 시장에서 줄고 있는 것에 대응해 현금 거래의 편의성을 제고하고 상황에 맞는 지급 결제 정책을 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인위적으로 현금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동전 없는 사회’ 시범 사업을 실시한 가운데 서울 중구 세븐일레븐 소공점에서 4월 19일 차현진(왼쪽)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이 CU동전적립카드로 동전 적립 시연을 하고 있다.
&#39;동전 없는 사회&#39;를 넘어 &#39;현금 없는 사회&#39;로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