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창업자 타계 4주기…최성원 부회장, ‘쌍화탕·비타500’의 신화 이어간다
광동제약의 DNA ‘품질에 대한 변치 않는 최씨 고집’
(사진) 광동제약 창업자 고(故) 최수부 회장(왼쪽)과 최성원 광동제약 대표이사 부회장. /광동제약 제공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7월 24일은 광동제약 창업자인 고(故) 최수부 회장의 타계 4주기였다.

광동제약은 이날 충남 천안의 선영에 송덕비를 세웠다. 50여 년 제약업 외길을 걸으며 맨손으로 성공을 일군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됐던 청년 최수부 창업자는 한방 제약사 영업 사원으로 시작해 광동제약사를 창업, 회사를 ‘뿌리 깊은 나무’로 일으켜 세웠다.

◆영업사원·대리점 사장 거쳐 28세에 창업

어린 시절 최수부 창업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참외장수·담배장수·엿장수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한방 제약회사인 ‘고려인삼산업사’ 영업 사원으로 취직한 것이다.

그가 팔게 된 제품은 한방 의약품인 ‘경옥고’였다. 하지만 당시 웬만한 회사원 월급에 맞먹는 비싼 보약을 파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출근 첫날 수십 군데에서 퇴짜를 맞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무실과 상점을 방문한 끝에 을지로의 한 양복점에서 두 통의 경옥고를 팔 수 있었다.

근성으로 똘똘 뭉친 청년 최수부 창업자는 입사 첫해 ‘판매왕’ 자리에 오른 이후 3년 동안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남다른 고객 관리 덕분이었다. ‘영업 사원의 역할은 물건을 파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된다’는 일념으로 고객의 반응을 체크했다.

세밀한 고객 관리는 곧 실적으로 이어졌다. 다른 영업 사원이 판 경옥고는 효과가 없다며 반품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경옥고는 가격이 비싸 할부로 값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금이 제때 되지 않아 쩔쩔매는 다른 사원들과 달리 최 창업자는 척척 수금이 됐다.

기존 고객이 지인에게 최 창업자를 추천해 새 고객이 줄을 잇는 일도 많았다.

최 창업자는 생전에 “시장에서 장사하던 시절부터 ‘성실한 고객 관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하곤 했다.

그는 첫 직장에서 두각을 보인 이후 대한인삼제약사 대리점을 개설해 창업 자금 300만환을 마련, 1963년 광동제약사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창업 품목은 경옥고였다.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 소재한 가옥을 매입해 공장 건물을 세우고 경옥고를 달일 수 있는 가마를 설치했다. 광동제약의 기틀은 그렇게 작은 공장에서 시작됐다.

최 창업자는 기획이나 마케팅의 개념이 전무했던 1970년대에 쌍화탕의 ‘고급화’ 전략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심했던 1975년 당시 쌍화탕 제조사는 열 군데가 넘었다. 하지만 쌍화탕은 지금처럼 인기 품목이 아니었다.

그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동의보감’ 처방을 철저히 지키고 최상의 재료를 이용해 업그레이드한 쌍화탕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한 병에 50원 정도였던 소비자가격을 100원 내외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요즘으로 치면 ‘품질 차별화’ 전략인 셈이다.

시중 제품의 2배 정도인 가격에 회의적인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이제야말로 쌍화탕다운 쌍화탕이 나왔다”는 호평이 약사들 사이에 쏟아지며 입소문이 났다. 광동 쌍화탕은 출시 한 달 만에 월 50만 병 이상 팔리는 인기 제품이 됐다.

광동제약의 기획력은 2000년대 초에도 빛을 발했다. ‘웰빙 열풍’으로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과 니즈가 높은 때였다.

최 창업자는 ‘마시는 비타민C’라는 획기적 콘셉트로 제품 개발에 나섰다. 신맛과 강한 맛을 줄인 비타민C 드링크 ‘비타500’을 출시하기까지 수십 번 시제품을 만들어 직접 마셔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01년 론칭과 동시에 돌풍을 일으킨 비타500은 회사의 대표 제품이 됐다.

최 창업자는 회장이자 유명 광고 모델이기도 했다. 제품 CF에 여러 차례 출연해 회사 인지도를 높인 주인공이었다. 데뷔작은 1992년 제작된 경옥고 드링크 광고였다.

소비자와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창업자의 진정성 있는 모습에 제품 신뢰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 덕분에 연간 2억~3억원 정도에 그쳤던 경옥고 매출액은 1993년 24억원으로 급증했다.

이윤성 전 KBS 앵커, 탤런트 이순재 씨 등과 함께 찍은 1995년 우황청심원 CF도 장안의 화제였다. ‘30년 변치 않는 최씨 고집’이라는 광고 속 멘트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이 아직도 많다.

최 창업자는 광고에 출연해 회사 이미지를 제고하고 고객과 소통해 온 그는 오늘날 ‘PI(President Identity)’로 불리는 최고경영자(CEO) 이미지를 1990년대에 확립하는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외환위기 시련도 막아낸 ‘노사화합’ 경영
광동제약의 DNA ‘품질에 대한 변치 않는 최씨 고집’
(사진) 광동제약의 대표 제품. /광동제약 제공

광동제약은 최 창업자의 광고 출연 등으로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1997년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광동제약은 1998년 4월 1차 부도를 맞게 됐다. 최 창업자가 손수 나서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막아냈지만 경영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전 임직원이 1998년분 상여금을 전액 자진 반납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어 발족된 노사발전추진위원회는 승진 승급 동결, 임금 동결, 상여금 반납, 30분 조기 출근과 일 더하기 운동, 연장 수당 자진 반납 등을 통해 경영 정상화에 힘을 보탰다.

최 창업자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대표이사 주식 10만 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는 결단을 내렸다. 임직원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화답한 것이다. 급박한 위기를 극복한 이후인 2000년 직원들이 자진 반납했던 상여금 전액을 다시 지급했다.

최 창업자는 생전에 “노사는 결코 갑을 관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가 되면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동지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국가적 경제 위기에도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극복해 나간 광동제약의 저력은 최 창업자의 ‘노사 화합’ 경영에서 비롯됐다.

영업 사원으로 시작해 광동제약을 설립한 이후 회사의 모든 일을 손수 챙겼던 최 창업자는 국내 제약업계에 큰 획을 그었다.

현재 광동제약은 최 창업자의 외아들인 최성원 대표이사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최 부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후 1992년 광동제약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영업본부장(상무) 등을 역임했다. 최 부회장은 최 창업자가 2013년 7월 향년 77세를 일기로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2015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그는 ‘품질에 대한 변치 않는 최씨 고집’을 이어가고 있다.

choi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