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전통’ 강조해 트렌드 이끌어
휠라코리아, 패션업계 상반기 매출 1위
레트로 코드가 가미된 휠라 헤리티지 라인./ 휠라 페이스북
레트로 코드가 가미된 휠라 헤리티지 라인./ 휠라 페이스북
[한경비즈니스=김영은 기자] 아날로그 감성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지금, 패션도 과거를 향해 돌아가고 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패션스타일뿐만 아니라 1990년대 유행하던 브랜드 자체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1990년대를 풍미한 스트리트 브랜드는 새로운 디자인이 아닌 전통적인 형식의 ‘올드스쿨’을 내세워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휠라(FILA)·리복(Reebok)·타미힐피거(TOMMY HILFIGER) 등 19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브랜드들은 과거의 브랜드 로고와 옛 디자인을 되살려 매출을 늘리고 있다.

1990년대 스트리트 브랜드 중 가장 화려하게 부활한 곳은 ‘휠라’다. 이른바 ‘아재 브랜드’라고까지 불리던 휠라코리아는 올해 상반기 국내 패션 기업 중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휠라코리아 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매출은 1조3465억원, 영업이익은 1304억원에 달했다. 매출과 영업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200%, 300% 이상 뛴 수치다. 삼성물산·한섬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1위에 오른 휠라의 비결은 무엇일까.

1980년대 초반 고급스러운 스포츠화를 판매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휠라는 1991년 한국에 들어왔다. 휠라의 신발·가방·스웨트 셔츠는 당시 1020세대의 필수 아이템으로 떠오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나이키·아디다스 등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에 밀리며 유행에 뒤처진 중·장년층 브랜드가 돼버렸다. 2011년 550억원에 달했던 영업이익도 꾸준히 추락하며 2016년 400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이 같은 상황에서 휠라는 젊은 층을 겨냥한 과감한 브랜드 리뉴얼로 승부수를 띄웠다. 기존 중년 고객층을 20대 이하로 낮추기 위해 1020세대에 적합한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대로 브랜드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수년간 침체를 이어 왔던 휠라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2016년부터다. 휠라 부활의 주역은 1990년대 휠라 로고를 활용한 ‘헤리티지 라인’이다.

특히 러시아 출신의 신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와의 협업은 세계 패션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고 리한나, 비욘세, 켄달 제너, 에이셉 라키 등 톱스타들까지 휠라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 영향력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전해졌다.

빅로고 티셔츠, 코트디럭스 등 휠라가 새롭게 내놓은 헤리티지 라인은 국내에서도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발매한 코트디럭스(슈즈)는 7월 말까지 누적 판매량이 50만 족을 넘어섰다. 하루 평균 1500족이 팔린 셈이다.
휠라X펩시콜라 컬래버레이션 컬렉션. / 휠라 페이스북
휠라X펩시콜라 컬래버레이션 컬렉션. / 휠라 페이스북
여기에 빅로고 티셔츠도 매월 판매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또 올해 대대적으로 시작된 펩시·메로나 등과의 컬래버레이션 전략도 통했다.

펩시와 진행한 슬라이드는 판매율이 80%를 넘었다. 메로나와 출시한 코트디럭스와 드리프터 슬리퍼 2가지 제품을 각각 3000족씩 출시했는데 2주 만에 완판을 기록했다. 낡은 브랜드라고 생각됐던 휠라가 업계를 넘나드는 협업을 통해 젊은 층에게 유쾌하게 다가간 것이다.

◆크게 새긴 전통 로고가 성공 비결
아이돌 그룹 몬스타엑스가 모델인 카파 헤리티지 라인 ‘222반다’. / 카파 홈페이지
아이돌 그룹 몬스타엑스가 모델인 카파 헤리티지 라인 ‘222반다’. / 카파 홈페이지
남녀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모습의 로고 ‘오미니’로 유명한 ‘카파(Kappa)’ 역시 1990년대 큰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조용하던 카파도 전통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며 실적에 날개를 달았다. 카파의 성장 동력은 브랜드 헤리티지를 살린 ‘222반다(222 BANDA)’ 라인이다.

현재 가장 핫한 글로벌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 디자이너도 201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카파와 협업해 화제가 됐다.

카파는 ‘222반다’ 라인을 출시한 올해 7월 이후 8월까지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 늘어났다.

리복 역시 브랜드를 상징했던 ‘벡터(Vector)’ 로고를 제품에 사용하지 않는 등 낡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리복의 부활은 한때 ‘폐기 처분’하려고 했던 벡터 로고가 이끌었다.

리복에 인공호흡을 한 디자이너 역시 고샤 루브친스키다. 루브친스키 디자이너는 2016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리복과의 협업 아이템을 선보이며 옛 향수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리복은 1990년대 상징인 벡터 로고를 베이스로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며 스트리트 브랜드로서의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했다.
1990년대 출시했던 제품을 재해석한 타미힐피거의 ‘타미 진스 3.0’ 빅로고 티셔츠./ 타미힐피거 페이스북
1990년대 출시했던 제품을 재해석한 타미힐피거의 ‘타미 진스 3.0’ 빅로고 티셔츠./ 타미힐피거 페이스북
199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상징이었던 타미힐피거도 2000년대 들어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5년 매출이 6% 감소한 타미힐피거는 2016년 이후 지속적인 개선을 보이다가 2017년 상반기 매출이 16억 4400만 달러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특히 2분기 매출이 유럽과 아시아권에서 9% 성장하는 등 강력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타미힐피거는 어떻게 다시 젊은이들의 유행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타미힐피거의 부활은 과감한 마케팅 전략에서 탄생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런웨이를 버린 대신 카니발을 열어 패션쇼를 진행하고 톱스타들과의 협업을 실시간으로 발표했다.

스타일면에서는 고집하던 클래식을 버리고 스트리트 감성을 택해 다시 젊어졌다. 특히 큼지막한 브랜드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고 강렬한 컬러 배색으로 레트로(retro : 복고주의를 지향하는 패션 스타일) 느낌을 가미했다.

빈티지 캐주얼 브랜드 ‘타미힐피거 데님’은 1990년대 인기 상품을 재해석한 캡슐 컬렉션 ‘타미 진스 3.0’을 출시했다. 타미 진스 3.0 역시 큰 로고와 함께 타미힐피거가 1990년대 출시했던 제품들을 재해석해 총 42개 상품을 선보였다.

◆버버리, 버렸던 체크무늬 다시 살렸다
버버리X고샤 루브친스키 컬렉션과 9월 컬렉션에서 전면에 내세운 버버리 전통 체크무늬. / 버버리 페이스북
버버리X고샤 루브친스키 컬렉션과 9월 컬렉션에서 전면에 내세운 버버리 전통 체크무늬. / 버버리 페이스북
스트리트 브랜드뿐만 아니라 럭셔리도 1990년대 감성으로 돌아가고 있다. 올해 9월 런던 패션 위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이슈 하나를 꼽는다면 ‘버버리가 다시 선보인 체크 패턴’이다. 버버리는 2006년 공식적으로 ‘체크무늬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안젤라 아렌츠 당시 버버리 최고경영자(CEO)는 너무 오랫동안 체크무늬가 쓰였다며 새로운 아이콘을 통한 이미지 변신을 선언했다.

버버리는 당시만 해도 체크무늬가 탈피해야 하는 낡은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전 세계적으로 체크무늬 모조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럭셔리한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아렌츠 전 CEO는 새로운 버버리를 만들기 위해 버버리의 시그니처였던 체크무늬 비율을 전체 상품의 10% 이하로 낮추는 모험을 감행했다. 150년간 이어 온 갈색과 빨간색 체크무늬 패턴에서 벗어나면서 버버리가 새롭게 브랜드 상징으로 삼은 것은 말을 탄 기사 문양과 창업자 토머스 버버리의 흘림 서명이었다.

하지만 2017년 9월 컬렉션에서 버버리 체크무늬가 다시 돌아왔다. 브랜드 상징인 타탄체크로 컬렉션을 꽉 채워 그야말로 ‘체크의 향연’을 선보였다. 타탄체크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인기 절정을 누렸지만 모조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싸구려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패션의 복고 시류에 맞춰 전통적인 브랜드 자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또한 루브친스키 디자이너와 협업한 2018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체크무늬를 활용한 영국 스타일을 선보이며 1990년대 패션을 소환했다. 정통 럭셔리와 신흥 스트리트 강자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패션계의 관심을 끌었다.

[돋보기 - 패션업계 ‘미다스 손’ 된 고샤 루브친스키]
젊은층에게 다시 '소환'된 90년대 브랜드
리복·카파·휠라·버버리 등 많은 브랜드의 부활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러시아 출신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와 손잡았다는 것. 1990년대 이후 추락했던 브랜드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준 루브친스키 디자이너는 ‘유스(Youth) 컬처’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주류 패션계와 거리가 먼 러시아 출신이다. 1985년 태어나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1990년대의 향수를 고스란히 담은 스트리트 패션을 선보이며 1020세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를 뜻하는 ‘포스트소비에트(Post-Soviet)’ 시절, 혼란의 중심에 선 러시아는 당시 새로 유입된 음악과 예술·약물·스킨헤드족 등 정제되지 않은 거친 하위문화가 휩쓸었다. 이런 문화적 격동기가 키워낸 루브친스키 디자이너는 반사회주의 에너지를 패션에 적극 반영했다.

자신과 자신의 브랜드를 ‘젊은 러시아인(young Russian man)’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만큼 루브친스키 디자이너의 영감의 원천은 오로지 러시아였다. 밀라노나 파리가 아닌 비주류 러시아 감성으로 재해석한 그에게 아디다스·휠라·카파·리복 등 스포츠 브랜드뿐만 아니라 버버리 등 럭셔리 브랜드까지 손을 내밀고 있다.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