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미·중 패권경쟁 한복판에 선 기업들…면밀한 전략·통찰력 없이는 설 자리 없어

장보고 이후 1200년, 한국의 ‘글로벌 경영’ 얼마나 나아졌나


[한경비즈니스 칼럼=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전략 경영 분야의 책들은 남다른 발상으로 사업 모델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끝없는 혁신으로 고유의 경쟁 우위를 만들고 경쟁자가 파고들기 어려운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도 좋지만 눈을 세계로 돌려보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곳곳에 있다.

창의와 혁신이 말처럼 쉽지 않듯이 글로벌 전략 역시 세상을 읽고 문제를 풀어내는 색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기회는 물론 그런 능력을 갖춘 준비된 자만의 것이다.

◆해외로 눈 돌려 성공한 현대건설과 차범근

현대건설이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 공사를 수주했을 때 공사 가액은 당시 국내 총통화량(M₂)과 맞먹었다. 국내 모든 기업을 인수할 수도 있는 돈을 번 셈인데, 외환보유액이 사실상 바닥난 상황에서 이 공사의 선수금으로 국가 부도를 넘겼다고 한다.

육교 몇 개 만들면 서울시 예산이 절반은 날아가고 그나마도 기존 업체들의 담합으로 돌아가는 꽉 막힌 국내 건설 시장에서 공무원들이 나눠 주는 관급 공사에만 매달렸다면 단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은 6·25전쟁 당시 미군 기지 공사에서 시작해 동남아 지역 도로 공사 등 해외에서 기회를 만들어 가며 국내와 다른 수준의 기술 품목과 거래 조건에 맞춘 경력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중장비 운용, 자재 조달과 운송, 금융 등 관련 분야의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최근 영국 리그에서 활약하는 토트넘 홋스퍼 FC 소속 손흥민이 국내에서 성장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세계적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각종 국내 대회에서 우승 기록을 남겨야 하는 감독과 코치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본기 훈련보다 당장 이기는 잔재주를 강요한다.

여기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는 축구계를 정치판으로 만들기도 한다. 잘못된 훈련 방식과 혹사로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과거 국내 최고의 축구 스타로 꼽혔던 차범근도 이런 판을 벗어나 당시 최고의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선수로 성공했다. 귀국 직후 여전히 심란한 국내 축구판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세계적 선수’라는 브랜드가 있고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와 그 생태계를 잘 알기에 아쉬우나마 자기 몫을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현대건설이나 차범근은 더 넓은 세계무대로 나아갔기 때문에 좁고 꽉 막힌 국내 무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현대건설이 관급 공사의 도급 순위를 올리느라 헐값 수주 담합에 몰두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차범근이 국내 축구판에서 대학이나 실업 팀 감독이 되려면 선배들 눈치 보며 요령껏 경기하고 개인 훈련할 시간에 술자리를 찾아다녔어야 한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훌륭한 제품과 사업 모델이 있다면 월스트리트에서 투자를 받아 실리콘밸리에서 승부를 걸 수 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게임 업체들은 이미 ‘유서 깊은’ 대기업들보다 훨씬 많은 시가총액을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사업 환경에 힘입은 바도 있지만 일찍부터 세계의 게임 사용자들을 상대로 사업 모델을 키운 결과다.

넥슨은 국내의 빤한 금융 생태계에서 투자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힘을 모아 세계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업공개(IPO)를 했기에 어지간한 ‘대기업’보다 기업 가치를 더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세계로 나가면 더 좋은 부품과 원재료를 가진 파트너를 찾아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캐나다 북부 지방의 추운 겨울과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에 견디는 차를 만들다 보면 실력이 훌쩍 느는 것처럼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업 환경에서 얻은 경험을 종합하면 새로운 제품과 사업 모델을 개발할 수도 있다.

국내 중저가 화장품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른 나라의 문화 환경에서는 제품과 서비스가 새로운 정체성과 생명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어렵게 산업화를 이뤄낸 경험을 개발도상국의 현실에 비춰 보면 문제 해결의 대안이 훤히 보이기도 한다.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는 게 목표인 대주주와 거기에 영합해 눈치 보며 잇속 챙기는 ‘회사 아전’들이 판치는 숨 막히는 회사에서 뜻을 펼 수 없다면 세계로 나가 능력을 발휘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사랑하는 조국이 마음에 걸린다면 더 넓은 세상에서 얻은 실력으로 나중에 얼마든지 애국할 수 있다.

◆세계를 읽고 얽힌 문제를 풀어야

물론 해외로 진출하는 게 쉬운 일이냐며 ‘현실의 벽’을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는 이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맨손으로 꽉 막힌 일본의 기득권 체제를 뚫고 세계적 투자가로 성장한 일본 스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사례를 찾아보기 바란다고 말이다.

글로벌 경영은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폼 나게 차려 입고 외국 나가 파티나 하는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보인다고 손님도 없는 빵집을 외국의 국제금융센터 한복판에 열고 특별한 현안도 없이 ‘세계적 인물들’과 면담을 잡는 한심한 짓들은 허영심의 발로일 뿐이다.

과거 머리카락을 사 모아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고 이역만리 중동 사막에서 조석 점호를 해가면서 돈을 번 개발연대의 노력이 글로벌 경영의 시작이라면 이제는 미·중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서 애플·구글의 세계 전략에 대응하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드는 국내 정보기술(IT) 기업들의 하루하루가 21세기의 글로벌 경영이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글로벌 경영은 그 판을 읽고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 되고 만다.

경영전략은 새로운 도전에 답을 찾는 어려운 일이다. 글로벌 수준에서의 경영전략은 훨씬 어렵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현안을 신속히 파악해 대응하려면 한밤중에 자다가 전화 받고 즉시 결재하는 능력은 기본이다. 또 세계의 정치·경제를 움직이는 만만치 않은 상대들의 게임을 읽고 대응책을 구상해야 한다.

한때 세계 최고의 음원 재생 기기(MP3) 전문 업체 아이리버가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기존의 ‘업계 구도’ 밖에서 일어난 변화가 사업의 판 자체를 바꾸고 만 것이다. 아이리버가 기울어 가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음악 파일뿐만 아니라 영상 등의 콘텐츠 관련 기기들이 개인 미디어로 ‘융합(convergence)’되는 추세는 이미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이리버가 그 변화를 조금 빨리 읽었다면 스마트폰의 주요 부품으로 입지를 잡거나 스포츠 전용, 방수 기능 등 특별한 성격의 전문 기기나 이어폰 같은 음향 주변 기기로 사업 모델을 다시 잡는 전략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이리버는 흐름을 읽지 못했고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최근 미·중 패권 경쟁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주요 대기업들을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아넣고 있다. 턱밑까지 쫓아온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의 견제로 꺾인 점은 기회지만 중국에 밉보일 때 겪어야 할 고난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

이미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국내 배치를 둘러싼 중국 당국의 압력에서도 경험했듯이 관광버스 운전사와 명동 화장품 가게 사장의 고민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통상 분쟁이 아니라 범세계적 산업의 주도권, 나아가 21세기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셈이다.

글로벌 경영은 결국 나름의 사정을 가진 주권 국가들의 정치적 과정들과 맞물려 전개된다. 경영학 교과서에서는 막연히 ‘정치적 환경’이란 간단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대중의 정서가 미디어와 시민 사회와 연결돼 형성되고 이해관계 집단의 이합집산과 만나는 정치의 속사정은 어느 나라나 심란하다.

이런 복잡한 사정이 다시 국제정치의 현실과 만나는 곳에서 사업에 대한 규제와 지원 정책이 나오고 금리와 주가에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동네 분식집 사장의 은행 대출금리는 미·중 무역 분쟁에 따른 경기 후퇴와 G20 국가들의 금리와 재정정책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전략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읽고 베트남에 투자한 운동화 공장 사장은 미·중 패권 경쟁의 수혜자가 되고 ‘중국 한류’만 믿고 살던 연예 기획사 사장은 난데없이 떨어지는 규제 조치에 난감한 처지가 된다. 세계의 정치·산업·금융을 읽는 통찰력이 없이는 작은 일도 제대로 성공하기 어렵다.

◆글로벌 경영은 국가 전략의 핵심

잘하면 세계무대의 스타가 되지만 잘못하면 세계 꼴찌로 떨어지는 국제 경쟁의 현실은 국내에서 힘센 대기업 눈치 보며 고만고만한 경쟁자들과 무난하게 지내면 되던 시대와 다르다.

몇몇 선두 기업들이 대세를 장악하면 다른 참가자들은 부스러기 얻어먹기도 힘든 ‘승자 독식’의 구조는 면밀한 전략적 판단이 없으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냉정한 세상에서 미국·중국과 같이 거대한 시장 기반을 가진 기업들에 맞서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이 판의 속사정을 읽고 설 자리를 만드는 것이 글로벌 경영이다. 경영전략 분야의 연구들은 막연하게 ‘전략적 제휴’나 ‘플랫폼 주도권’을 주장하지만 사업의 구체적 현실을 놓칠 때가 많다.

삼성의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책임하게 ‘독자적 기술 표준’을 찬양하기도 한다. 미국이 화웨이 장비 구입에 반대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지혜로운 중립’은 누구나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원천 기술을 가진 업체들에 대한 투자와 기술협력을 위해서는 훨씬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예컨대 ‘한국 챔피언’ 자동차 회사에 맞춰(비록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에 불만은 있지만) 나름 안정된 경영을 해온 부품 업체들이 상전벽해로 달라지는 세계 자동차 산업의 생태계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차량 공유, 물류 배송, 신용 결제, 자율주행이 맞물린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의 시대에 완성차 업체와 부품·소재 협력 업체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수소 경제는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 자동차 회사와 납품 업체들의 설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납품 단가를 올려주는 ‘상생 협력’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업의 구체적 현실을 담은 글로벌 경영은 기업의 전략을 넘어 국제 정치와 산업 정책에 대한 국가 전략의 핵심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1200년 전 바다를 지배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장보고의 경영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9호(2019.06.17 ~ 2019.06.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