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경력 화려한 인재들이 망친 엔론…경영자는 부족함 품어주고 재능 키워주는 안목 갖춰야
영화 속 ‘조커’의 재능을 살려 쓰려면?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성공한 경영자의 인터뷰에는 항상 인재가 나온다. 경영의 핵심은 인재이고 유능한 인재를 키워낸 일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얘기가 등장한다. 이와 함께 대학이 필요한 인재를 제대로 키워 내지 못하고 있다는 준엄한 지적이 이어진다.

훌륭한 경영자의 통찰력이 담긴 뜻깊은 얘기도 있지만 남들이 다 하는 좋은 얘기를 대충 옮긴 경우도 있다. 조각나고 흐릿한 기억(사실은 불만)에 여기저기 떠다니는 유행 담론을 버무린 자기과시도 있다.

경영자의 전략적 선택은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체제와 문화가 뿌리 내리면 다른 생각을 가진 새로운 구성원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새로운 전략 방향을 모색하기 어려워진다. 낡은 생각으로 가득한 꽉 막힌 체제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셈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경영자 스스로가 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대하고 구성원의 다른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호랑이도 토끼로 만드는 기업들

성공한 경영자는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기 쉽다. 아첨하며 실리를 챙기는 영악한(혹은 비굴한)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보면 자신과 다른, 현재의 성공을 부정하는 생각을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다. 용기가 줄어든 경영자는 새로운 도전이 부담스럽다.

자기 돈 아니라고 마구 쓰면서 뭐라도 뒤로 챙기려는 엉큼한 속셈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 젊은 시절 ‘용기가 줄어 거슬리는 말에 화를 내는 날이 오면 은퇴하겠다’던 경영자가 어느새 촘촘하게 얽힌 이해관계에 얹혀 과거의 성공만을 되새김질하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된다.

과거의 성공은 고사하고 물려받은 기업 권력을 대대손손 누리는 것이 목표인 경영자도 있다. 회사 홍보물에는 세계에 도전하는 패기 넘치는 인재를 찾는다지만 본인의 뜻을 잘 따르고 부리기 편한 직원들만 쓰다 버리는 쪽이 마음 편하다.

이런 회사에서 성실함은 비판적 생각을 접은 맹목적 복종일 뿐이다. 창의와 도전은 눈치껏 시키는 일이나 조금 더 해보라는 뜻에 불과하다. 패기는 시키는 일만 물불 가리지 않고 하되 책임은 알아서 지라는 뜻일 수도 있다. 정말로 창의와 혁신으로 세계에 도전하면 모난 돌이 정 맞다가 바보가 되고 만다.

진심으로 세계에 도전하려는 경영자도 어느새 뿌리 내린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의 관료 체제에 얹혀 마음만 바쁠 수도 있다. 애써 영입한 ‘참신한 인재’도 시간이 가면서 되는 일 없이 말만 무성해야 인생이 편한 ‘회사 공무원’들에 치여 떠나거나 동화된다.

도전의 기상은 높지만 안목이 없는 우둔한 경영자는 그럴듯한 배경과 우아한 말로 포장된 얼치기 인재들을 그러모았다가 그나마 멀쩡하던 회사도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

사업에 대한 안목이 없을수록 어디에 쓸지도 모르면서 폼 나는 경력에 집착하니 껍데기만 그럴듯한 가짜나 퇴물에 속기 십상이다. 눈치껏 회사를 파먹으며 실리를 챙기는 ‘회사 공무원’들은 만만한 가짜나 퇴물을 적당히 앞에 내세워 ‘최고의 인재를 영입했다’고 생색을 낸다.

일이 잘 안되면 세계 최고의 인재에 맡겨도 못했으니 슬쩍 책임을 면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해보겠다”면서 세월을 더 보낼 수도 있다. 우둔한 경영자의 허영심과 무지함을 농락하는 셈이다.

훌륭한 경영자와 함께 창의와 혁신에 불타는 인재들이 힘을 모으는 아름다운 스토리에 익숙한 이들은 이런 비딱한 시선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동화책만 읽은 공주님이 백마 탄 왕자만 기다리다 죽는 것보다는 음모와 배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왕국의 경영을 공부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필자가 만났던 한 외국 기업의 경영자는 한국 대기업의 경영진을 보면서 처음에는 세계 유수의 기업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그들의 호랑이 같은 유능함에 놀라고, 다음에는 그들의 토끼 같은 눈치와 체념에 놀랐다고 한다. 어쩌다가 호랑이처럼 유능한 이들이 토끼처럼 눈치를 보게 됐을까. 실제 사례를 놓고 생각해 보자.

모 대기업 계열사 패션사업부의 ‘어전회의’ 현장. 회장님 앞에서 전략계획을 읽는 지주회사 출신 사장은 충성을 내걸고 숫자로 회사를 틀어쥘 뿐 패션에 대해선 모른다.

30년간 양복 장사만 해온 본부장도 요즘 유행하는 패션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파워포인트를 넘기는 담당 이사는 디자인실에서 공장·매장까지 패션을 익힌 역전의 용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본부장과 사장은 모르는 얘기는 듣지 않고 회장님 옆의 ‘전사적 인재’들이 내려보낸 숫자나 눈치 보며 맞추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회장님의 질문과 사장님의 답변, 본부장의 보충 설명도 사전에 시간 계획까지 맞춘 시나리오 그대로다.

영상물을 포함한 발표 자료는 전문 컨설팅사가 만든 것이다. 현장에서 직접 검색하며 판단하고 보드에 그림 그려 가며 다투는 일은 미국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어전회의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면 최소한 불경죄, 잘못되면 도청 용의자가 되니까 말이다.

물려받은 돈을 지키는 게 전부인 회장님도 딸에게 주워들은 명품 얘기나 조금 알 뿐이다. 이런 회장의 눈높이에 맞춘 하향 평준화 회의가 벌어지고 서로 책임 떠넘기는 눈치 다툼 와중에 소중한 사업기회는 다 사라져버린다.

눈치와 비굴함으로 버티는 이 회사의 경영진은 그럴듯한 경영학 용어로 무식함을 가리면서 혹시나 잘난 담당 이사의 ‘이상한 얘기’가 회장님(혹은 따님)에게 들어갈까 철통 방어에 들어간다. 눈치와 비굴이 주특기인 사장과 본부장, 실무진은 어느새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진다.

원래 눈치와 비굴이 특기였는지, 살아남으려고 적응한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그럴듯한 경영학 단어가 ‘제2외국어’처럼 암송되고 가끔 돈 주고받은 컨설팅 보고서가 단어장에 포함된다.
회사는 실밥 따면서 학교 다닌 봉제 공장 딸들이 가질 법한 패션 열정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입사 면접에서는 뉴욕 패션스쿨 나오고 명품 브랜드가 자연스러운 부잣집 따님의 둥둥 떠다니는 우아한 단어들이 훨씬 돋보인다. 어쩌다 패션 일을 하게 된 힘없는 아저씨들에게는 이런 우아한 따님이 패션 그 자체이니까. 물론 우아한 따님들은 얼마 안 돼 눈치와 비굴이 대세인 회사를 떠난다.

토끼들은 빛깔 좋은 토끼를 좋아하고 호랑이는 눈치 보다 토끼가 되는 회사는 맹수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그저 먹잇감이 될 뿐이다.
◆조커가 은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2000년대 초반 ‘인재 전쟁(War for Talent)’이라는 책이 관심을 끈 바 있다. 최고의 전략 컨설팅 회사라는 곳에서 펴낸 이 책은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유능한 인재를 찾는 데 얼마나 노력을 쏟고 있고 특히 잘 정리된 지식과 넓고 새로운 안목을 가진 인재가 수혈되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책에서 인재 전쟁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 ‘엔론(Enron)’이라는 회사는 나중에 남의 돈으로 폼 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그럴듯한 일만 잔뜩 벌이다 크게 망한 사례로 전락했다.

‘판돈 없는 게임(A Game without Chips)’이라는 책에는 기업에 대한 책임 없이 현란한 경영 기법을 내세우며 경영에 대한 자신의 로망을 펴보려는 컨설턴트들의 속사정이 묘사돼 있다.

이 책에 비춰 보면 엔론의 패망은 경영진이 남의 돈으로 ‘밑져야 본전’인 게임을 거듭한 결과다. 그들의 무책임한 로망이 시장의 유행에 편승해 세상을 어지럽힌 셈이다. 과연 엔론의 사람들은 인재였을까.

최근 ‘배트맨’ 시리즈의 영원한 악당 ‘조커’를 주인공으로 그의 억울하고 슬픈 사연을 담은 영화가 상영돼 인기를 끌고 있다.

불우한 성장 환경 속에서 계속되는 불운과 억울한 사연들, 웃음을 조절하지 못하는 특이한 병까지 갖고 있던 그는 결국 내면의 어두움이 타고난 재능과 화학반응을 하며 악당이 되어 간다.

이런 조커는 다르게 보면 나름 ‘슈퍼 히어로’인 배트맨을 상대로 당당히 맞설 정도의 재능과 정신력을 가진 인물이다. 만약 조커의 집이 배트맨처럼 부자였거나 어려서 좋은 인연을 만났다면 얼마든지 배트맨 못지 않은 영웅으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조커’의 재능을 살려 쓰려면?
현실의 경영은 어딘가 부족하거나 최선을 다하기엔 사연이 있는 심란한 사람들, 즉 조커와 같은 이들이 조직 내에 모여 서로 다투고 미워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목표를 위한 최선의 노력은 책에 나오는 얘기일 뿐, 실제로는 망하지 않으려고 할 수 없이 손잡고 꾸역꾸역 만들어 낸 약간의 성과를 밑천 삼아 버티고 있을 뿐이다.

완벽한 인재는 원래 없고 만에 하나 있어도 자기 사업이 아닌 일에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한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현실의 경영자는 조커의 재능을 찾아서 살려내고 그의 아픔과 부족함을 덮어줘야 한다. 경영자 스스로가 배트맨이 아닌 조금 사정이 나았던 조커임을 깨닫는다면 훨씬 더 잘할 것이다.

마피아 조직을 다룬 영화나 소설에는 버려진 아이가 보스에게 키워진 뒤 나중에 목숨을 던지며 보스를 구하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험한 세상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에도 승부를 걸어 보려면 유능함 이전에 영혼을 건 노력이 필요하다. 주변의 보살핌 속에 응석받이로 큰 모범생은 고마움을 잘 모른다. 지푸라기 하나가 절실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차이보다 영혼의 차이는 훨씬 크고 도움이 절실할수록 고마움은 더욱 진하다. 조커의 절실함을 이해하고 그 재능을 키워 내지 못하는 경영자는 불가능에 도전할 수 없다.

한국의 외환위기·금융위기 역사에서도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제임스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일찍이 경제와 금융에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세상일에 몹시 서투른 로렌스 서머스를 차관으로 두고 집중 훈련시킨 후 장관 자리를 물려줬다.

거칠고 모난 큰 돌을 다듬어 크게 쓴 사례인데, 우리 역사에도 재상인 황희가 젊은 김종서를 틈만 나면 호되게 야단친 기록이 나온다. 김종서가 워낙 영민하고 기백이 강해 어지간한 사람들은 감당을 못하니 황희가 살았을 때 어떻게든 다듬어 키우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학력도 경력도 화려했던 엔론의 사람들과 보스를 위해 목숨을 건 고아, 과연 누가 진정한 인재일까. 당장 눈앞의 실적에 쫓기는 경영자가 반질반질 잘 다듬어진 만만한 돌을 마다하고 거칠고 모난 큰 돌을 애써 다듬을 수 있을까.

무지와 허영심을 파고드는 그럴듯한 말과 여기 휘둘리는 사람들 속에서 조커의 절실함을 살려낼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6호(2019.10.14 ~ 2019.10.20) 기사입니다.]